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 사촌리 -첨봉 - 매봉 - 설흘산 - 가천리
설흘산(왼쪽이 정상인 봉수대, 오른쪽은 육조바위 능선) - 봄 사진
며칠 전까지만도 참 맑았던 십일월, 내내 짙푸르던 남해의 섬들...
그 빛 기대하며 밀린 숙제하듯 설흘산을 올랐습니다. 하늘은 높았지만 초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씨 탓인지, 이름만큼 아름답던 앵강만 물빛도 그 너머 남해 금산도 흐렸습니다.
시야 가득 출렁여 오는 십일월 남해의 푸르름이 아니어도 산은 산이란 고집이었을까? 흐린 시야에 갇혀 오히려 더 막막 안으로 쓸어내리며 치솟던 바위벽. 그래서 첨봉 못미처서부터 매봉까지 이르는 칼날 절벽은 한결 높고 위태로워 보였고, 까마득한 발아래 굽어보며 우회로 비켜두고 바위로만 더듬어 가는 맛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나른한 햇살 아래서 요기하며 희게 반짝이는 앵강만 물빛을 굽어봅니다. 만 가운데 흐리게 섬 하나가 떠 있습니다.
모든 섬과 반도는 제각각 세상의 끝입니다. 안개가 묻어버린 수평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저 섬, 노도는 원래 생김을 따라 삿갓섬이라 불리다가 임란 때 이 섬에서 노를 많이 만든 후로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1985년까지 등잔을 켰을 만큼 오지 중의 오지였다는군요. 남해섬 자체가 조선시대까지 악명 높은 유배지 중 하나였지만, 노도는 불교적 환타지 소설의 고전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이 유배 와서 뼈를 묻은 섬이기도 합니다. 생애의 절벽이었을 그의 바다도 늘 오늘처럼 저토록 답답했을까... 여간해서 가파른 속내를 비치지 않던 당시의 선비들처럼 서포도 자신의 고적한 풍경을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아득한 섬들은 구름이 내려앉은 바다 건너에 있고
방장 봉래봉은 가까이 있도다
육친인 형제 숙질과는 떨어져 홀로 외롭게 살건만
남들은 나를 신선으로 알겠구나
척박했던 역사로만 묵묵 담아온 그런 저런 사실이 무책임한 산객의 감회에도 조금은 안쓰럽게 스미는 걸까, 뱉지도 삼키지도 못할 어떤 웅얼거림이나 말을 한 입 가득 머금은 듯, 뿌연 이내에 잠겨 묵묵히 설흘산을 올려다보는 노도의 모습이 왠지 적막하게 느껴집니다.
터질 듯한 봄빛이 멀리서 보고만 있어도 한없이 따뜻해지던 다랭이 마을 가천리.
주차장이 생기고 마을길이 포장되고 신축 양옥들도 늘면서 깨끗이 정비되어 가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반가운 편의지만, 설흘산을 알기 전 남해 상춘을 즐기던 그 시절의 그림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한 터라 급속도로 사라지는 옛 모습이 어쩔 수 없이 아쉬웠습니다. 경제의 실(實)을 얻으며 넉넉하게 비어있던 풍경의 허(虛)를 함께 잃어간다는 나그네의 다소 무책임한 상실감.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암수바위 미륵조차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라면, 저 흐린 바다가 감추고 싶었던 건 지금 이 순간조차 가차 없이 진행하는 상실의 풍경,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산 오르기 전 차창으로 보았던 모습, 비탈밭에서 쟁기질하는 누렁소와 바로 그 옆의 날아갈 듯 새하얗고 우람한 펜션의 대비. 그 황당 혹은 당혹이 이 시대 우리의 욕망 혹은 마음의 풍경이 아닐까...
나른히 취한 머릿속을 맴돌던 부질없는 상념을 깨고 나니 어느 새 대구의 불빛입니다.
진달래 시절의 설흘산릉
가천리에서 - 유명한 암수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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