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다대초등교-가라산-뫼바위-마늘바위-노자산-자연휴양림(약 4시간30분)
노자산(위)과 가라산(아래)
‘노자산은 거제에서 가장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봄 여름에는 야생화 군락지로, 가을에는 단풍이 절경을 이룬다... 거제의 대표적인 아열대 식물과 자작나무, 박달나무, 동백나무등 600여 종의 식물이 자생하는 숲은 마치 남국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울창하다...’
과연 그랬다. 노자산은 남국이었다. 새 잎 부르는 푸른 꿈의 아우성으로 가득한 남쪽나라 식물원이었다. 그런가 하면 천상의 꽃밭이었다. 한려의 푸른 바다에 둥실 떠 있는 거제의 마루능선 누비는 꽃밭을 거닐며 불쑥 솟는 바위에 올라 해풍에 머리 담그고 수평에 눈 씻는 일품 산행이었다.
통영까지 이어진 고속도로 덕에 많이 가까워진 거제도. 차창 너머 노자산을 기웃거리며 고개 하나 넘으니 미끈하게 빠진 해안선이 눈에 든다. 몽돌밭이 유명한 학동리다. 멀리 구조라와 외도가 보인다. 오래 전 친구랑 계룡산행을 끝내고 이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며 올려다보았던 노자산 줄기의 위용은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학동 해안으로 이어지는 너른 비탈에는 바닷바람과 햇살로 닦은 심록빛 윤기 잘잘 흐르는 동백군락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산행 들머리는 평범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붉고 탱탱한 몽우리를 종종 매단 벚나무나 한두 가지 만발한 진달래는 며칠 사이 부쩍 높아진 눈에 차지 못한다. 조망 없는 오름길도 꽤나 팍팍하게 이어진다. 해수면에서 육백 가까운 고도를 곧장 치오르기도 만만치 않거니와, 그늘 성긴 봄 산길 나른한 몸 부려가는 일이란 신록 무성한 유월 숲길보다 늘 더 힘들었던 기억이다. 혹시 저구리 쪽에서 올랐다면 가라산 정상에서 뻗어 내린 바위능선으로 붙어 바다를 조망하며 덜 지겹게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갈피 없는 생각도 흘리며 잠시 쉬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여기가 대체 어디인가. 연보라빛으로 환한 발아래 세상...! 새침하게 빼물고 고개 돌린 현호색이 군락으로 지천이다. 아니 벌써? 지루함이 확 가시며 기운이 솟는다. 이후로 줄곧 좌우를 낮게 살피며 간다. 무지한 탓에 수많은 그 꽃들의 이름을 섬길 능력은 없다. 또 어쩌면 천방지축 자유의 영역에 노는 들꽃 산꽃들에게 이름 따위란 짐승한테 옷 입히듯 애당초 부질없는 짓인지 모른다. 노란꽃 하얀꽃 분홍꽃 보라꽃 둥근꽃 별꽃... 꽃인지 잎인지 모를 꽃 등등... 형형색색 크고 작은 산꽃들이 봄바람에 살랑인다. 오가는 눈짓 손짓에 헤실대며 무시로 걸음을 붙든다. 아마 봄은 가까스로 존재하는 저 무리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불러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들을 만나려면 나는 더욱 걸음 늦추고 몸을 낮추어야 하리라.
가장 놀라운 건 얼레지다. 조숙이 지나쳐 까져 보이는 애들마냥 발랑 뒤집어진 분홍빛(연보라?) 꽃자루를 한껏 숙이고 요염 극치의 자태로 유혹한다. 앞서가던 일행은 거의 포복 자세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러고 보니 오늘 SLR카메라를 든 분들이 몇 보인다. 노자산이 야생화 밭이란 걸 알고 오신 걸까? 견문 얇은 터이나 얼레지가 특별히 귀한 꽃은 아니지만 아주 흔한 꽃도 아니다. 가끔 만나는 맛에 나 역시 편치 않은 품새로 사진을 찍었는데 웬걸, 엉거주춤 공들인 자세가 억울할 만큼 갈수록 지천으로 피어난다. 하산 지점인 휴양림 일대는 발걸음에 채일 정도다.
진행로에서 벗어나 잠시 다녀와야 하는 가라산 정상은 숲에 가려 썩 시원한 조망이 아니다. 혹시나 싶어 저구리 방향으로 조금 가보지만 마찬가지다. 망산과 그 너머 매물도 쪽은 오늘 코스 중 여기서 가장 가깝게 보이는데... 아쉬운 대로 삼면 푸른 바다와 가야 할 노자산 쪽을 둘러보고 총총 내려선다.
