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산들 - 세상 끝에서 되돌아오는 상상력의 힘
별매산
전남 강진에 이르는 먼 길, 아침잠 많은 몸이 내리 졸다가 눈 뜨니 낯익은 지명이다. 강진군 성전면. 이십여년 전부터 답사랍시고 남도 지역을 드나들며 종종 지나치던 곳이다.
늘 맘에 있었으면서도 너무 멀어 엄두를 내지 못했던 남도의 산들. 저 지난 주에 올랐던 덕룡 주작 능선은 강렬한 인상과 함께 한동안 잊고 있었던 해묵은 숙제를 떠올리게 했다. 막연히 답을 기대하며 오늘 다시 가파르게 솟는 별매 가학 흑석산을 오른다.
차 내리기 무섭게 다들 산으로 육박한다. 엉거주춤 눈 비비며 꽁지로 붙었다. 눈앞에 잘 생긴 바위 한더미, 저게 별매산인가. 별매, 별뫼... 혀에서 구르는 발음만으로도 서늘하고 푸른빛이 느껴지는 고운 이름이다. 별이 내려 박힌 산이란 뜻인가, 반 너머 묻히고 치켜든 별의 한 꼭지를 숨가쁘게 더듬어 오른다. 봄날치고 드물게 시야가 좋은 날씨, 넉넉하기로 유명한 강진의 햇살을 달게 받으며 바위 능선을 오르내린다.
곧 별매산 정상이다. 북으로는 잡힐 듯 가깝게 월출의 기암능선이 떠오르고 멀리 남으로는 두륜산까지. 옆으로 길게 뻗는 톱날들은 덕룡 주작의 날카로운 암릉이겠다. 먼 빛의 속리나 설악 용아 같기도 하다.
별매산에서 건너 보이는 월출산 못미친 곳, 별매보다 더 별을 닮은 뫼가 솟아 있다. 별과 달. 어쨌거나 저 월출은 ‘월나’라고 부르던, 달을 낳는 산이기에 달 뜨는 옆자리 뭇 별이야 어색할 리 없다. 별매산을 지나와 별매를 돌아보고 또 다른 별매에 눈길을 뺏기며, 각박한 이성에는 벅찬 옛 사람들의 크고 둥글고 환한 상상력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더듬어 본다. 하늘의 뭇 것들로 노니는 땅. 무리무리 오르내리고 별과 달이 흩어지고 모이는 땅.
별매는 별이 떨어져 된 산이 아니라, 월출산이 미끈한 바위들 사이로 달을 품어 올리듯, 밤마다 별로 뜨는 산이다. 흑진주봉이라 불렀다는 동남릉의 저 꼭지도, 월출산 아래 두 꼭지로 솟아난 봉우리들도 모두 밤을 기다리고 있는 별뫼들이 아닌가. 밤이면 밤마다 이 땅의 총총한 바위봉들, 월출산 에워싸며 무진무진 별로 떠올라, 승천하다 만 이무기 꼬랑지 같은 영암호 긴 줄기를 온통 은빛으로 비추고 있을까. 다시 태어나는 곳, 산들이 별로 뜨고 달로 솟는 이 땅이라면, 침몰하는 뭍의 파편 같은 숱한 섬을 돌아 흐르는 저 뻘밭의 바다는 모든 것들 되돌려 세우는 깊은 침묵이자 어둠의 모태이리라.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중국 서역 가는 길목 어딘가에 있다는 별이 잠드는 바다, 성숙해(星宿海). 드넓게 펼쳐진 초원에 수많은 작은 물구덩이들이 별빛에 반짝이는 곳. 별 하나가 잠겨 바다 하나가 되고, 별과 바다가 함께 잠드는 곳. 성숙해에 잠드는 것은 별과 바다만이 아니라 그 곁에 누운 꿈들도 함께이듯이, 월출과 별매와 함께 빛나는 것도 우리 꿈이 아닌가. 꿈꾸는 상상력이 가 닿는 그만큼 온전하고 크게, 모름지기 사물의 이름이 이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삶의 아름다움이 사물의 그것과 둘이 아니고, 아름다움의 핵심은 앎이 아니라 상상력이기에.
