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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욕망의 모호한 대상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욕망의 모호한 대상 (1977)
감독 : 루이 브뉘엘

출연 :
캐롤 부케, 안젤라 몰리나

 

중년의 빠리 부르주아와 안달루시아 짚시의 불가해한 사랑으로 풀어낸 죽음과 권력에 관한, 제목이 아주 멋진 영화. 도대체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라니...! 무릇 모든 욕망이 모호하지 않던가?


불굴의, 그러나 고착된 욕망을 가진 남자, 그건 죽음 혹은 소유의 현실적 표정이다. 여자는 자신의 도발적인 모호함에 그의 욕망을 매달고 자유와 권력의지 사이를 줄타기한다. 위험천만한 긴장으로 죽음을 이겨보려는 듯 기생적인 삶을 이어간다. 긴장의 매듭이 풀리는 순간 죽음은 테러처럼 덮쳐온다. 일순의 방심이 생사를 갈라놓고 말리니...

자신을 돌아보는 여자의 시선도 욕망에서 그리 멀지 않다. 타인의 욕망에 기생하는 ‘모호함'이란 그 욕망을 통해 권력이 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이기도 하기에.

불굴의 욕망과 냉소 어린 모호함이 때로는 나란하게 때로는 서로 얽히며 주제를 엮어간다. 변주를 풀어가는 건 부르주아적 근엄으로 얼굴을 가린 천박한 엿보기의 욕망들 몫이다. 자신의 욕망을 공개적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의 주장에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엿보기의 욕망은 정당화된다. 빠리의 정숙한 부인이나 근엄한 판사인들 그걸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비록 그것이 불러올 최후의 모욕감은 시체처럼 널브러진 욕망들의 파편 속에 묻어둔 채, 한 무리의 초점 잃은 시선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하더라도...

바로크 통주저음처럼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울리는 죽음의 가락은 오히려 일관된 뼈대로 모든 살아 꿈틀대는 욕망과 자유 혹은 권력을 냉소하듯 제 갈 길을 간다. 지금은 아무도 믿지 않지만, 때가 되면 한순간 모든 것이 서로 만나고 말리니. 불길한 예언처럼, 음조는 달라도 모두가 노래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어디서든 만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최소한 피의 이끌림이라도 말이다.

 

 

마띠유란 남자. 애써 비켜가지만 끝내 그의 것이 되고 마는 쓰레기 보따리에선 죽음의 냄새가 난다. 가는 곳마다 그는 죽음을 선물한다. 심지어 벌레나 동물에게조차도. 그의 사랑이란 소유이기에, 그가 줄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알지 못하며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도 눈치채지 못한다. 

짚시 여자 콘치타. 그녀는 그에게 소유되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치명적 욕망의 포로다. 애매하고 냉소적인 눈빛, 관능에 젖은 노래와 춤으로 자신을 온통 모호함으로 물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죽음의 빛과 냄새를 향하여 부나비처럼 날아들고 있지 않는가? 불가능을 향한 콘치타의 맹목은 마띠유와 다르지 않다. 

마지막 순간, 마띠유에 이끌려 그녀가 쇼윈도 너머로 본 것들은 사물의 온전한 모습을 가리며 널브러진 흰 천들이었다. 찢어지고 피에 얼룩진 속옷과 그것을 꿰매고 있던 여인의 공허한 눈... 희망과 냉소만 어른거렸던 콘치타의 눈빛에 문득 공포가 스친다. 여인이 풀어헤친 보따리란, 마띠유가 콘치타에게 그토록 보여주고 싶어했던 바로 그것이 아닌가?

결국 그 남자의 세계는 죽음 이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관계를 맺는 모든 것들의 죽음 위에서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가는 부르주아적 소유와 위선의 대명사였음을.

그걸 깨닫는 순간! 죽음은 너무도 빨리 엄습한다. 

'사랑'이란 헛된 이름에 기대 생사의 모호한 경계에서 벌이는 곡예마냥 부질없는 탐닉. 하물며 소통이 차단된 일방적이고 불구적인 욕망이 그 외줄이었음에랴. 욕망하는 자와 욕망되는 것, 욕망의 상투성과 위선, 그리고 욕망되는 것의 물신성. 그 모호하면서 전혀 모호하지 않은 욕망을 잇는 끈 혹은 통로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이보다 더 통렬할 수 있을까?

짚시와 아나키즘의 고장 안달루시아가 사랑의 도시 빠리의 부르주아지들을 향해 날리는 현란한 조롱일까? 작렬하는 폭탄의 불꽃 속에서 감독은 거칠게 내뱉는 듯하다.

“웃기고 자빠졌네 위선자들, 그쯤에서 집어쳐...!!” 


2인 1역의 설정은 기발하고 훌륭하다. 우리 시선의 상투성을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분쇄하기란 쉽지 않을 터. 모호함의 강조로 콘치타의 캐릭터는 생기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