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 오소재 - 주작산 진달래 능선 - 주작산 - 수양리
또다시 강진 간다. 한해 거른 남도 봄빛에 필시 기갈든 게야...
보성 금강 휴게소에서 본 하늘은 황사 자욱하다. 오전까지라던 예보가 원망스럽다. 강진 들어서면 흰 뼈대 드러내며 시원하게 치솟는 모습 늘 좋았던 만덕산도 좀 답답하고 퍼져 보인다. 그러나 만발한 진달래는 가열한 빛더미같은 석문산을 거침없이 불사르고, 차창 너머 덕룡산 건너보는 마음은 울끈불끈 굽이치는 산줄기 따라 하염없이 설레어 온다.
덕룡산은 재작년에 다녀왔지만 주작은 처음이다. 그리 무성하지 않던 덕룡 진달래는 바위 사이사이 수줍은 듯 고고한 듯 조금은 감질나게 피어 있었다. 좋았던 산행 마치고 작천소령 내려서는데 주작 다녀온 분이 그 쪽이 더 낫더라며 감탄하던 기억 아직 생생하다.
산행 초입 오소재, 열한시가 넘었다. 짙은 황사에 콧구녕 싸아하니 벌써 갈증 나는데 오랜만에 만난 손사장님이 저 아래 약수맛 떠올리며 입맛 다시게 한다.
맨 꽁지로 산길에 든다. 초입부터 진달래 무성하다. 낮은 쪽이라 벌써 시들거나 꽃잎 내리는 가지들도 보인다. 산객은 우리 일행뿐이다. 그래도 첫 바위벽에서 줄 잡느라 잠시 정체다. 바위벽 넘어 돌아보니 지피듯 번지는 연분홍 꽃빛이 희끗하게 난립한 암릉빛과 절창으로 화답하며 어울린다. 한 두 컷 사진 담으며 느리게 걷는다. 큰 기복 없이 오르내리며 길 이어진다. 가다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지나 온 길 너머 뿌연 먼지에 싸여 산빛 지워진 두륜산 걸려 있다. 강한 인상 남기는 멋진 윤곽선이다. 산줄기는 강진만에서 곧장 솟아나는 듯 가파르게 쇠뇌재 치올라 위봉 투구봉을 위태하게 얹어 놓는다. 유유히 숨 고르며 부드럽게 하늘금 그으며 간다. 다시 차츰 가속하며 울퉁불퉁 두륜 가련 정상 주릉을 주물러 놓더니 넘치는 박진감으로 큰 호를 그리며 뚝 떨어졌다가 케이블카 매달린 고계봉을 솟아올린다. 먼 산으로 겹쳐지며 낮아지다가 너른 물길 하나 열어놓고 그 너머 사라진다.
발아래 길섶으로 별이랑 현호색 노랑제비 따위 귀여운 들꽃들이 꽤 눈에 띈다. ‘진달래만 꽃이니? 우리도 꽃이야’ 하는 표정이다. 진달래 꽃빛은 그다지 넓지 않은 폭의 연분홍이 거기서 거기지만 간혹 젖빛 섞인 꽃분홍을 닮으려는 것들도 있다.
주작산 정상까지 돌기로 했던 터라 조금 속력 내 본다. 비슷비슷 암릉도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이다. 조망 해치는 황사 탓인가, 혹 덕룡에 비해 암질과 결이 조금 못한 듯하고 배치나 분포도 산만하여 암릉미 떨어져 보이는 탓인가. 점차 심드렁해지기는 동행한 아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올 봄, 좋은 경치 넘 봐서 눈이 높아진 걸까...?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기실 눈이 높아진 게 아니라 무뎌진 것. 넉넉히 비워 풍경을 담아야 하는 몸과 마음 자리에 더 강한 자극을 찾는 욕심만 들어앉았다.
그러나 이름 헛되이 전하는 법 없으니, 더 강한 걸 원하는 몸의 중독을 간파했는지 412봉 부근쯤부터 한 봉우리 넘을 때마다 건너보고 돌아보는 꽃빛 산빛은 점입가경이다. 무질서하게 흐트러지는 듯하던 암릉도 제법 심지 돋우고 자락 가다듬으며 주작의 날갯짓에 걸맞은 형세를 부려 놓는다. 봉우리 간 기복도 더해져 밧줄 잡고 오르내리는 길이 조금 더 힘들어진다.
우회로 벗어나 아무도 오지 않는 바위 능선, 바람 없는 널찍한 벼랑 끝에 앉았다. 이 넘의 황사, 하늘에서 쏟아지는 중국산 흙먼지 사태. 숫제 빛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거기에 남도산 춘삼월 빛이 공모하여 경계 지워 버린 강진만이 안타깝다. 흐린 물빛 굽어보며 점심요기 한다. 손사장님과 우리는 브랜드만 다른 김밥이라 서로 권하기도 멋쩍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제법 소슬하던 바람이 이제 완연한 훈풍이다. 배부르니 그저 나른해져 몸 한없이 게을러진다. 지나온 벼랑 기슭 아찔하게 핀 진달래 건너본다. 옛 노래 한 가락 떠오른다.
자줏빛 바위 가에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바야흐로 바위까지 춘심 물들어 자줏빛! 삼국유사는 <헌화가>의 저 꽃이 철쭉이라 기록하지만 지금은 그 꽃 진달래로 읽고 싶어진다. 물에 사는 용이나 거북까지 넘보았다던 신라 최고의 미인 수로(水路)부인이 남편을 조르며 봄투정한다. 벼랑 끝에 핀 진달래 저 꽃가지를 가져다 달라고!