가파르지 않고 부드러운 능선길. 형형색색의 봄 산꽃은 무리무리 곱고 며칠이면 터질 듯한 진달래 망울도 낯가림 벗고 곳곳에서 벙긋댄다. 내륙에서 못 보던 남쪽 나라 나무들은 가지 끝을 붉게 물들이며 울창하다. 낯선 식생으로 가득한 노자(老子)의 숲은 신비롭다. 여태 잘 몰랐던 봄산의 색다른 아름다움이다. 이 산에서 가장 당당하게 이국미를 뽐내는 것은 비슷한 듯 조금씩 서로 다른 연회색 줄기의 낙엽성 관목들이다. 이름 모를 그 나무들은 평생을 흔들리며 살아온 듯 수많은 가지를 우줄우줄 뒤틀며 바람도 없는 허공을 기이하고 아름다운 불꽃 형상으로 빚어 놓는다. 흔들리며 오르는 자태만은 괘릉이나 헌강왕릉 부근의 경주 소나무를 닮았다.
뜬금없는 생각이 든다. 노자라는 고유명을 넘어 산에 드는 모든 이의 바램으로 깃드는 불로장생의 꿈은 북국인의 눈을 현혹하던 남국의 풍광에 그 비밀이 있지 않을까...? 불멸의 비결은 일상성과 익숙함의 권태를 깨고 나서는 것, 즉 세계의 영원한 낯설음에 머무르는 바로 그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봄날의 남국 능선을 걷는 일은 쉬 시간을 잃고 낯선 곳을 헤매게 한다. 신비의 팔색조가 산다는 저 기슭 동백숲을 다시금 굽어본다...
첫 바위봉 너머부터 노자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뛰어난 조망 코스다. 우회로 비켜두고 바위봉이란 봉은 죄다 오르내린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뫼바위, 댕근바위, 마늘바위, 벼늘바위... 생김 따라가는 뜻 모를 이름들을 잘도 같다 붙여 놓았지만 그닥 궁금치도 않으니...
그보다야 이 나라에서 가장 복잡한 해안선을 자랑하는 섬답게 오밀조밀 매끈한 만들과, 멀리 하늘빛 닮아 흐린 수평까지 가없이 펼쳐지는 수많은 섬들과, 남해 바다 고운 물빛을 불러줄 하나하나의 바위자리 이름들이 낫지 않을까 싶다. 봄날의 흐린 남해 물빛은 가을과 또 다른 맛이다. 며칠 전 제비봉에서 본 충주호 물빛도 그랬다. 가슴까지 서늘한 쪽빛이 아니라 봄 산빛을 담근 듯 흐리고 나른한 연둣빛이었다. 사철 다른 물빛과 산빛, 나날이 새롭게 돌아오는 세계. 모든 산행은 저마다 고유하다. 어느 산을 가보고 말고가 아니라 하나하나 매번 다른 산행들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면 둥글게 솟는 가라산, 해안선 기슭 동백숲에 이르기까지 상록은 거의 없이 불그스레 봄빛으로 물들며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너른 자락이 더없이 곱다. 머지않아 붉은 색이 엷어지며 젖빛과 연두의 스펙트럼으로 마구 풀려나 허공을 휘저을 저 산빛. 제 풀에 겨워 똑딱이 카메라로 담아 보지만 늘 그랬듯 냉정한 기계는 몸과 마음의 눈을 가차 없이 배반할 것이다.
마늘봉 꼭지 바람을 피해 학동 해안 굽어보며 점심을 먹는다. 나른한 눈으로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정상으로 향한다. 산정에 서니 그간 정상부에 가려 좀 답답하던 북쪽 조망이 시원하다. 정면으로는 억새 비탈을 허옇게 드러낸 계룡산 줄기가 선자산을 건너 발 아래로 육박하고 거제만 너머 암릉미가 솔찮다는 산방산이 더 가깝게 보인다.
주릉 따라가는 혜양사 방향을 굽어보며 아쉬운 입맛 한 번 다시고 휴양림 쪽으로 내려선다. 생각보다 가파르지 않고 느긋하게 걷기 좋은 길이다. 고도 낮추자 만발하는 진달래 무리들이 내내 눈길을 뺏고 발길을 잡는다. 성대한 꽃들의 환송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진종일 꽃구경이 즐겁던 아내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며 싱글벙글이다.
휴양림에 도착해 땀 씻고 둘러본다. 아주 노자산 진면목의 끝을 보자는 건가, 주위가 온통 얼레지 밭이다. 이 미친 것들, 누가 얼레지를 바람꽃이라 했던가. 남국의 봄바람에 참을 수 없이 활짝 열린 저것들... 나이 드는 몸에 덩달아 싱숭생숭 드는 바람, 이 봄 다 갈 때까지 잘 날이 없으려니 얼마나 더 먼 산을 헤매고 다녀야 할까나...
현호색
해금강쪽
분홍 노루귀
얼레지
노랑제비
학동리
다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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