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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경상권

꿈꾸는 늪 - 겨울 우포에서 놀다

by 숲길로 2007. 6. 4.
 

 

또다시 우포에서 놀았다. 무시간의 늪에 빠져 잃어버린 천년 곱하기 천년의 빛나는 시간들과 어울렸다. 겨울치고 몹시 따뜻한 날씨였다. 흐르기 싫은 물은 범람을 일삼으며 에둘러 에둘러 가며 오후 햇살과 희롱하고 캄캄한 버드나무들은 멈춘 듯 고요한 물길에 산발 얼굴 비추며 깔깔댄다. 다시 되돌아오기 위해 누렇고 잿빛으로 시든 천방지축 수생식물의 줄기들, 곳곳에 진을 친 큰기러기떼와 큰고니(백조) 무리들... 간혹 황새인지 두루미인지 긴 목, 긴 다리로 고고하게 서 있는 놈도 있다.

‘국내 최대의 원시 자연늪’이란 공식 칭호를 가진 우포는 토평천이 범람하며 흐르는 곳이다. 천천히 오래오래 머무는 강이다.

물과 뭍의 늪은 또한 시간과 공간의 늪이다. 모든 것을 되돌려 다시 시작케 하는 그 곳에는 우리 안의 가장 오래된 것을 건드리며 울려주는 무엇이 있다. 선사적 무의식에 닿으며 그토록 많은 삶의 아우성으로 들끓어 오르는... 내 안의 오랜 짐승도 시절 잊고 나와 저 날짐승과 풀숲, 물과 나무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린다. 아마 나는 느리고 느리게 되돌아감을 말해야 하리라.


쪽지벌과 우포 사이 인적 없는 갈대밭을 한 바퀴 돌아 목포 둑에 올라 우포를 굽어본다. 겨울늪은 한결 적막하지만 물에 비치는 햇살은 따사롭기 그지없다. 끝없이 꽥꽥대는 무수한 날짐승들의 울음소리... 날 것 그대로인 생명의 화음이라 불러도 좋을 것들.

사계절의 밤과 새벽, 비오고 흐리고 눈 내리는 우포를 보고 싶다. 언제던가, 세상이 온통 범람의 소문으로 흉흉하게 일렁이던 어느 여름, 대대 제방으로 올라 우포를 보았다. 뻘뻘 땀 쏟으며 바라본 늪은 푸르게 넘쳐나고 있었다. 그 광활한 범람의 풍경은 우리 모두의 몸 속 깊이 각인된 최초의 범람에 대한 기억과 공포를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늪은 깊이에 대한 긍정이자 부정이다. 거기엔 인류의 기억을 훨씬 뛰어넘는 아득한 시간의 침전이 있기에 그 원시성은 무한한 긍정의 깊이다. 그러나 쉽사리 바닥을 드러내는 시각적, 물리적 깊이는 그 긍정을 자꾸 발목 잡는다. 우포는 오히려 범람하는 깊이다. 수시로 경계를 밀어내고 무너뜨리며 안팎을 하나로 열어버리는 물과 뭍의 어울림이 거기에 있다. 우포에서 물과 뭍은 글자만큼이나 닮아있어 서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늪은 물과 뭍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계 이전의 원초의 장소와 시간이 된다. 최초의 생명은 아마도 물과 뭍,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피어나던 늪의 꿈으로부터 왔을 것이다. 우포를 보며 잃어버린 그 꿈을 떠올린다. 늪의 꿈인 우리가 다시 늪을 꿈꾼다. 


목포 북쪽 한 무리의 큰고니가 보인다. 백조라는 우아한 별명도 아랑곳없이 꽁지를 하늘로 치켜든 채 대가리 처박고 먹이 찾기에 바쁘다. 목포 감돌아 왕버들 군락지도 지나 소목 둑길을 오른다. 소목 풍경은 우포의 가장 절경이라 해도 좋으리라. 오후 햇살 쏟아지는 늪을 망연히 바라본다.

늪은 뭇 짐승을 거두어 키운다. 그 중에서도 저 비상할 줄 아는 것들. 겨울 우포늪에선 진정 날개를 부러워한다. 우주 한 모서리를 가득 채우며, 우-우 한꺼번에 날갯짓하며 날아오를 수 있는 짐승들이 겨울을 나는 곳. 때로 내 안의 짐승이 사나워져 걷잡을 수 없을 때 우포로 간다. 늪에서 모든 짐승들은 유순해진다. 성질 메마른 자식이 스스로를 감당치 못하고 날뛰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미의 눈길로 늪은 우리 시선을 받아 되돌려 준다.