가학산과 흑석산
별매산 정상 너머 가학산 이르는 산길은 큰 기복없이 부드럽고 그늘도 넉넉하다. 굽어보는 저 탐미의 눈부신 비탈, 해마다 되풀이하는 사월의 탄식은 올해도 비켜가지 못한다. 연한 젖빛의 푸르름이 도무지 얼마나 드넓은 스펙트럼으로 펼쳐질 수 있단 말인가. 계곡 가득 번지며 울려퍼지는 봄빛의 메아리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색채 관념과 언사의 유한함을 비웃으며 세월을 한숨짓게 한다.
흐드러지게 만발하여 지천인 흰 꽃나무가 물푸레임을 알려주던 분의 농담 한 마디. 흰 꽃은 왜 흰 꽃이냐고, 붉던 꽃도 늙으면 흰꽃이냐고. 한 시절 절정의 빛에서 세월을 읽는 조금은 쓸쓸한, 그러나 봄빛 묻은 어조는 전혀 그렇지 않던 얘기를 등 뒤로 들으며, 꽃그늘 흔들리는 산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고 또 걷는다.
가학산이 빤히 보이는 능선 삼거리. 열두시 좀 넘은 시간인데 출출하다. 널찍한 바위에 앉아 빵 몇 조각으로 점심을 때운다. 부실해 보이는 양식이 안쓰러웠던지 어떤 분이 밥을 권하시지만 산중의 귀한 음식이 도리어 황송하다. 빈약한 입맛을 넉넉한 눈맛으로 대신할 요량으로, 가파르게 솟는 가학산과 동서로 뻗어가는 흑석산 줄기를 따라 쓸어내리듯 넓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계곡을 굽어본다. 현란하긴 해도 어째 처연함 감출 수 없는 가을산과 달리, 봄산은 꽃과 잎들이 앞다투어 피워내는 비릿한 욕망의 향기로 충만하다. 하늘로 깊이깊이 빠져버린 희고 노랗고 붉은 꽃들, 말마따나 식물의 몸에서 가장 동물적인 부분이 꽃이기에, 바람과 함께 늘 새롭게 되풀이하는 이 계절의 향연이 매혹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오후 햇살에 오롯이 드러나는 가학산 오르는 능선길을 바라보며 길도 나도 함께 나른해진다. 바쁠 것 없는 걸음에 비해 정오 지나면 서둘러 내려서는 해가 못내 아쉽다. 자꾸 비스듬해져가는 오후 햇살이 오래 오래 머물기를 바랄 따름이다.
가학산은 제법 가파르게 치오른다. 아무렴, 우아하게 치켜든 학의 머리가 아니더냐. 그 고고함에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 수월할 리 만무다. 식후에 굳은 몸이 다시 풀린다. 가학산 정상에서 오른쪽 계곡을 굽어보는 맛이 일품이다. 단풍을 보는 듯, 희고 붉은 빛깔이 제멋만으로도 겨운 초록들을 누빈다. 이러니 산길 가는 이의 엉덩이가 자꾸 무거워지지 않을 도리가 있나.
가래재 철쭉은 간혹 벙그는 송이도 보이지만 대부분 망울만 맺혀 있다. 담 주말이면 절정일란가. 비슷한 키로 무리지어 길을 열고 막는 것들, 이 산에는 산죽이 참 많기도 하다. 봉우리 이어지는 능선 곳곳에 지천인데 더러는 키를 넘는다. 강한 햇살이 거슬리면 가끔은 어둡게 어둡게 드는 그 길이 싫지 않다. 그래서 오후의 걸음은 더욱 느리고, 다시 돌아보게 하고...
가학산에서
돌아보는 가학산
흑석 동남릉
흑석 능선 오르는 길에 돌아보는 가학봉, 좌우 흰 바위 능선으로 날개 펼쳐든 날렵하고 당찬 앉음새가 멋지다. 채 덜 핀 철쭉 무리 헤치고 흑석산을 오른다. 흑석산의 동남릉은 멀리서 보아도 뻗는 품이 심상찮더니만, 흑석산 주릉에 올라서니 칼날같은 날카로움이 아연 숨을 멈추게 한다. 과연 홀로 빛나는 별의 한 꼭지!
