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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경상권

응봉산 용소골(060826)

by 숲길로 2007. 6. 4.
 

덕구 온천 호텔 마당 한 구석에서 간단히 몸을 풀고 온정골 드는 다리를 건너간다. 세찬 물소리와 함께 누런 빛깔의 급류가 보인다. 완만한 계곡길을 따라 오른다.

온정골에는 세계 각국의 유명 다리를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해설판 기웃대며 건너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 아래 누천만년 깎이고 패여 물빛보다 희게 빛나는 화강암반 사이로 내리꽂히듯 요동치며 가는 물을 굽어본다. 가지친 계곡 한둘은 실폭포까지 내걸고 눈길을 사로잡는다. 많은 비온 후가 아니면 보기 힘든 풍경이다. 길 좌우로도 줄줄 물이 흐른다. 여름 계곡 진미를 만끽하면서 용소골을 떠올린다. 일순 뭔가가 뒷골을 툭 치고 간다. 어둔 울림을 한 겹 감추고 있는 듯한 저 물빛, 물소리...!  


연기 같은 게 멀리 보이나 싶더니 원탕이다. 42도의 온천수가 허연 김을 내뿜고 있다. 멋진 계곡 경관을 꽤나 해치며 내내 길을 따르던 온천수 파이프라인도 끝나는 지점이다. 더운 물에 손 한번 대 보고 지나친다. 계곡을 건너간다.

산행 시작 1시간여, 계곡이 끝나고 능선을 향해 치오른다. 정상까지 2km 2시간 표지가 있다. 꽤 가파르겠구만... 젖는 숨 고르며 억지로 밀어 올린다. 능선에 서니 옛재능선 날망이 보인다. 흐린 날씨라 별다른 조망은 없다. 맑은 날이면 동해가 보일 텐데... 다만 천미터 전후 고도로 시원스레 내달리는 검푸른 산줄기들과 기품있게 쭉쭉 빵빵 울창한 적송 숲을 돌아보는 맛은 좋다. 솔내음 맡으며 걷는 숲길... 곧 오른쪽으로 정상이 보인다. 옛재능선과 암벽이 건너보이는 벼랑 위에서 잠시 쉬고 둥근 정상을 향한다. 빤히 보이더니만 은근히 멀다. 


드디어 응봉산 정상. 예전에는 밤에 올랐기 때문에 오늘 조망을 기대했는데 실망이다. 역시 먼 조망은 없고 가까운 능선과 봉우리들만 눈에 든다. 나쁘진 않다. 고도가 있어 나름 장쾌한 맛이지만 시야 범위 내 안면 있는 산은 거의 없다. 저 뾰족하니 유난히 띄는 봉우리가 벼락바위봉일까...?

응봉산 정상은 너무 비좁다. 엄청 크고 터무니없이 자리를 차지하며 울타리까지 쳐 놓은 정상석 때문이다. 누구 발상인지 원... 정상에 서는 즐거움과 정상의 아름다움을 돋구는 정상석이 있는 반면 이처럼 밉쌀스럽고 괴물같은 정상석도 있다.


물이 불어나 있을 용소골에서 안전산행을 염려하여 뿔뿔이 계곡으로 진입하지 말고 함께 식사를 하자는 산악회측 주문이다. 오늘은 당근 그래얍지요. 평소 호젓 산행한답시고 잘도 내빼던 터라 꼭 날 두고 하는 얘기같다. 울창한 참나무 숲길을 조금 가다가 소광리향 능선 갈림길 펑퍼짐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한다.

어느 덧 한 시. 갈 길이 멀다. 총총 일어선다. 흐리던 하늘이 차츰 개여 숲 사이로 듬성한 햇살을 던지고 정상 너머부터는 바람도 서늘해졌다. 산행하기 가장 좋은 날씨다. 곧 능선이 끝나고 가파르게 내려선다. 계곡의 풍부한 수량을 입증하듯 폭포 소리가 멀리서도 요란하게 들려온다. 저 소리를 즐거워해야 할까 말까... 그러나 어느새 축축이 젖은 몸 용소골 흐벅진 물길에 담글 생각을 하니 벌써 온몸이 근질거려 온다.


우리를 기다리는 용소골은 험준한 협곡성 절경을 자랑한다. 최고의 계곡 산행지로 손꼽히지만 협곡 특유의 조건상 수없이 물길을 가로질러야 하고 탈출로도 마땅찮아 비가 오면 악몽의 현장이 될 수 있다.

6년 전 이맘때(통상 용소골 산행은 장마철 이후가 제철인 듯) 무박2일로 다녀온 용소골 산행은 더 좋을 수 없는 멋진 계곡 트레킹이었다. 한두 군데쯤 물이 허리까지 차던 기억이 있을 뿐 물살이 셌던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당일 날씨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기상청 홈피를 들락거렸는데 정작 전날의 강수량까지 확인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알았다 한들 안 갔을까마는...


용소골 지류인 작은 당귀골에 내려서자 엄청난 물이 쏟아지는 폭포가 반긴다. 이왕 버릴 몸... 냉큼 뛰어든다. 시원하게 젖은 몸으로 편하게 간다. 곧 용소골 본류와 만난다. 이제부터 어지러울 만큼 좌우로 물을 건너며 협곡 트레킹을 시작한다. 산길 잇기 위해 물을 건너는 건지 물로 들기 위해 잠시 산길을 찾아드는 건지... 대부분 사람들이 신발을 신은 채 뛰어든다. 끝내 신발을 벗고 물 건너는 분도 있다. 갈 길이 멀고 수도 없이 물을 건너야 한다며 주위에서 권유하지만 막무가내다. 일행과 맥주 내기를 한다. 저 분, 끝까지 저러고 갈까...? 나는 끝까지 가는 쪽에 걸었다. 신발을 벗어든 표정에서 대단한 결의가 엿보인다. 결과는....? 글쎄, 뒤처지는 바람에 확인하지 못했으나 못내 궁금하다. 