수로는 젊고 총명했다. 그러나 꽃시절을 넘어서야 꽃을 안다. 불같이 오는 사랑이 불가능한 시절이 되어서야 사랑에 대해 말하거나 쓸 수 있게 되듯이. 그녀에게 꽃은 그저 연분홍 춘심이었겠지만 그래서 꺽는 것에 더 기울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가파른 설레임에 가닿을 수 있는 깊이는 듬직한 남편이나 힘센 종복들이 아니라 암소 몰고 가던 노인의 손길이었던 것. 다만 마음이 아니라, 마음 너머 닿을 수 있는 먼 헤아림의 손길이었을 터. 벼랑에 핀 진달래 탐하며 나이조차 훌쩍 건너 뛰어 목숨 건 하나의 길로 엮이는 연분홍 꽃빛의 정갈한 에로티시즘.
바위 오르는 노인의 몸은 버리고 그가 가늠하는 절벽의 거리만 빌어 와서 소월이 노래한 ‘저만치 피어있는’ 진달래꽃에 이어본다. 문득 먼 저 꽃이, 손길 닿을 수 없는 저 꽃이 더없이 아름다워진다. 진달래는 멀리서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짐짓 우기고 싶어진다.
더 머물렀다간 잠들 것 같아 털고 일어선다. 제법 깊이 오르내리는 암봉 부지런히 넘는다. 돌아볼 적마다 주작은 진달래 꽃구름 속에 활짝 날개 펴고 일어선다. 오소재에서 오르는 봄 주작은 한낮 햇살에 돌아보는 맛이 더 곱고 좋은 산이다. 느리게 흘러내리는 비탈에 힘찬 날갯짓으로 흩뿌려 놓은 바위들. 봄빛 일렁이는 키 낮은 숲에 무리무리 점점으로 박힌 꽃물결 무늬들...
발아래 임도 건너 난농장이 보이고 곧 주작산 주봉 능선길과 수양리 갈림길이다. 주작산 허리 감돌아 가는 임도도 보인다. 다시 주작산 향해 오른다. 손사장님과 아내는 먼저 가고 혼자 길 벗어나 주작 암릉 끝자락쯤 될 작은 봉 무턱대고 벌벌 기어오른다. 지나온 암릉길과 그 아래 펼쳐지는 꽃밭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거대한 새의 날갯짓에 흩어지고 모이는 바위들. 날개를 위하여 꽃이 피는 건 아니다. 오후 햇살에 한결 밝고 고와진 빛으로 꽃들은 저만치서 피어 있다.
바윗길 끝나고 한적한 숲길을 걷는다. 얼마 전 노자산에서 본, 수많은 가지 불꽃처럼 흔들며 자라는 나무 무리 지난다. 곧 정상이다. 정상부와 직전 바위 조망이 훌륭하다. 돌아보는 남주작 북덕룡. 황사 탓에 윤곽뿐이지만 아름답다. 작천소령으로 하산 않고 두 산 줄기 이어지는 파노라마와 주작산 작명의 의문에 대한 답을 기대하고 예까지 온 보람이 있다. 주작 암릉을 타다보면 왜 저 멀리 보이는 밋밋한 산이 주봉일까 싶은 이유는 정상에 올라야 밝혀진다.
주작과 덕룡, 비슷하면서 다른 두 산의 형세를 멋대로 정리해 본다.
주작과 덕룡은 상상의 큰 새와 용이다. 여기서 보는 것도 그렇고 산을 걷는 맛도 마찬가지이지만, 큰 새 주작은 꽃구름 속에 놀거나 꽃무늬 날개 현란하게 펼치며 날아오르는 꼴이고 덕룡은 누른 황사 구름 속에 몸 뒤틀며 웅크렸다. 덕룡은 설악 공룡 연상시키며 정연한 골격의 암릉미가 제법 좋았던 반면, 주작은 푸드덕거리는 새처럼 산만해도 꽃무늬 공작 날개 화려함이 일품이었다.
그러나 덕룡산 역시 주작의 한쪽 날개로 보고 싶다. 추측이지만, 덕룡 주작릉 전체를 주작산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덕룡산이란 이름 생긴 게 아닐까 싶다. 그래야만 주릉을 벗어나 강한 편심을 띠는 주작산 정상과 능선 중심부의 작천소령도 이름 걸맞는다. 작천소령 한자는 모르겠으나 ‘주작의 하늘 둥지’가 아닐까 싶다. 지금 서 있는 주작산 정상이 새의 부드러운 몸통이라면 저 둥지 아래 수양리 굽어보며 거대한 세 개 알같은 암봉이 있다.
여하튼 객관적으로 보아 봄에는 주작이 낫겠고 하늘 맑은 가을에는 덕룡이 낫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봄 덕룡 진달래의 고고한 기품을 높이 살 취향도 있겠으니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정상 조망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강진만이다. 주작 암릉에서도 강진만 보였으나 여기서의 조망은 가히 빼어나다. 푸른 기슭과 해안선 그리고 서해 닮은 물빛이 아마 가장 아름답게 보일 거리와 고도인 것 같다. 눈빛 흐리고 코까지 매운 황사가 애석할 뿐...
정상에서 수양리로 내린다. 임도 따라 팔각정 반대쪽으로 조금 가니 수양농원 1km 이정 보인다. 수로부인 탐냈을 법한, 미끈하니 우뚝한 두 암봉 바위틈에 매달린 진달래 부시게 쳐다보며 호젓한 숲길 간다. 이끼 낀 바위 아래 흐르는 물 보이지는 않고 소리만 들린다. 머잖아 물줄기가 드러난다. 맑은 물에 세수하며 발 담그니 뼈 시리도록 차다. 돌아오는 알탕의 계절 기다리는 즐거움 나누며 하루 산행 마무리한다.
정상에서 보는 주작릉(위)과 덕룡릉(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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