다시 길을 가는데 이건 또 웬 황당이냐? 흑석산 정상 조금 못 미처 원숭이 한 놈이 저만치서 빤히 쳐다본다. 남은 양갱 하나 나무에 걸쳐두고 온다. 탈출한 놈일거라든가, 이 지역에 자생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얘기하며, 우리말이 서투른 걸 보니 물 건너 온 놈이 분명할 거라는 확신까지... 원숭이 자신조차 모를 주장들이 난무하는 유쾌한 산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뻘로 아득한, 저 바다 같지 않는 바다를 건너보며 능선 걷기란 깊고 검푸른 동해를 보는 것과 달리, 뜨뜻하게 치밀어 오르는 무엇을 느끼는 맛이 있다. 얼마전 덕룡산을 오르며 되살아난 그것은 오래전에 느꼈던 당혹감의 부활이었다. 나주에서 영암, 풀티재(지금은 터널이지만)를 넘어 성전을 거쳐 강진이나 해남을 돌아 땅끝마을까지 가노라면, 난데없이 가파르게 치솟는 바위산들이, 전반적으로 낮고 차분한 풍광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자칫 안일해지려는 시선을 문득문득 후려친다.
높아질수록 투명해지는 발아래 세상의 모습들. 첩첩 산은 먼 풍경으로 밀려나 두륜산조차 희뿌연 이내로 아득한데, 눈 돌리면 마을과 마을, 논과 밭들... 산이 깊지 않으므로 날카롭고 험해도 느낌이 자못 다르다. 심산 유곡, 은일의 관념 산수로 접어드는 풍광이 아니라, 쉼 없이 경계 무너뜨리고 곧장 푸른 밭과 들, 마을길로 내려서는 산줄기요 바람이다. 남도의 산들은 현실의 산수를 벗어나지 못한다. 저 곧고 힘차게 달리며 솟는 줄기들, 현실의 각박함으로 가파르게 뛰어들어 곧장 역사의 한 자락을 들치고 일구어 낼 기세다.
이 땅이 큰 흔적으로 남긴 남도적 인물의 두 전형, 다산 정약용과 고산 윤선도를 생각한다. 유배의 몸이 된 다산, 만덕산 자락 귤동 초당에 앉아 사월이 다 가도록 푸르름 돌아오지 않는 강진만 갈대밭을 그도 보았을까? 모든 돌아봄에는 들끓는 회한과 격정의 정점이 있으니, 세상의 끝에 다다른 절망과 분노의 힘은 한 세계를 돌이켜 세우려는 준열한 정신으로 오히려 그를 우뚝케 하지 않았던가.
실권한 남인 세족이었던 고산 윤선도. 병자호란을 당해 홀연 보길도 자신만의 왕국 속으로 칩거, 역사의 중심을 비켜가 버린 파격의 귀족. 그 자유롭고 호방한 정신은 그로 하여금 전통 유가적 선비의 모습을 털어버리고 남도의 보편적 삶을 노래하는 절창을 터뜨리며 한 시대를 풍류하며 건너가게 했다.
다산이 치열한 고민과 학문적 성취로 중세적 세계관의 극한을 탐색했다면, 고산은 조선 사대부의 기존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삶의 풍류를 실천함으로써 중세적 삶의 한 새로운 모습과 시각을 열어보였다. 그 점에서 남도라는 독특한 공간은 그들 모두에게 나름의 한계와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 보이게 한 어떤 지평이었던 셈이다.
가학과 월출
영암호
흑석산 정상에서 사방의 산줄기들을 가늠하며 영암호를 굽어본다. 잿빛으로 어둔 저 물길로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면 깊이 모를 저 어둠은 또한 사라진 것들을 다시 되돌리는 어떤 근원이기도 할 것이다. 그 되돌아옴을 조망하기에 여기보다 적당한 곳도 흔치 않을 듯.