풍경은 낡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용소골은 역시 대단하다. 상당한 수량에 물살까지 제법인 계곡을 수없이 건너야 하는 힘든 길이지만 설악 어느 골에도 뒤지지 않을 위태롭고 장엄한 협곡미는 단연 최고다. 어제 내린 비로 협곡 좌우에도 골골마다 서로 다른 자태의 수많은 폭포가 걸려 있다. 삼킬듯 말듯 흐느적대며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실폭이 있는가 하면 당찬 물줄기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다혈질도 있다. 마른 날에는 못 보던 풍경이다.

트레킹의 첫 절정은 큰터골 전 거대한 암벽의 U자 협곡 일대다. 용소골 안내 사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곳이다. 물이 남자 허리를 넘어 로프를 치고 서로 도와가며 건너간다. 숨 돌리며 웅장한 협곡을 되돌아본다. 예전에는 현란한 설악 계곡보다 단조롭고 빈약해 보였는데 풍부한 수량 탓일까, 지금은 달리 보인다. 흰 물보라 일으키며 거침없는 내닫는 물길을 감싸안고 하늘 향해 두툼하고 육중한 선을 그어 올리는 모습은 박진감 넘친다. 장쾌하면서도 묵직하다. 그날 보았던, 하오 햇살 떨어져 조각조각 빛나던 바윗길의 나른함 따위는 없었다. 협곡 암벽에 움푹 패인 구멍도 더 위협적이다. 캄캄하게 텅 빈 시선이 느껴진다.

하늘에 흰 구름이 걸린다. 비 걱정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느리게 흘러가는 풍광은 점입가경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계곡, 함께 흐르는 물 스스로 길이 되어주어야 함에도 자꾸만 길을 끊고 막는다. 많거나 빠른 물에선 도무지 정겨움을 느끼기 힘들다. 흐름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볼 수도 없다. 차츰 물살 피해 물길 벗어나 산길로 에두르고 싶어진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그리 만만하다면 어디 용소골인가... 마음을 추스르며 경치에 몰두해 보지만 물에 비치는 협곡의 드높은 암봉들이 서서히 거칠어져 간다. 하늘은 밝은데 산빛은 웬지 어둡고 무거워 보인다.

보고 듣고 몸으로 부대끼며 가는 물, 차츰 젖은 바위 딛기가 싫어지면서 물이 버겁고 지겨워진다. 몸에서 곧장 오는 느낌은 주관적이고 감성적이다. 어떻게 바뀌며 어떤 모습을 취할지 알 수가 없다.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도 없다. 대체 이 느낌의 끝은 어디일까? 알듯 말듯 막연한 그 무엇... 첨에는 첨벙첨벙 건너는 게 재미있다던 아내도 차츰 풀이 죽는 듯하다.

그래서 용소골은 다른 뜻으로 또 한 번 최고였다. 일행 모두는 아니겠지만,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에게 그 곳은 아름다움과는 완전히 다른 낯선 얼굴로 육박해왔고 마침내 두려움의 표정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풀려난 공간이었다.

어서 2용소가 나타났으면 싶을 즈음이었을까? 믿을 수 없는 사고 현장이 환영같은 풍경으로 떠오르던 때는...


119 기다리며 환자를 둘러싼 몇 명만 남은 모습을 보고 하산하는 걸음이 무겁다. 모든 이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다. 한없는 무력감과 심란함... 대체 이 막막한 선택밖에 불가능한 걸까...

얼마를 가니 큰터골 갈림 표지가 보인다. 아뿔싸! 이제야 여기라니... 착각에 기댄 낙관이 저 상황을 돕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생각조차 하기 싫은 상상들이 마구 밀려들며 심란해진다.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눈에 드는 자연 사물과 몸을 가로막는 물길은 빨리 벗어나야할 상황일 뿐이다. 문득 하늘이 어둡다. 자연사물에서 풍기는 저 무심의 적대, 살의마저 느껴지는... 땀 흘리며 맨 처음 뛰어들었던 그 물은 대체 어디로 가 버렸을까...?

아름답고 즐겁기까지 하던 사물의 모습이 그토록 섬득하고 공포스러운 것이 되어가는 모습이라니...!


2용소를 지난다. 예전에 외줄 하나 달랑 매달려 있던 곳에 굵은 동아줄이 길고 든든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물보라 휘날리는 폭포의 수량은 사람을 질리게 한다. 세상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 사납게 소용돌이치는 검푸른 심연, 용소의 물빛. 천천히 지나가며 바라보면서 등골까지 섬뜩해지는 맛이 용소골 산행의 진수지만 오늘은 도저히 즐길 수가 없다. 짓눌리는 느낌만 더해질 뿐이다.

2용소 조금 지나서였던가. 무전 교신으로 환자 일행이 필사적으로 하산 중이라는 소식이 들어온다. 그래, 바로 그거야! 마음 한 구석 짓누르던 납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요강소, 1용소 지나 잠시 쉰다.

(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