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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전라 충청권

영동 백화산 - 파도 타고 넘는 머나먼 하늘길(060304)

by 숲길로 2007. 6. 4.
 

코스 : 보현사-보문사터-금돌성-포성봉-안부-755봉-주행봉-855봉-솔티-용암리(후미기준 8시간)

 

 

 


영동 백화산(맥) 긴 줄기에 자리한 포성봉과 주행봉. 경부고속도를 지나며 워낙 특이한 형세로 눈길을 사로잡는 능선이라 이름을 알기 오래 전부터 늘 한번쯤 걷고 싶었던 곳이다.

 

산행 들머리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지체하며 둘러본다. 석천(石川) 벼랑에 운치 있게 걸린 정자와 그 아래 고풍스런 한옥이 보인다. 조선초 명신 황희가 풍류하셨다는 백옥정과 옥동서원. 한없이 여유로웠을 청백리의 말년을 기웃거리고도 싶지만 오늘은 아니니, 다만 옛사람들의 상춘을 그려본다.

술 한 동이 나귀에 싣고 꽃 피는 남도를 향해 느리게 느리게 가며 풍문에 실려 오는 나무의 살과 꽃 내음을 맡는다. 겨울을 문상(問喪)하며 봄을 문향(聞香)한다.

정자를 지난 물길은 너른 벌판을 펼치고 제법 맑은 하늘 아래로 뿌연 봄빛이 흐리다. 내려선 구름 같은 저 문을 열수 있다면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 물과 바람과 빛과 세상이 한데 어우러진 느린 소멸의 풍경, 진멸의 경(經)... 그러나 계절의 윤회는 불망(不忘)에 대한 응답이다. 잊혀진 것들은 어김없이 되돌아온다. 뒤돌아봄 없이 총총 산길 드는 선남선녀들. 그들의 등 뒤로 불망의 햇살이 쏟아진다. 그렇게 또 봄은 온다.


얼고 녹기를 되풀이하는 이른 봄 산길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얇게 덮였다. 잔설 아래 설핏설핏 드러나는 얼음. 겨울은 강렬한 흑백의 길이었으므로 오히려 채색의 환(幻)이었다. 지금은 봄을 부르며 대비 낮춘 흑백. 산의 정적은 여태도 날카로우나 한두 점 새 울음소리를 풀어놓는다. 계절의 경계가 이미 풀렸으니, 봄~봄을 조잘대며 가는 물소리 들으며 하나 둘 산손들은 솔솔 개울을 건너 능선 향해 오른다.

산 중턱에 자리한 널찍한 보문사터. 아마 개간 중인가, 사철 잡초 우거진 여느 폐사지와 달리 짙은 황톳빛 흙의 욕망이 민망토록 싱그럽다. 산중 모습으로는 이채롭다. 땀 닦고 숨 돌리며 돌아보는 산록은 바야흐로 혼돈의 시절이요 땅이다. 시야 가득 채우는 활엽숲의 훤한 비탈은 눈빛 겨울이 장한데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산줄기 가장자리는 쏟아지는 봄빛에 포슬하게 피어나 붉게 물든다. 봄으로 오는 나무의 성긴 그늘이 진작 하늘로 열렸으니 여리고 붉은 싹에 깊어지는 육화(肉化)의 공간, 꽃이 올 자리는 이미 환한 심연이다. 꽃 지나간 자리 또한 그러할 터이니 생애의 몇 봄이 나를 지나갔던가...


포성봉 주릉에서 가지친 줄기에 자리한 이름도 멋진 금돌산성. 새로 복원한 것이지만 거창하지도 초라하지도 않고 적당히 소박하여 마음에 든다. 신라 백제 각축의 내력은 곁눈질로 스쳐 흘리고 성벽에 기대어 북녘을 본다. 햇살은 강한데 하늘은 흐리다. 조망이 아쉽지만 상상만의 마루금들은 더없이 현란하다. 조금 찬 듯한 바람을 느끼며 멀리 우뚝한 포성봉으로 눈길을 던진다.

길지 않는 성벽을 따라가며 나무들에 가린 남쪽 조망이 아쉬워질 즈음 멋진 전망대가 나타난다. 갈 방향을 보니 군데군데 바위벽이 툭툭 불거져 있다. 이제부터는 줄곧 조망산행이겠다. 놀망놀망, 가다가 쉬고 가다가 놀고 카메라도 한 번 들어보고... 세상은 아득한데 산은 높고 바람은 향기로우니 참으로 좋은 시절이구나... 이런 날 이런 산길은 도무지 진도가 안 나지만 좋은 산에서 오래 머물고 싶음은 숱한 산꾼들 불치의 병임은 익히 보아온 터다(그러나 이 병이 주행봉 너머부터 조금 흔들리기도 했음을 고백해야 할 듯).


