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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경상권

남해 망운산(060502)

by 숲길로 2007. 6. 4.

 코스 : 화방사 - 망운산 - 관대봉 - 체육공원 - 남해여중

 

 

 

잔설 밟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절은 어느 새 오월 하고도 이틀...

버스에서 졸며 들은 뉴스의 기상 캐스터는 들뜬 목소리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서울 하늘을 조잘댔지만 바다 찾아가는 길은 내내 흐리고 바람 불었습니다. 진교 I/C 지나서부터 드물지 않게 자운영 밭이랑 유채밭이 펼쳐집니다. 그 자체로 빛인 유채의 화사함은 남해섬 인근의 낯설지 않은 봄 풍경이지만 경상도 쪽 자운영은 비교적 근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름바라기 망운산 가는 길에 만나는 구름의 보랏빛 꽃그림자... 그럴듯한 수순이고 어울리는 구색입니다.


초파일 앞두고 알록달록 연등 내건 화방사를 곁눈질하며 곧장 산길 듭니다. 남해읍 뒷산,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려 깊은 맛이 없고 쉼 없이 꾸준한 경사가 은근히 힘들지만 숲 그늘진 흙길은 적당히 눅눅하여 발에 닿는 감촉은 더 없이 좋습니다.

남녘의 봄은 깊었습니다. 그윽한 숲길에서는 자주 둘러보고 돌아보게 됩니다. 지나온 모든 것은 뒷모습입니다. 마음 향하는 쪽을 따라 풍경은 달리 열리기에 지금 돌아보지 않는다면 영영 저 숲의 뒷모습은 보지 못할 것입니다. 잘 생긴 남국 수종들이 이제는 신록이라 불러도 좋을 만치 한 빛으로 울창해져 갑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가 버린 사월의 유록빛이 그리워집니다. 젖내 풍기며 내밀던 새순의 뾰족 입들은 홀연 사라지고 코 밑자리 거뭇하고 가슴 도도록하게 남자 여자 티를 내는 사춘기 아이를 조금은 낯설게 바라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오월 지나 저 숲은 여름 내내 깊고 어두워져 가겠지요. 지금은 어두워지기 위해 더욱 환해지는 푸른빛입니다. 더 아름다워질 시절만을 앞에 둔 듯 확신 다져가는 빛깔로 말없이 깔깔대는 푸른 그들입니다.


망운암 가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서 샘물 한 잔 마시고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큰바람 가득합니다. 흐린 하늘 아래 여수만 건너 여천공단이 보입니다. 진달래꽃 져 내리고 잎 돋아날 영취산은 어디쯤인가... 먼빛으로나마 가늠해 봅니다.

정상 향하는 주능선길 좌우는 온통 철쭉밭입니다. 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드물게 핀 것도 보이지만 대부분이 그러합니다. 도시의 도로변 영산홍들은 활짝 핀 꽃보다 오종종하게 앙다문 망울들이 더 곱고 야무져 보이지만, 일교차 심하고 변덕스럽던 사월 끝자락이 모질게 멍들여 놓은 망운산 꽃망울들은 얼었다 녹은 양 시들하고 검붉어 자못 애처롭습니다. 들은 애기지만 비슬산 참꽃도 올해는 많이 힘들어 한다지요.

잎보다 꽃이 먼저 오는 진달래와 달리 생김은 비슷해도 철쭉은 잎과 함께 꽃을 피우는 무던함입니다. 통상 남녘 철쭉은 흰빛이 강한 연달래가 아니라 영산홍의 신경질이나 격렬함을 기웃거리는 붉은 빛입니다. 진달래처럼 한 몸조차 서로 만나지 못하는 애틋한 상사(相思)의 꽃무리를 두고 어떤 이는 제 몸의 인연조차 칼같이 끊는 단호함을 보기도 하지만, 잎이 올 자리를 환하게 마련하는 꽃의 앞선 길이 진달래의 것이라면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서로를 받쳐주며 봄 산빛의 깊이를 더하는 건 철쭉의 몫이라 해도 되겠지요.

평소 저리 붉은 남녘 철쭉보다 소백의 그것처럼 좀 여유롭게 듬성하고 연한 빛의 철쭉이 좋았지만 오늘만큼은 망운의 피지 못한 철쭉을 좋아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마음 보았으면 그만이지 얼굴 맞대고 말 나누어야만 만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바람 찬 정상에 섰습니다. 발아래 망운사 굽어보며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연을 생각합니다. 산 오르내리는 이의 인연이라면 길의 인연이요 시절의 인연일 것입니다. 그리움 또한 나름의 만남 방식일 터인데, 채 피지 못한 저 꽃들과 나의 인연 한 자락쯤 슬그머니 망운에 묻어두고 간다면 길과 시절이 흐르고 흘러 또 다른 인연으로 언제 어느 때 다시 망운에 들어 낯빛 달라진 그들을 만날지 모를 일입니다...