아득한 남쪽, 반도의 남단으로 몸을 일으킨 땅끝은 대뜸 거침없는 솜씨로 달마산을 길게 뿌리며 치달려 한바탕 두륜산을 높고 크게 펼쳐낸다. 그 여세는 주작 덕룡을 거칠고 예리하게 벼리며 석문, 만덕산까지 이른다. 곧고 단호하다. 꼬장꼬장하고 칼칼한 저 능선의 맛들은 이 고장의 한 시절 기개와 풍류를 닮은 것인가, 아니, 오히려 그것들을 낳은 것인가. 역사와 만나는 창세의 신화는 서로 물고 물린다.
땅을 찢고 파고드는 잿빛 바다에서 우리 왔던 곳, 그러나 잊어버린 그 곳을 본다. 산줄기 사라지는 바다로부터 산은 되돌아온다. 강진만을 굽어보던 덕룡, 주작능선처럼, 바다의 기억을 간직한 영암호를 향해 달리는 별매, 가학, 흑석의 능선은 내륙 준봉들의 마지막 힘인양 낮게 웅크리지만 한편으로는 새로 태어난 기세로 날카롭고 당차다. 감히 상상한다면, 영암호 흐린 뻘에서 태어난 산자락이 동으로 치올라 두억산을 일으키고 가리재를 넘어와 흑석의 장한 줄기를 뻗치고 다시 가학과 별매로 굽이치며 무수한 별자리들을 흩뿌리며 북으로 오른다. 마침내 비록 장대하진 않으나 미색만큼은 삼남 제일을 다투는 월출산을 솟아올리는 한 힘이 된다. 별자리를 불러 달을 솟게 한다.
모든 산줄기는 바다로 흘러든다. 연기는 하늘로 오른다. 가는 곳의 빛을 닮으며 사라져 간다. 빛나던 강줄기가 지평선 너머 사라지듯 시간은 흐린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햇살 낮아지는 오후, 산길 가는 발걸음은 침묵으로 잠겨든다. 도피할 수 없는 근원, 비로소 시작하는 줄기는 이미 하나의 범람이다. 흔적이란 벗어날 수 없는 예감의 기억과 같다. 우리 각각은 원인을 기다리는 결과들이다. 바람을 타고 바다를 냄새 맡으며 멀리서 아주 멀리서 온 나 혹은 그가 바로 우리들이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먼 영암호가 은빛으로 꿈틀거린다. 발아래 저수지들, 물비늘을 띄우며 건너온 바람이 골을 타고 능선을 올라 솔그늘을 흔든다. 세상 모든 일이 함께 후련해진다. 너른 벌판이 더욱 맑게 눈으로 들고, 돌아보는 월출산도 한결 우뚝해진다.
높지 않은 산, 가리재에서 학계리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지 않고 참으로 느긋하다. 얼마를 가니 졸졸 물소리도 들린다. 손 한 번 씻고, 숲 사이로 트이는 하늘 한 번 보고...
유채밭과 밀밭을 지나서 길은 흐른다. 저 윤기 나는 푸른 것들, 시골서 오래 살았지만 저기 비스듬히 눕거나 자빠져 본 것이 어릴 적 그 언제였던가...? 지난 시절의 기억이 아득하기만 하다.
마을을 지나는 개울에서 땀 씻고, 흩어지는 길을 서성이다 버스 찾아 밭두둑과 돌담길을 걸어 한 바퀴 둘러 본 학계마을. 여름 한때 꽤나 흥청댈 듯 위락시설들도 눈에 띄지만 단정하게 쌓아올린 돌담과 갖은 나무들로 어우러진 모습만큼은 더없이 예쁘다. 어느 본관인지 모르지만 현(玄)씨 세거지인 듯한데, 조선말엽 꽤 나갔던 내력을 짐작케 하는 솟을대문 두 채가 마을의 면모를 이채롭게 한다.
그러나 기대치 않았던 궁금증이 과할 필요는 없으니,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때로는 아는 것밖에 보이지 않는 법. 흐드러지고 넘치는 이 봄빛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더욱 궁금하여서, 알려 하기보다는 오래오래 궁금을 묻어가며 해마다 날마다의 새로움으로 누리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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