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 석문 - 만덕산 - 백련사 - 다산 초당 - 주차장
만덕산 정상부
한 며칠 잘도 봄산을 놀았다. 하루 건너 또 하루, 동서남북을 오가며 봄빛과 바람 따라 먼길 산길을 숨가쁘게 흘러 다녔다. 강진 만덕산, 충주 제비봉, 거제 노자산... 전후하여 또 남녘 섬의 산, 산들...
‘길은 공간에 대한 경의’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이 환장할 봄날, 나는 길은 시간에 대한 몽상이라 부르고 싶다. 무시무종 다함없이 오가며 오늘 또다시 처음처럼 환하게 열려오는 저 풍경의 이름으로 가장 어울리는...
돌벽의 성문을 기어오른다. 바람찬 날씨에도 성급한 진달래는 한두 점 벌써 망울을 터뜨렸다. 강진 드나들 때마다 거침없이 난립한 회백 광물성 형세로 눈길을 사로잡던 석문은 오르며 돌아보니 더욱 강렬한 모습이다. 그 너머로 설악 용아나 속리를 닮은 덕룡, 주작의 칼칼한 암릉이 일렬 종대로 솟아오른다. 흐트러짐 없는 기세는 두륜산까지 이르러 아련히 달마를 감추며 땅끝까지 뻗치고 완도 상황봉을 슬쩍 비켜 놓는다. 남도란 이름의 푸근함에 감추어진 맹렬한 결기가 흐린 구름 아래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굽어보는 강진만 일대와 함께 만덕산의 가장 아름다운 조망이 눈앞에 있다. 한편 월출 월각 쪽은 좀 멀어 가늠만 될 뿐 암릉미가 아쉽고, 그 옆으로 늘어지는 별매 가학 흑석 줄기는 오르면서 보았던 빼어난 산세에 비해 너무 밋밋하여 실망스럽다. 오히려 강진만 너머 장흥 일대의 부드러운 산줄기들을 보는 맛이 더 낫다.
개인적인 짧은 생각에, 만덕산은 굳이 전능선을 종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석문의 강렬한 인상도 잠시, 불끈 치솟는 정상부의 박력을 제외하면 고도가 빈약하고 형세도 평범하여 산릉의 조망이 가져야 할 나름의 심미적 거리감이 부족하다. 동네 뒷산같다. 이 느낌은 바람재 부근에서야 깨지는데 바람재 옆 산소 자락에서 보는 만덕산 주봉은 매우 당당하고 힘차다. 그래서 굳이 종주하기보다 바람재에서 시작하여 (만덕을) 올려보고 (두륜 쪽을) 되돌아보고 (강진만 자락을) 둘러보며 정상 암릉을 어영부영 오르내리면서 남도 산행의 진미를 맛보고 백련사 동백숲길을 호젓하게 내려서는 게 나을 것 같다. 남는 시간은 초당과 백련사 자락을 게으르게 어슬렁거리며 만덕산의 풍성한 옛이름(다산)을 음미해도 될 일...
이십대 푸르던 시절의 그리움 묻힌 다산 기슭 백련사 동백숲을 다시 찾는다. 하늘을 덮는 고목의 동백들이 지어올린 캄캄한 숲 그늘을 지나 단정한 부도 하나 세워 놓으며 문득 환히 열리던 빛의 거처. 세상에 두 번 일어나는 일은 없으니 상록은 의연해도 그 날의 어둡던 숲도 넘치던 빛도 사라지고 없었다. 핏자국처럼 뚝뚝 떨어진 꽃송이들을 물끄러미 굽어보던 그의 몸짓만 간신히 기억에 남았다. 찰나의 시선이 스쳤다 해도 이제는 너무 먼 빛, 나를 다녀간 해마다의 봄 햇살에 어룽지며 몸 속 흐린 물결무늬로 맺혀갔을 따름이니, 계절이 흘러가는 땅 말없이 굵어가는 저 나무들이나 사람이나 세월 견디는 속모습은 한 뿌리로 닮았다 해도 좋겠다.
만경루에 올라 희고 미끈한 살로 눈부신 관능미를 자랑하는 백일홍을 굽어본다. 볼수록 아름다운 나무, 잎도 꽃도 아직 오지 않았다. 간지럼 먹이며 꽃의 기다림을 흔들어 볼까나...
내게도 나무의 시절이 있었을까? 바람이 지나가며 묻는 안부와 달빛이 굽어보는 염려에 조금씩 단단해지며 허공으로 번져드는 몸이 홀로 뿌듯했을 시절. 몸을 펴서 그늘을 만들고 그늘 속에 줄기를 놓고 뿌리를 묻는다. 그늘을 넓히면 자꾸 생각이 많아지지만 깊고 푸르던 열광의 시대, 어쩌면 넘치는 빛의 우듬지에 열중하느라 암 생각 없이 기쁘고 즐거웠을지도... 그러나 저 둔덕의 형형한 느티나무는 나이 들어가며 하늘 더듬기보다 가끔은 제 몸 묻을 아랫자리가 궁금하기도 한 모양이다. 중력을 수긍하며 아래쪽으로 몇 줄기 가지를 뻗어 둥글게 몸을 편다. 붉고 푸르게 움트는 가지들 사이를 누비 들며 내리는 봄빛. 비로소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로 황홀해진다.
예전의 운치를 좀 잃어버린 백련사와 초당 사이 오솔길을 걷는다. 생사의 벼랑 끝에 내몰린 조선 최고의 지성 다산은 울분의 유배객이었다. 신념과 세계관을 뛰어넘어 그와 우정을 나누었던 혜장과 초의 선사가 오고 갔던 길. 그들에게 길은 세계에 대한 깊고 깊은 묵상이었을 것이다. 풍경이 사람을 만든다 하였으니, 호로 삼은 다산(茶山) 곧 만덕산은 정약용 자신의 거울이 아니었을까. 꼿꼿하게 선 중심을 상록으로 넉넉하게 에워싸며 부드러운 육산의 풍모를 지닌 만덕산 자락. 그 자락을 서로 나누며 오가는 저 길과 길이 품었던 풍경이 지금 우리가 아는 그들을 있게 했으리라.
풍경이 사라지면 사람도 흩어진다. 초당 옆 천일각에 앉아 한가롭게 펼쳐진 구강포와 귤동 마을을 굽어본다. 지금은 깨끗이 정비된 간척지이지만 이십여 년 전 처음 초당에 들렀을 때 귤동 어귀는 소금기를 뽑는 중이었던지 너르게 펼쳐진 갈대밭이었다. 봄볕에 일렁이던 아득한 갈대밭의 기억... 어제와 오늘의 풍경이 흔들리고 겹쳐지며 또 하루가 저문다.
바위벽의 성문, 석문
덕룡, 주작, 두륜산까지 일렬로 선 산릉
구강포를 보며 산자락에 앉은 백련사와 초당
백련사 만경루에서
백련사 부도밭에서
윤종진 묘의 앙증맞은 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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