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 선운사 주차장 - 투구바위릉 - 사자바위 - 청룡산 - 낙조대 - 선운사
배맨바우에서 도솔암까지
가을이면 가을 선운이 좋았고 봄이면 봄 선운이 좋았는데 사계(四季)의 선운을 누릴 복이 이제야 닿은 걸까, 서쪽 가득한 눈소식에 겨울 선운이 궁금해집니다. 올 송년산행은 흐린 서해 바다 바라보며 눈덮인 낙조대에서...! 대충 그림이 나왔더랬습니다.
그러나 설국 드는 길인 양 흰 빛의 광야이던 정읍과 달리 정작 선운산은 눈발 좀 친 정도입니다. 기대를 접습니다. 심설 아니라면 차라리 안 가본 길 따라 어슬렁거리자... 종종걸음치는 일행 벗어나 여유 만끽하며 느리게 걷습니다.
선운계곡 따라 걷다가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덮인 오름길로 접어듭니다. 비로소 산은 적막해집니다. 오늘따라 바람소리조차 없습니다. 이후 두 시간여, 사람은커녕 발자국 하나 만나지 못하고 얇게 덮인 새하얀 눈길 따라 하염없이 흘러갔으니 겨울 산행의 진미를 제대로 누렸다 할 만합니다.
시간도 넉넉하기에 빨리 가는 우회로 두고 한 봉우리 한 봉우리 남김없이 더듬어 오릅니다. 눈 들어 바라보면 꿈같은 풍경, 아니 풍경인 꿈이 나를 지나갑니다. 남쪽 비탈은 눈이 녹고 있지만 햇살 등진 북쪽 비탈은 흙빛 덮는 성성한 눈발 위에 검푸른 나무들로 세밀화 그리는 전형적인 겨울산입니다. 온통 흰빛의 풍성한 단조로움보다 진정 겨울다운 칼칼한 풍경입니다.
먼빛의 선운사를 돌아봅니다. 기대했던 흰 눈 덮인 지붕 모습도, 봄이나 가을빛에 물든 따사롭고 평화로운 아름다움도 아닙니다. 잎 진 활엽숲과 꽃 이른 동백 푸른 그늘이 조금 황량한 듯해도 한없이 고요합니다. 바람 불지 않아도 하늘은 전부를 내렸다 돌아갔으니 부처의 무념무상 손길만이 저 적멸의 궁전을 지었다 할 만 합니다. 굽어보는 이 순간만이라도 고통없이 사라지는 길의 뒷모습을 엿본 느낌입니다.
큰 기복 없이 이어지는 능선길은 울컥 한번씩 치올리는 맛이 그만입니다. 암릉을 감싸는 성긴 솔숲 사이 새 눈 밟으며 걷는 운치도 좋습니다. 남쪽 멀리 눈발친 산자락을 제법 장엄하게 드리우고 있는 청룡산, 보는 각도에 따라 별의별 기이한 형상을 다 보여주는 배맨바우, 철계단이 인상적인 병풍바위와 낙조대 능선, 천마봉과 도솔암이 멀리 그림처럼 펼쳐지는 바위에 앉았습니다.
맘먹으면 한두 시간에 저 꼭지들까지 닿겠지만, 도회살이 비인간 기계의 속도를 비켜 산에 들었으니, 느리게 느리게 길 늘려 풍경의 깊이를 더하고 속박과 경쟁 없는 자유로운 몸을 누릴 일입니다. 그럼에도 간혹 산에서조차 속도에 취하며 박동하는 기계몸 향한 갈망을 뿌리치지 못하는 우리는 참 모순에 가득찬 동물임이 틀림없습니다.
도솔제 너머 안장바우, 병풍바우 능선
북동향 파노라마 - 왼쪽 멀리 경수산, 지나온 투구바위, 그 너머 구황봉에서 비학산 가는 능선
진행방향 능선
병풍바우에서 낙조대, 천마봉 - 사자바우능선에서
도솔암 일대
사자바우 지나 전망암릉길
확 풀려버린 날씨, 봄볕처럼 다사로운 햇살 고인 남능선에 비켜 앉아 김밥 한 점 안주삼아 소주 한 잔 털어 넣습니다. 나른한 눈으로 먼 곳을 봅니다. 세상 먼 곳들이 뿌연 이내에 잠겨 아득합니다. 아득함은 자주 무심의 거리이지만 때로 안타까움의 거리이기도 하겠지요. 말없는 아우성들은 마음의 풍경이 되어 도원경 혹은 지옥도를 오가며 흔들립니다.
여유롭게 걷다보니 어느 덧 천마봉. 낙조대와 도솔암 마애불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바위로 굳은 부처인지 부처로 태어난 바위인지 마주 선 두 바위벽 위로 황량하게 깊어가는 계절이 푸른 허공 물들이며 때 이른 노을로 걸립니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흐르는 풍경 따라 예까지 이르렀으니 아직 무겁고도 무서운 길의 인연, 놓지 못하는 미련의 손길을 해지는 서녘 지평 속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어 봅니다. 묵고 묵은 것, 언젠가 거칠 것 없는 세상으로 되돌아와 날빛으로 마주서길 바란다면 그 또한 덧없는 미련일까요? 오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내세의 인연을 짓는 것이라면 차라리 길의 인연을 끊고 숲으로만 들겠습니다. 흰 산 푸른 산도 등지고 낙조 절벽에 메아리쳐 올 금빛 구름만 먼 하늘로 바라보겠습니다, 라고 해야 할까요...?
한 해 동안 나를 지나 흘러갔던 바람들이 되돌아보는 시선에 물들어 옵니다. 그러므로 저 사계의 풍경을 물들이는 것은 쉼 없이 흘러가는 많고 많던 내 계절의 눈짓이기도 합니다. 캄캄하게 잠겨버린 몸의 기억은 씻어낼 수도 밀어낼 수도 없기에 때때로 빛과 바람 속에 몸을 놓아 투명하게 바래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수백년이 지나도 풍화하지 못하는 뼈들도 있는 법입니다. 눈감고 바위에 새긴 저 기이한 비바람의 표정들처럼....
전에는 늘 지나치기만 했던 도솔암 내원궁까지 올라봅니다. 막 낙조대에 걸리는 해가 붉어지려 합니다. 산은 하늘을 깊게 하고 하늘은 산은 드높입니다. 서로의 심연과 고도가 저토록 긴밀한데 구름은 그저 선운사 시린 용마루 높이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바람 지나갑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옛노래의 빛깔 닮았음을 알겠습니다. 문득 그에게로 쓸쓸해집니다. 저무는 해 가면 오래오래 고요해도 좋을 것이라 되뇌는 사이 안개가 소리 없이 창을 닫습니다. 밤이 다가오고 내 겨울의 집이 멀지 않습니다.
천마봉에서 보는 파노라마
도솔암 마애불 - 동학인들을 고무했던 복장 비결의 자리가 선명하다
낙조대 너머 지는 해
'산과 여행 > 전라 충청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이산(070412) (0) | 2007.06.04 |
---|---|
완도 상황봉 - 상록숲의 바다를 자맥질하다(070313) (0) | 2007.06.04 |
마이산(061224) (0) | 2007.06.04 |
강진 만덕산 - 나무의 시절을 추억하며(060326) (0) | 2007.06.04 |
주작산-저만치 먼 꽃빛(060408) (0) | 2007.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