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아메리칸 뷰티 (1999)
감독 : 샘 멘데스
시답잖은 질문 하나. 도회의 잿빛 콘크리트 더미와 질주하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고립된 개체들의 무한경쟁에 휘둘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나르시시즘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지 않느냐고? 거기가 바로 지옥이라면?
샤워 중에 수음을 하는 사내.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려 오는 몽환은 화면을 가득 메우는 장미꽃의 휘날림으로 이어진다. 뭇 남성을 달구는 뇌쇄적인 여체가 꽃잎 더미에 묻혀 있다. 초라한 오감은, 아니 육감은 맹렬히 자극 받는다.
환상은 도시의 거리에도 있다. 바람에 나부끼며 허공을 맴도는 비닐조각. 바람의 춤일까, 비닐조각의 춤일까? 흐르는 바람에 자신을 내맡기고 보는 자와 보여지는 것, 흔드는 것과 흔들리는 것이 그대로 하나가 되는 망아(忘我)의 경지일까? 춤은 어지럼에 지쳐 땅에 내릴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몰아대는 바람의 부력을 놓치면 중력에 이끌리어 길고 낮게 누워야 하는 운명일까? 춤은 영화의 무게중심에 자리하며 도회적 삶에 깃든 헛된 나르시시즘의 극치를 드러낸다.
조숙하게 달관한 듯한 청년의 시선과 카메라도 나르시시즘의 함정을 비켜 가진 못한다. 죽음까지 아우르는 삶의 신비를 드러내려 하지만, 카메라에 숨은 그의 시선은 창에 달라붙은 평면적 진실만을 볼뿐이다. 박제된 평면은 시니컬한 그의 삶의 진실을 은폐하며 나르시시즘의 도구로 변질된다. 역시 그 아버지의 아들, 겹겹으로 잠겨진 각각의 세계는 통로 없는 격자로 완강히 격리되어 있다.
관조하는 시선의 평면성과 자폐하는 나르시시즘의 깊이가 교차하는 곳에서 삶은 모순적으로 구현된다. 막연하나마 우린 언젠가 그 모순이 지양될 것이라고, 그 곳은 바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만남을 단련하는 생생한 현실에서일 거라고 기대할 수 있다. 늘 그래 왔듯, 세상은 바로 여기서 이루어지기에.
'성공의 이미지'를 그리려는 여자가 있다. 이미지가 성공 자체일 수 없음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환상의 지속이다. 물론 허위 혹은 또 하나의 나르시시즘이다. 수많은 타인의 시선과 선망만으로 이루어지는 성공의 이미지가 자신의 것은 아니다. 분열 혹은 파탄은 예정된 바다. 그러나 남들의 것으로 자신을 일구려던 자가 혼자만의 파탄을 순순히 받아들일까?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가능하면 그는 말살되어도 좋다. 그게 경쟁사회의 참된(?) 전사가 그려낼 최후의 이미지와 제대로 맞아떨어진다.
파국을 꿈꾸는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앞서의 그녀가 그려내는 허위와 분열의 이미지가 보다 역동적이었다면, 이건 좀 정적이고 음습하다. 그는 많은 걸 숨기고 살아간다. 억압된 동성애와 은밀한 나찌즘. 그의 세계는 질서로 드러난 부분과 드러내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그는 드러난 세상의 혼란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건 바로 자기모순의 억압에서 오는 위선의 표면 아닌가. 해병대 대령의 호칭과 빅토리아조의 가부장적 경건 아래 잠복한 퇴행적 모순은 자기분열을 준비한다. 냉혹하고 혼란스런 현실이 기어이 그를 찢어 놓으며 또 한 전사가 태어난다.
잠재된 분열과 허위를 까발리는 자는 다름 아닌 가족이다. 가족이란 타인들이 곧 지옥이다. 그들의 시선은 가장 냉혹한 현실, 얼음으로 벼린 비수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절망과 분노를 북돋우며 더욱 거세진다. 단호히 총을 뽑아든 두 전사의 발걸음은 하나의 죽음을 향해 수렴한다. 반대쪽에는 깨져버린 가족과 허위를 등지고 자신들만의 삶을 찾아 떠나려는 젊은 남녀가 있다. 가족의 틀에 눈을 맞춘다면, 해체된 두 가족의 구성원이 한 남자의 존재와 죽음을 중심으로 대칭구도를 그리며 수렴, 발산한다.
카메라 너머의 세상만을 진실이라 고집하던 청년은 삶 속으로 뛰어든다. 화면 속의 신비롭고 정갈한 평면적 진실 대신 구체적 현실의 생명을 사랑해야 하고, 관조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누군가에 의해 죽어야 할 자의 딸이다. 속물적인 부모를 혐오하는 그녀는 죽어버린 가정의 난처한 상징일 게다. 창백한 표정과 새빨간 입술의 윤곽이 빚는 지극히 평면적인 이미지가 싸늘하게 타는 시선에 이르면 영문 모를 에로틱함이 된다. 영화의 처음부터 배어나는 묘한 나르시시즘을 제법 든든하게 지탱하는 건 그녀의 몫이다.
그러나 그 싸늘한 나르시시즘이 청년의 시선에 사로잡힐 때, 평면적 진실은 삶의 깊이 또는 연민을 획득하고 지루하게 반복되어온 주제, 사랑으로 변주되어간다. 사랑이란 그런 걸까? 사물에 빛깔과 움직임을 불어넣는 것? 그러나 그들 역시 결국은 얼음장처럼 부서지고 말 것, 가정을 꿈꾸고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멋진 역설이다. 성공한 삶과 세상의 질서를 추구하던 자들은 죽음을 향해 날아들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것들에 즐겨 시선을 두던 청년과 냉소만 흘리던 창백한 얼굴의 소녀가 미지의 삶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는 건.
영화 포스터를 멋지게 장식한 귀여운 멍청이 안젤라(왜 이 이름만 기억날까?). 타인의 시선과 욕망에서 벗어남을 두려워하며 환상과 허세에 살던 그녀는 스스로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혼자서기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 첫걸음을 도왔던 손길에 축복 있으라...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자들과 비켜서는 자들, 수렴과 발산의 가운데 놓인 남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꿈꾼다. 그럼으로써 죽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타자이다. 더 이상 장미의 환상은 없다. 휘날리며 내리던 장미꽃잎과 꿈틀대던 근육질도 부서진 가정을 넘어 찾아낸 나르시시즘을 장식하는 소도구가 아니었던가?
욕망이 살아있던 한 시절, 그것들은 덧없는 삶과 세상을 기름지게 치장한다. 그러나 죽음 또한 덧없는 것이며, 그로부터의 해탈이 아닌가? 죽어가면서, 티 없이 나른한 아름다움으로 이승의 프로그램은 다시 한 번 파노라마로 반복된다. 순간의 압축버전으로 건져낸 삶은 허위에 오염되지 않은 무구함 자체였다.
그 무구의 힘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모든 허위들을 하나의 죽음에 거두어 함께 사라져갈 수 있을까? 누가 알겠는가? 한 발의 총탄과 세 죽음.
사라진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죽음의 자리는 쉽사리 채워지고 잊혀지며 내일의 세상에 또 다른 이들이 있을 뿐이다. 죽음이란 죽는 자의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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