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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질투는 나의 힘 - 젊은 날, 문 앞에서 몽유하다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질투는 나의 힘 (2002)
감독 : 박찬옥

출연 :

 

원상(박해일)이라는 녀석,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많이 흐리다. 이 영화가 홍상수를 닮았다지만 내겐 전혀 아니다. 홍이 훨씬 투명하다. 비켜가듯 다면의 얼개로 흐물거리지만 더욱 단단하게 드러난다. 허나 박찬옥의 원상은 문 앞에서 서성인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누군가에게 스며들며 사라지려는 듯... 그러나 어느 새 그는 또 다른 곳에 비스듬히 서 있다.


기나긴 젊은 날 그 어둡던 무의식의 터널, 지그시 치밀듯 꾹꾹 눌러가며 흘러간다. 

사는 일은 얼마나 너절한가. 인간현상은 어쩌면 늙어가는 지구의 농담인지 모른다. 나는 젊다는 게 무엇이었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원상에게 이르는 길을 잃어버렸다. 흐린 구름을 걷으려 감독의 변을 보았다. ‘질투’란 단어에 ‘결핍’을 걸쳐놓고 있었다. 젊음, 결핍과 선망의 모호한 갈등? 가지지 못한, 그러므로 힘이 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달리는 차창 너머 배종옥의 취한 눈에 들던 거리의 불빛, 밤에야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는 어지러운 홍등들, 삶이라는 남루한 거리에 나부끼던... 욕망이라는 밑그림은 모두의 시선에 들켜버린 황량한 지평일 따름이다. 사막 끝 신기루를 바라보는 젊은 날의 피로, 욕망은 늘 늙고 비루했었다. 늘 잠들어 있고 싶었다.

‘힘’이라니... 당치 않다. 야금야금 파먹으며 - 누구를? 자신을? - 한없이 얇아지거나 무뎌져 가고 소모조차 사치란 걸 알았을 때 침묵은 온다. 먼저 가는 말을 앞세워 침묵을 숨기면 이미 한 고비를 넘고 있다. ‘말할 줄 아는 자만이 침묵할 수 있다’는 주장은 헛되다. 늙은 지구는 농담을 모른다. 세계의 침묵을 위로하며 독백할 뿐이다. 얼마 전에 본 소설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존재와 구별의 세계와, 무와 개체의 소멸의 세계가 있다면 나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

지치지 않는 그들은 오늘도 꿋꿋이 밤길을 휘청거린다. 떠도는 이들은 문 앞에 서서 몽유의 지옥을 서성인다(모든 인간은 행려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럴 것이다). 미천한 태생이라 그러했고, 비켜가지 않으려 그러했고. 그밖에 또 수많은 이유들...

그러나 모를 일이다, 푸른 피는 빛바랬지만 어린 것들은 끝없이 솟아오르고 나이의 그늘 위로 겹쳐지며 사라진다. 또 다른 젖빛 푸르름이 사월의 죽어가는 지구를 뒤덮는다...

그는 문 앞에 서 있고, 또 다른 그는 언젠가 거기서 도망치고야 말 누군가의 방문을 두드린다. 바람이 사랑하는 것은 오직 바람 뿐, 제 무게를 버릴 수 있는 자들만이 누군가로부터 누군가에게로 사라질 수 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으니 낯설면서도 조금은 좋아진다.


박찬옥 감독, 젊은 걸로 아는데 사진은 무척 나이 들어 보인다. 조숙한 달관의 혐의를 걸어 본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란 이름이 어른거린다.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좋다. 문성근, 배종옥 그리고 박해일(원상) 또 원상의 하숙집 딸인지 주인인지 그녀... 일상을 들추는 갈피갈피에 녹아들어 농익은 연기는 마치 실제의 그들을 보는 듯하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