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8명의 여인들 (2002)
감독 : 프랑수아 오종
오종 감독의 <스위밍 풀>을 보고 심리 묘사가 탁월하고 깔끔한, 그러나 깊이가 좀 부족한 스릴러라 생각했다. 그 후 오종 영화제에서 단편들을 포함, 수편의 영화를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동성애, 근친상간, 나아가 병리학적으로 다루어질만한 극단의 욕망과 상상력이 그의 손에서 재기 넘치는 표현을 얻었다. 극단적인 소재들을 신랄하게 다루지만 무겁지 않았다. 무표정하고 섬뜩하지만 블랙풍으로 코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끝까지 간다.
이 영화 역시 오종표다. 그의 주특기인 상식과 일상에 대한 도발과 전복이 전작들과 달리 꽤나 우아하게(!) 펼쳐진다. 평온해 보이던 일상을 가차 없이 깨뜨리는 숨겨진 진실 - 혹은 상상적 진실 - 들을 드러내 놓고 이래도 감당할 자신이 있냐고 이죽거린다. 어때? 이걸 보고도 살고 싶다면 미친놈이지!!
그래도 이번엔 그 진실들이 선혈 낭자하고 무표정한 날것이 아니라, 말로 걸러지고 노래로 다듬어져 익숙한 사람 냄새에 묻어온다. 한결 영화를 부드럽게 만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옳으신 말씀! 아비이고 남편이며 주인인 그 남자는 영원히 자유롭게 되었다. 진실은 가혹하고 잔인하다.
사랑? 여덟 여자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의 목을 비틀거나 배반한다. 가장 지극한 사랑이 가장 치명적이란 건 지독한 아이러니다. 그러나 바로 그게 진실을 대하는 진실된 태도거니. 불쌍하고 고지식하고 멍청한 녀석...
진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고통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말씀을 믿었어야지. 거짓의 고통,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해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게 구차하지만 사는 길인데 말이다. 사내들이란 정말 쥐뿔도 모른다. 죽어도 싸지...^^
‘고독한 영혼의 전사’라고? 살해자의 입에서 나오는 저 말을 믿는 바보야 없겠지.
그의 다른 영화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 너무 멀리 가버린 한 남자를 끌어 묻고 돌아선 가족들은 상복을 입은 채 킬킬거린다. 그게 오종의 여자들이며 가족들이다.
이 땅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인간이란 족속, 욕망이란 심연과 그보다 더 깊은 상상력을 가진, 지구상에서 가장 기괴한 동물의 세계. 산 자들, 외롭고 슬프고 찧고 까부는 것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 또 다른 호기심으로 기다려 볼 일이다.
배역이 대단하다. 여덟 색깔의 여자와 연기를 보는 맛만으로도 영화는 돈 값을 한다. 여기서도 한 사이코하는 <피아니스트>의 그 눈빛, 이자벨 위페르, 귀여운 막내로 나오는 오종 영화의 맹한 단골, 뤼디빈 사니에르, 좀 파삭해졌지만 여전히 요염한 에마누엘 베아르, <셀부르의 우산>의 옛날 그 목소리와 비교하게 만드는 까드린느 드뇌브...
제목은 펠리니의 <8과 1/2>이나 그리너웨이의 <8과 1/2 우먼>을 떠올리게 하지만 내용은 반대다. 한 남자의 여덟 여자가 아니라 여덟 여자의 지워진 한 남자 얘기니깐. 그래서 남자는 뒤통수뿐이고 이름도 없다. ㅉㅉㅉ
'영화,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메리칸 뷰티 - 나르시시즘을 넘어 (0) | 2007.09.01 |
---|---|
고하토 (0) | 2007.09.01 |
감각의 제국 - 파시즘, 열정과 해탈의 미학 (0) | 2007.09.01 |
질투는 나의 힘 - 젊은 날, 문 앞에서 몽유하다 (0) | 2007.09.01 |
아바론 - 꿈은 계속되는가? (0) | 2007.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