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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경상권

상주 성주봉 - 압축의 미학, 작은 것이 아름답다(060824)

by 숲길로 2007. 6. 4.

코스 : 휴양림 - 기념비 - 암벽 - 성주봉 - 765봉 - 755봉(남산 갈림) - 725봉 - 5코스 - 휴양림 

 

 

누군가 말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상주 성주봉은 작고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다. 600m대 고도를 오르내리는 참나무 소나무 숲길을 걸으며 사이사이 어우러진 바위에 올라 먼 곳을 본다. 그 곳의 조망은 일대의 명산 어디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성주봉만이 가진 작은 산의 즐거움이라 할 만하다. 발아래 굽어보면 곳곳에 앙증맞게 피어난 난쟁이바위솔의 하얀 꽃무리가 곱다. 푸른 바위에 내린 작고 흰 구름덩이 같은 것들...

어제쯤 비가 내렸던 걸까, 발바닥에 닿는 산길은 내내 꼽꼽하고 쾌적하다. 대기는 조금 습하고 고요했지만 힘들게 오른 동릉에서 잠깐 만난 바람은 가을맛이 묻어나고 하산길 막바지 코로 드는 공기는 물씬 솔향이 젖어있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슬렁거리듯 ㄷ자 능선을 빙 돌아 제자리로 온다. 성주봉이 있는 동릉(동/서릉은 남산 갈림길을 기준으로 편의상 붙인 이름)보다 고도가 약간 낮은 서릉이 더 즐거운 길이다. 아기자기한 솔숲길과 너럭바위를 번갈아 걷는 맛이 좋고 툭툭 트이는 서북쪽 그림같은 조망도 한결 낫게 든다.


안타깝게 하늘이 좀 흐리다. 텅빈 안팎을 뒤집으며 헛되이 스스로를 부풀리는 흰구름 아래 성주봉은 낮고 작게 압축했던 저만의 알찬 세계를 펼쳐놓는다. 그 덩치 어디에 그런 깊고 장한 조망을 굽이굽이 품을 수 있었던지 의아할 뿐이다. 성주봉은 빼어난 조망산이다. 작고 낮지만 울림이 좋은 산이다.

먼 산 흐린 지평, 불과 600여m 고도에서 보는 수묵빛 선들의 향연은, 호령하듯 굽어보며 낮은 줄기들의 고도를 뺏는 높은 산들의 조망과는 사뭇 다른 즐거움이고 아름다움이다. 눈앞에는 수많은 능선으로 이어지며 치솟고 가라앉는 봉과 봉들이 스스로 분열하며 증식 중이다. 모든 산들이 제 높이를 지닌 채 비켜서고 밀어주며 겹겹으로 다가오고 사라진다. 역동적인 실루엣의 아름다움은 지리산 못지않다. 칠봉산 너머 이름 모를 산줄기들과 청계, 도장, 속리... 청화에서 시루봉 거쳐 연엽 능선... 그 뒤로 흐린 하늘금 긋는 조항, 둔덕과 아슬한 대야, 안개인지 구름인지 아련한 구왕, 희양까지...

그 이름들 하나하나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자태와 까실한 개성이 묻어온다. 땅줄기의 울림, 산의 목소리가 있다면 바로 저것이 아닐까. 몸이 짓는 굴곡, 아니 몸 전체를 통해 울려오는 검푸른 침묵의 메아리. 겹겹의 산들이 밀어내는 지평을 바라보며 귀 기울이노라면 세계는 얼마나 아득하고 깊어지는지...

등 너머 바람으로 드는 풍경. 은척 벌판은 윤기 나던 푸르름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차츰 누른빛을 가둔다. 늦여름의 바람이 불러오는 하늘빛이다.


날씨가 좀 더 맑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지만 이 기억 흐려질 즈음 하늘 시려지는 계절을 골라 꼭 다시 찾고 싶은 산...

집으로 오는 길에 지도를 꺼내 본다. 지도는 땅에 대한, 장소에 대한 기억이다. 지도에 내 기억을 기입한다. 이제 지도는 땅과 나를 함께 기억할 것이다. 차창 너머 어두워지는 지평, 어쩌면 저것들은 그 자체로 지도다. 지도와 산의 통일을 꿈꾼다. 이미 지도인 그 산 너머에서 또 다른 내일의 산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