곧 포성봉 너머로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주행봉이 머리를 내미는가 싶더니 오른쪽 비탈면으로 기이하고도 육감적인 산자락이 펼쳐진다. 다가올 그림이 자못 기대된다.

그럭저럭 포성봉 정상. 석천 건너 만경 헌수봉 줄기가 멋지게 걸린다. 두 봉우리를 잇는 원호의 미끈한 역동감이 일품인데 만경봉의 날카로움이 보는 맛을 한층 살린다. 길지 않는 저 능선을 걸으며 백화산과 황악산을 좌우로 바라보는 눈맛을 상상한다. 먼 산줄기들은 희뿌연 봄 하늘이 다 묻어버렸다. 그러나 단언컨대, 포성봉은 청명한 가을날에는 일급 조망 산행지로 손색없겠다. 동행한 오사장이 미리 본 자료들을 기억하며 이런저런 설명을 곁들인다.

시야만 좋다면 남으로 덕유에서 민주지 능선을 거쳐 황악, 금오 등과 가야 수도 능선까지 조망될 터이고 북으로는 칼날 속리를 비롯한 큰 줄기와 부근의 뭇 능선들. 또 동과 서로는 갑장, 계룡, 서대 등까지 어림할 수 있겠다. 아쉬운 마음에 희끗한 그림자로만 떠오르는 산줄기들을 더듬는다.

하지만 잘 빚어진 음률이 그러하듯 자잘하고 들쑥날쑥한 소묘선들을 흐린 베일에 묻고 저마다의 고저장단과 농담의 음영으로만 흐르는 원근 실루엣의 신비스런 울림이 더 즐거울 때도 많았다. 산으로 오는 풍경은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자주 넉넉하고 아름다웠다.

제법 가파르게 내리며 안부를 지나 주행봉 능선을 치오른다. 전위봉인 755봉을 오르며 돌아본다. 돌아볼 때마다 포성봉은 성큼 높아진다. 단순하고 힘찬 기세가 인상적이다.

755봉에서 주행 능선 바라보며 점심 요기를 한다. 송대장과 들꽃님 부부에게 술을 거푸 몇 잔 얻어 마셨더니 봄소풍 나온 오후처럼 나른하다. 걸음 떼기 싫어 오래토록 뭉기적 뭉기적...


주행봉 주릉은 상당 부분이 칼날 암릉이다. 네발로 더듬어 가며 좌우 굽어보는 맛이 대단하다. 산악회에 인용된 소개글이 빼어나게 생생하여 좀 길지만 다시 옮겨본다.

 

‘백화산 북서사면은, 만약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느낌이 기이하다. 거듭 비질을 하여 쓸어 붙여 올린 듯, 혹은 수많은 골을 가진 기와지붕을 연상시키는 산릉들이 가파른 경사로 긴긴 산비탈을 이루었다. 450m나 되는 표고차를 내리닫던 그 수십 가닥의 지능선들은 산록에 이르러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수평으로 흐르다가 갑자기 굳어버린 촛농과 흡사한 형상으로 뭉툭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백화산 남서릉 줄기를 이룬 이 산릉의 주봉 이름은 주행봉인데, 경부고속도로 쪽이든 그 반대편 어디서든 그렇게 상상하고 보면 영락없이 수십 개 돛을 한껏 부풀리고 달려가는 배의 형상으로 떠오른다...

이 산의 동사면은 서사면과 모양이 전혀 다르지만, 범상치 않은 산세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근육질 맹수의 힘찬 등줄기를 연상시키는 굵직한 산릉들이 다양한 굴곡을 보이며 겹겹으로 늘어섰고, 그 사이로 석천 물줄기가 저기 강원도 동강처럼 구절양장을 이루며 흘러 절경을 이루었다. 명산에 명찰이 없을 수 없으니, 백화산 동사면을 산태극 수태극으로 굽돌아 흐른 석천가에는 이미 신라 때 창건된 고찰 반야사가 자리하고 있는 누구나가 한번쯤 가보고 싶은 산이다.’


이름 그대로 배(舟)가 달리는(行) 형세를 한 산이다. 그 배는 어떤 배인가...

