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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감각의 제국 - 파시즘, 열정과 해탈의 미학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감각의 제국 (1976)
감독 : 오시마 나기사

출연 :

 

그림 하나가 떠오른다. 상체를 드러낸 여자가 두 손으로 남자의 잘린 성기를 치켜들고 있다.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여자의 그림자는 흑표범이 되어 드리워진 핏줄기에 코를 갖다 댄다. 율리우스 클링어의 <살로메>.

출구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 세기말의 정서가 섬뜩하다. 그 광기에 사랑 혹은 민족, 국가 따위를 대입해 보자. 그게 개인의 현실적 삶에서 분리될 수 없다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된다. 그렇다. 회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몰입한다. 파시즘은 그렇게 태어나고, 도취된 죽음 위에서 벚꽃처럼 만발한다.

남자는 여자의 쾌락의 극치를 위해 죽어간다. 그러나 영화는 죽음에 탐닉하는 살해자만이 아니라, 죽는 자와의 미묘한 심리적 역학관계를 뒤쫓는다는 점에서 <살로메>와 초점이 다르다.

예견된 죽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혼이 간절히 원하던 바 아닐까? 죽음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의 심연 앞에서 느끼는 무력과 권태가 광기의 시대를 살던 이들의 보편적 정서였을까?

비슷한 영화가 있었다. 탐미적 영상으로 펼쳐지는 권태와 권력의 서정시편, <빠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잘 기억나진 않으나) <..마지막 탱고>의 권력은 자신의 권태를 모체로 태어나 타인의 무기력한 욕망 위에서 자라난다. 또 권력은 거부해야 할 폭력적 타자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좀 미묘하다.


일본이 중국 본토까지 침략하며 대동아 공영의 원대한 꿈이 절정에 달했던 1939년. 꿈의 한 그늘, 늘 젖어있는 여자와 금세 다시 커지는 남자의 죽음을 향한 섹스 행각이 있다. 허기진 그들을 채워주는 건 섹스가 전부다. 그들이 꿈꾸는 '감각의 나라'에서 상식적 삶은 오히려 낯설다. 가치 전복은 완벽하도록 무심하다. 돌파구 없이 짓눌린 삶과 열정의 도착이 권태와 무기력이라면 <감각의 제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이웃이다. 가면보다 짙은 화장의 게이샤가 눈먼 제국의 신민이라면, 퇴폐적 탐미조차 잃고 습관적으로 울어대는 샤미센(三味線)의 선율은 현실의 소리를 잃어버린 귀머거리의 나라를 노래한다.

일상에서 멀어질수록 외곬의 욕망은 자꾸 커진다. 나눌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어야 할 그의 몸과 허기 속에서 오감을 깨어있게 하는 한 잔의 술, 필요한 건 그뿐이다. 엉켜 흐르는 욕망은 ‘감각의 나라'를 ‘감각의 제국'으로 변질시켜 간다. 힘의 균형이 깨지며 섹스는 권력관계로 긴장한다.

권력은 어떻게 생겨날까? 그건 엄습하듯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안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삶의 한 방식이다. 인간은 갈애(渴愛)의 덩어리며 그 변화무쌍한 흐름이다. 여자의 집착이 추호의 동요 없이 깊어갈수록,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권태와 무기력도 깊어진다. 사내는 자발적으로 포로가 된다. 여자가 절정을 꿈꾸면 사내는 잠들고 싶다. 잠드는 것은 곧 죽음이 아닌가? 그는 늘 공허하게 웃을 뿐이다.

그의 외출 장면. 출정하는 황군의 발걸음만큼이나 환송하는 일장기의 나부낌도 지쳐 보인다. 행군 대열을 거슬러 가는 그는 군인들보다 더 무표정하다. 병사들의 어깨에는 거부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무기력만 피어나고,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동병상련의 무감동한 권태에 젖는다.

 

  

저 만연한 권태의 정체는 무얼까? 소통 없는 일방적 권력을 낳는 토양으로, 그 시대를 살던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조숙한 아이가 그렇듯, 너무 빨리 지쳐버려 미친 듯 달려간 자신의 모습이 문득 공허해지는 걸까? 그러나 돌아보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건 절정에서 멈추어 빛처럼 스러지는 것, 그게 파시즘의 미학 아닌가?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니라 문턱에서 되돌아오는 것이다. 목숨을 건 쾌락게임에 미묘한 긴장이 번진다. 혼신을 다하는 탐닉과 무기력 사이에서 무한권력의 욕망과 소멸의 꿈은 하나가 된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를 잇는 저 표정과 시선은 얼마나 인상적인가. 절정에서 꿈꾸는 죽음과 지독한 욕망의 칼날 아래서 맛보는 죽음이 행복하게 만난다.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비록 죽음의 승리일지라도 모든 것이 끝나는 거기에 너의 성취와 사로잡힌 내 영혼의 해방이 있다. 적의 항공모함을 향해 꽃처럼 낙하하는 가미가제... 죽어 가는 자는 '목 조르는 걸 중단하지 말아달라' 고 주문한다. 핏빛 기모노를 풀어헤치고 여자는 그의 위에 걸터앉아 목을 조른다. 절정에 떠는 등 뒤로 노을은 붉게 물들고 영원을 탐하는 손길은 더없이 감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