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미래의 꿈. 지독히 고독한 자들의 세계, 표정은 실종되고 공허한 시선들은 각기 다른 곳을 본다. 머리와 얼굴 없는 몸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잿빛 평면의 닫힌 공간들. 길게 드러누운 개가 방의 한가운데 있다. 구토를 일으키는,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상의 시선과 욕구들. 창 너머 내리는 비는 그래도 아름답다.
꿈과 현실의 차이는 뭘까? 꿈에서도 감각은 또렷하다. 사과는 여전히 달고 맛있다. 물론 꿈속의 사물은 깨고 나면 사라지고 신진대사의 유지 없이 꿈이 계속되면 죽는다. 그러나 꿈은 깨어남을 전제로 꿈이다. 깨지 않는 꿈은 몸이 접속한 또 하나의 현실이다. 99.999....%의 꿈은 현실인가 꿈인가? 꿈을 조종하려는 자, 꿈을 팔려는 자는 꿈은 늘리고 현실은 줄인다.
불사의 꿈이 실현되는 망각의 섬 아바론(avalon). 그림자의 낙원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며 빛나는 죽음이다. 현실은 흑백 기억에 의존하는 초라한 관념일 뿐이다. 아바론에 뛰어든 전사 애슈(Ash)는 자신과 현실을 구할 수 있을까?
자아의식? 자아란 현실의 경험과 욕망이다. 식욕이 존재의 현실성을 뒷받침한다. 개와 사람은 그 점에서 동등하다. 그러나 ‘욕구하는 개’가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나는 욕망한다’로 확보한 존재의 현실감도 모호하다.
개는 아바론의 포스터 속에서 또 다른 현실로 그녀를 유혹한다. 가상현실은 부시게 아름답고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이다. 몸은 현실에 버려둔 옛 동료는 꿈을 즐긴다. 사라진 개도 또다른 현실을 누린다.
그녀는 쏜다. 커다란 꿈 하나가 사라진다. 개는 어디로? 다행히(?) 개에겐 꿈꾸는 자아가 없다. 그 넘에겐 꿈과 현실이 다르지 않다.
동료 혹은 자신의 꿈 하나를 박살냈다고 그녀가 현실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관문은 끝까지 열려야 한다. class real은 이미 안팎이 없는 현실이다. 자신 혹은 누군가의 관념이 빚어낸 무한 영역인 클래스 리얼은 꿈의 미로와 현실을 잇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던져버린 게임이다. 자신 외에 누구도 게임을 끝내지 못한다. 옛 동료는 현실과 허구의 구분에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오직 ‘필드’가 있을 뿐이라고.
하나의 결론이 가능하다. 가상현실은 타인의 꿈이다. 그 꿈을 받아들여 지지하는 건 나의 꿈이다. 타인의 꿈을 꾸는 나의 꿈, 그것이 바로 최후의 가상현실, ‘클래스 리얼’이다.
그녀는 이길 수 있을까? 상투적으로 추리하면, 마지막 관문에서 그녀는 현실인 동시에 가상현실인 자신을 쏘아야 한다. 자신의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타인의 것인 그 꿈과, 꿈의 근거 모두를 향해 총알을 날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쏘았던 동료처럼 가상현실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게임을 끝내는 건 자신의 꿈을 박살내는 것이다.
가상현실을 유지하는 두 개의 코드는 믿음과 욕망이다. 뛰어든 상황을 긍정함으로써 현실은 구성되고 드러난다. ‘이건 아니야’라고, 별도의 현실이 어딘가 있다고 여기면 가상현실의 리얼리티는 불가능하다. 가상현실은 ‘믿음’에 성립한다.
다른 하나는 현실과 가상현실을 관통하는 ‘욕망’이다. 둘을 분리하는 코드이기도 한 욕망은 ‘자아’라 해도 좋을 인간만의 어떤 지향으로 가상현실을 유지하고 강화한다. 믿음은 ‘바램’의 문제가 된다. 아바론이 현실성을 얻는 것도 이 욕망의 윤리학에서다. ‘뭐가 현실이냐’는 질문이 ‘무얼 원하느냐’로 된다. 진리게임은 생존게임이 된다. ‘현실을 도피하자 말라’와 행복해질 권리가 충돌한다. 진실이냐, 욕망이냐는 또 존재냐 삶이냐의 질문이기도 하다. 존재를 포기하면 욕망의 지평에서 떠오르는 기름진 삶이 있고, 삶을 포기하면 지루하게 반복되며 창백하게 이어지는 존재의 현실감(?)이 있다.
꿈은 꿈꾸어진 것이기에 존재할 권리가 있다. 헛된 어둠을 누비며 빛바랜 화면에 떠도는 한 줌의 재 - 그녀의 이름이기도 한 - 같은 삶을 뚫고 오르려는 욕망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 현실을 빚는 것이 마음이라면, 마음은 믿음이고 욕망이다. 욕망하는 순간 세상은 드러난다. 믿음의 요구에 맞게 사물은 구성된다. 믿음이 곧 참이며 가상현실은 현실의 지위를 얻는다. ‘나는 믿는다. 고로 그것은 존재한다.’ 이 비논리적 명제가 우주 만물의 발생학인지 모른다.
그러나 믿음을 검증하려는 순간, 그 믿음은 이미 거짓이다. 보다 나은 가상현실 따위란 없다. 단지 계산되고 합성된, 누군가에 의해 전지적(全知的)으로 파악된 닫힌 세계다. 비현실성이 아니라 ‘파악된 세계’의 전체주의적 현실성이 문제다.
존재냐 삶이냐의 공리주의적 질문은 핵심을 흐리는 사이비 윤리다. 현실이 가상현실의 근거이며 통로일 뿐,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한계 지어진 무한한 현실을 잃을 때 꿈꿀 권리도 사라진다. 빛으로 가득한 아바론을 부수려면 그 빛을 있게 한 잿빛 어둠의 세계에서 시작해야 한다.
가상현실은 고도화된 관료주의다. 정보화에 기대어 지배를 꿈꾸는 누군가의 꿈, 이미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 버린 타인의 꿈이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생산되고 흘러드는 정보로 세계의 리얼리티는 유지된다. 이 시대, 누가 더 이상 꿈꾸지 않으며 누군가의 꿈이기를 그만둘 수 있을까? 모르는 그가 나를 꿈꾸고 나의 꿈을 더하여 세계는 더 큰 꿈이 된다.
그러나 흐름이 교란되면 세계는 뒤틀리고 무너진다. 불행한 욕망이 꿈꾸어야 할 자유란, 더 이상 꿈꾸지 않고 꿈꾸어지지 않는 것이다. 더 이상 나는 네 꿈이 아니며, 너는 내 꿈의 세계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영화,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각의 제국 - 파시즘, 열정과 해탈의 미학 (0) | 2007.09.01 |
---|---|
질투는 나의 힘 - 젊은 날, 문 앞에서 몽유하다 (0) | 2007.09.01 |
아비정전(DAYS OF BEING WILD) - 몇 장면들 (0) | 2007.09.01 |
쎄로또레 - 왜 산을 오르는가? (0) | 2007.08.31 |
탱고 - 마누라 죽이기 (0) | 2007.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