7-8부 능선쯤 단정하게 남향한 망운암은 볼수록 절집 앉음새가 절묘하여 변산 월명암을 떠올리게 합니다. 비록 절보다 더 높은 산정에 서 있지만 잠시 다녀가는 곳과 오래 머무는 곳의 조망 기준은 서로 달라야 하니, 너무 높지도 답답하지도 않을 절마당의 조망이 궁금해집니다.


754봉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사이 차츰 구름 벗겨지고 바람이 잦아듭니다.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흰 구름 드높습니다. 오전과는 완연히 다른 날씨입니다. 사방 둘러보니 과연 거리낌 없이 맑고 드높은 자리, 비로소 망운(望雲)을 알듯 말듯 합니다. 햇살 아래 풀려난 산자락의 봄빛도 은은하게 단풍든 듯 흰 빛깔 박사 비단을 쳐 놓은 듯 일렁여 옵니다. 강진만 너머로 창선도와 죽방렴이 보기 좋던 지족해협이 어렴풋하고, 남쪽 한려바다로 고요히 잦아드는 산줄기 끝에는 뭍을 돌아보며 점점 사라지는 섬들이 편안하고 아름답습니다.

발아래 물 찬 제비처럼 미끈하고 날렵하게 가라앉았다 치솟는 관대봉 줄기 위로 가야할 길이 뚜렷이 보입니다. 그 줄기가 잦아져 흩어지는 끝에는 남해읍 큰마을이 흰 빛으로 오밀조밀합니다. 산빛은 나날이 바뀌어도 누천만년 그대로 이어가지만 저 근대의 빛, 요즘의 사람살이 빛깔은 산빛과 조화를 거부하고 더욱 이질적으로 되어갑니다. 그 빛의 끝이 어딘지 두렵고도 궁금합니다.

산정에 서면 먼 산 이름 찾는 유치한 분별심의 병증이 또 도집니다. 마을 오른쪽 뒤로 뾰족한 호구산과 송등산 줄기가 검푸르게 시원합니다. 오른쪽 너머 흐리지만 특이한 형세로 눈길을 끄는 산줄기는 설흘산인가 싶고, 왼쪽 멀리 끝자락이 가려 무뎌 보이는 산릉은 금산이겠지요. 설흘과 금산 사이, 오후 물빛 고울 앵강만은 보이지 않으니 호구 송등산 오를 그 날을 기다려 봅니다.


양지녘 풀밭에 옹기종기 앉아 요기하고 나니 그만 나른해집니다. 일어서기 싫어져 지나는 바람에 비스듬히 몸 누이고 오월의 푸른 하늘 구름을 봅니다. 기상변화가 어쩌니 해도 아직은 어김없이 오고가는 계절, 눈물겹도록 좋은 시절입니다.


관대봉 가는 길은 참 즐겁고 편합니다. 햇살 담뿍 받으며 총총 피어나는 철쭉꽃빛을 어루만지고 연둣빛 입술 내밀며 조잘대는 싸리나무 새순에 귀 기울이며 느리게 느리게 흘러갑니다. 바위 하나 나타나면 에두르거나 기어오르거나... 망설일 여유도 넉넉한 산길입니다.

관대봉 너럭바위 정상의 조망이 훌륭합니다. 그 옛날 봉화를 올리던 시절, 전초 망대로 손색없을 자리입니다. 짐작이지만 오죽하면 관대봉(觀臺峰)일까요. 돌아보는 망운암은 여전히 보기 좋습니다. 울긋불긋 내걸린 연등조차 볼썽사납지 않고 봄산빛과 잘 어울립니다.


이후의 내림길은 큰 경사 없이 길게 이어집니다. 산책로로 그만인 동네 뒷산길이며 체육공원길입니다. 삼나무 울창한 삼림욕장을 만납니다. 청량한 숲내음 마시며 누울 의자에 거꾸로 누워 하늘을 봅니다. 우듬지 맞댄 키 큰 상록 사이로 하늘이 빼꼼합니다. 그마저 부셔 눈을 감습니다.

흐린 하늘 아래 찬바람 맞으며 서있던 철쭉 망울들이 떠오릅니다. 꽃을 상처로 읽던 이의 심중을 알듯 말듯 합니다. 그러나 바람 또한 형체를 갖지 못하고 다른 몸을 불러 스스로를 드러내야 하는 안타까움이니 누가 누굴 탓하겠습니까. 풍경은 제 상처를 스스로 어루만집니다.

그들이 내게로 오는 방식을 풍경이라 한다면 길 위의 모든 것을 일러 풍경이라 해야겠지요. 풍경과 다툴 수는 없는 법이니, 오늘도 내일도 그저 풍경 속으로 떠날 뿐입니다. 허공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아가미를 바람 쪽으로 열고 돋아나는 지느러미 흔들며 말입니다...

 

 정상부

 

 

 호구 송등산 능선(멀리 가운데)과 설흘산(오른쪽)

 

 관대봉 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