발아래는 차안과 피안의 경계인 듯 굽이 흐르는 푸른 물빛 석천이 보이고 기슭에 반야사가 있다. 그림 한 폭이 떠오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 용이 호위하여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배다. 모든 절집 법당은 자체로 반야용선이다. 법당의 용두 조각이나 배 그림은 흔히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 산 전체를 법당으로 삼아 용선을 띄워 올리는 꿈은 어떤 장엄한 상상이며 간절한 기원인가?

거친 산릉을 가며 대양(大洋)의 이미지에 빠져든다. 위태롭게 쏟아지는 오른쪽 비탈 까마득히 아래 꿈틀거리는 저 산자락들은 용선이 일으키는 파도가 된다. 봄의 느린 밀물과 겨울의 썰물이 철썩이는 격랑 헤치고 가는 하늘길. 바위와 나무와 사람이 한 하늘로 어울리는 공간. 길은 염(念)으로 열린다. 반야용선은 바람이 아닌 상상과 기원의 힘으로 가는 배다. 부푼 삼각돛에 올라 앉아 푸른 숲의 파도와 거품 일으키며 부서지는 흰 물결 잔설의 환한 그늘을 굽어본다.

모든 산은 저마다의 고유한 공간이 있다. 산과 하늘의 경계를 우리가 흘러갈 때 세상은 또 다른 공간으로 육화한다. 내 몸이 바뀌고 산의 몸이 바뀐다. 무한 공간의 주름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던 부분들이 서로 만나고 닿으면 전율이 흐르고 맥박이 뛰는 살(肉)로 온다. 공감의 울림으로 함께 출렁인다.


이윽고 주행봉 정상. 봉분 주저앉은 난데없는 무덤 하나 있다. 극락행 일등석 티켓을 아주 전매하셨구만... 정상은 더 바랄 나위 없는 전망대다. 포성봉보다 낮아도 전후 능선의 가파른 맛을 더하여 날씨만 좋다면 장탄식 삼키며 눈을 가늘게 떠야 하리라. 앞길에는 오르내려야 할 암봉이 수도 없이 도열해 있고, 눈빛 성성한 비탈 거느린 굵직한 산줄기들이 시원스런 왼쪽 아래 구비 흐르는 석천 봄 물빛이 곱다. 저 기슭 반야사로 떨어지기로 한 애초의 계획이 사정상 주행봉 능선 종주로 바뀌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내심 반가웠다. 사방 둘러보며 담배 한 대 피워 문다.


지나온 길도 내내 우리뿐이었지만 855봉 삼거리부터는 인적이 뚜렷한 길조차 아니다. 선두 가신 분들은 꽤 고생하겠다. 낙엽은 수북하고 걸핏하면 바윗뎅이가 가로막고, 가도 가도 봉우리는 끝없이 솟아난다. 멀어서 더욱 하늘길. 그래도 좌우 조망과 더듬는 손맛은 그만이다. 돌아보는 암릉미도 제법 장하고, 기우는 햇살에 은빛 역광으로 빛나며 굽이 흐르는 금강 지류도 새로이 눈에 든다. 게다가 이처럼 조용한 바위 능선길은 일부러 찾아다녀도 쉽지 않을 터.

허나 봄 오는 길목에 무슨 간절함으로 우리는 이 험한 바위와 길 없는 길을 헤치며 격랑을 흐르고 있는지... 피안 가는 용선이 아니라 고생길 티켓을 끊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날 선 줄기를 타고 끝없이 오르내리며 굽어보는 저 아래 세상, 반야사와 석천 물빛이 오히려 피안이 아닌가...

마지막 봉우리에서 한숨 돌린다. 이제 내려서는 길이다. 지도상으로 그다지 가파르지 않을 듯한데 눈으로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은근히 무릎이 걱정이다. 그러나 솔티 내림길은 뜻밖에도 산행 마무리로 최고라 할 완만하고 호젓한 숲길. 쿠션까지 더하여 일급 산책로다. 하늘을 험하게 달려오던 뱃길은 활강하듯 잦아 내려 거대한 선사적 무덤을 닮은 봉우리를 반쯤 선회하여 연착륙이다. 용선의 입항답게 거의 우아할 지경이다. 마을 이름도 과연, 용선을 호위하는 용암리다.


맥주 한 캔에 나른해진다. 겨울밤 귀 밝아지듯 봄날 오후에는 어떤 감각이 한층 나를 깨우며 열리는가? 멀리 흐르는 강, 아지랑이 흐려지듯 부풀어 오르고 더듬어 가는 길은 느려진다. 더디 흐르는 봄 강물, 기슭이 붉다. 산빛 우련 그늘지면 물빛 덩달아 붉다. 맑은 봄은 참으로 더디게, 그러나 어느 새 곁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