우린 그저 좀 더 높이 올라 굽어본다. 해 떨어지면 한꺼번에 날아오를 저 짐승들과 제 몸 한 더미만으로도 한 계절 한 숲이 되는 무성한 풀덤불들. 저녁 잔광 속 날아오르는 기러기떼의 흐린 그림자 또한 그 덤불숲 위로 빽빽할 것이니, 몸과 빛과 그림자가 함께 살며 함께 비춘다. 눈 더 낮추면 키 작은 풀잎들의 곱디고운 단풍은 더불어 환호하는 말없는 아우성일 터... 늪은 겨울에 더욱 생명의 과잉으로 화창하고 찬란하다.


천천히 둑길을 내려 늪 가장자리 토평천을 따라 푹신푹신하게 메마른 풀밭길을 걷는다. 길은 소목에서 사지포까지 뻗어 있다. 여름이면 이 길은 없을 것이다. 토평천 물빛은 흐려도 너무 고요하여 버드나무 실가지 하나조차 깨끗이 비쳐낸다. 그 고요 위로 오후 햇살이 눈부시다. 저녁 무렵의 서해 바다가 떠오른다.

오후의 우포, 흐린 물의 나라에서 한없이 따뜻한 빛이 태어난다. 늪으로 드는 겨울 물은 어둡지만 더욱 환해져 늪을 빠져나간다. 수천수만 년의 기억 너머까지 번지며 물은 한가롭고 심오해진다. 선사적 방식으로 심오해진다. 깊이 없어도 심연이 된다. 우포를 다녀오면 한동안 추억 속 고향처럼 묵묵해진다.


늪을 벗어나 길은 낮은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다. 발아래 멀리 내버들 숲이 펼쳐진다.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정면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강렬하여 흑백 화면이다.

늪은 숲이다. 기러기 일제히 날아올라 하늘 또한 새떼의 숲이듯, 물의 숲이며 물이 살게 하는 수많은 것들의 숲이다. 모든 숲이 그렇듯 우포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인다. 흐르는 것은 토평천의 느려터진 물길만이 아니다. 오히려 늪 자체가 하나의 유구한 흐름으로 살아 움직인다. 역사가 빠져드는 곳,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명의 힘으로 사계(四季)를 밀고 가는 곳. 오래된 미래이며 현재진행의 태고(太古). 그러나 우포는 침묵이다. 들썩이는 생명의 아우성을 감싸는 침묵이다. 귀 기울이는 침묵이며 물빛 부신 눈으로 드는 침묵이다.

숲은 겨울 한가운데서도 다가올 봄의 신성한 예감으로 가득차 있다. 오후의 역광 아래 캄캄하지만 보리싹 파릇한 겨울, 지금 바로 저기 환하게 피어나고 싶을 봄... 누군가 그 숲을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올리브 숲을 떠오르게 한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숲에선 나무가 가장 나무답게 자랄 때 드러나는 어떤 영감이 느껴진다. 몸 가진 것들의 오갈 데 없는 회한들 모두 거두어 바람 속에 묻어도 여전히 빽빽할 저 가지 많은 늪의 나무들. 여태도 숲이고 오래토록 숲일 나무들...


동쪽으로 재작년인가 범람 후 다시 쌓은 대대 제방이 보인다. 저기를 돌아 세진으로 나간다면 이 광활한 늪을 한 바퀴 도는 셈이지만 아직 풀 한 포기 없이 살벌하도록 생경한 그 길을 걷고 싶진 않다. 갔던 길을 되짚어 소목으로 돌아온다. 해가 많이 길어졌다. 서해 낙조보다 더 아름답던 소목 낙조를 기다리기엔 남은 시간이 벅차다. 다른 날을 기약하며 돌아선다.

오래 전 그날 보았던 우포의 해는 산 너머로도 지지만 늪 속으로도 진다. 흥건한 금빛 핏물로 번지며 하염없이 범람한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 또한 그러할까. 내일 아침 해는 눈발 희끗한 화왕산을 슬몃 비켜 떠오르겠지만 우포 또한 더 찬란한 해를 떠올릴 것이다. 제 속에 해와 달을 품어 뜨고 지게 하는 늪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고 또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