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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경상권

팔각산(040622)

by 숲길로 2007. 6. 4.

코스 : 옥계 - 8봉 능선 - 정상 - 산성골 - 옥산리 

 

 

년중 가장 볕이 많다는 하지날 한낮에 올라 더욱 더웠지만 바람과 물, 멀고 가까운 풍경 누리는 맛이 하지볕 이상 풍성했던 하루. 조망과 바람이 멋진 팔봉 정상까지의 암릉길과, 삼림욕하듯 산책하듯 오르내리며 흘러가는 능선 숲길, 여름 산행의 대미인 산성골 물길타기의 삼박자 코스는 환상적이었다. 다만, 암릉길의 안전시설이 과분할 정도여서 맨몸으로 바위 더듬는 짜릿함을 찾는 이에겐 오히려 짜증이었겠다.


뿔처럼 솟은 여덟 바위 봉우리들이 저마다 일으켜 세워놓은 줄기 휘어진 소나무들이 아름답다. 더디게 더디게 흔들리며 자라 마침내 그 흔들림이 생애의 표정과 자태로 굳어 하늘을 더욱 높이 끌어올리는 나무들. 그 속을 흐르는 물길은 비바람에 맞서 함께 철썩였을지도 모를 일이니, 어떤 부름 어떤 꿈이 바위를 깨워 눈보라를 뚫고 솟아나는 푸른 소나무의 피로 파도치게 했던가. 봄가을 고운 볕에 조용히 익는 그런 꿈이 아니라 여름과 겨울의 격정으로 소리치게 하며 사철 푸른 생명을 피워 올리게 하는 꿈. 저 낮은 키와 뒤틀린 줄기들은 왜소함이 아니라 안으로 몰아치던 파도의 흔적, 바위의 단단함으로 소리쳐 마침내 하늘을 드높여버린 말없는 열광의 흔적이리라. 

오르며 돌아보는 옥계 건너 바데봉, 제법 날렵하게 솟은 봉우리를 이어받아 동대산을 넘고 멀리 내연산 향로봉까지 이어지는 줄기가 아득하다. 멀리 북서쪽으로 검푸른 산줄기들은 혹 주왕산의 그림자들인가... 

6봉 지나 돌아보는 눈맛이 일품이다. 둥글게 갈라진 단애들이 봉우리들을 이루고 계곡을 감싸며 이어지는 모습이 규모는 작으나마 설악 용아릉을 연상케 한다.  

점심 먹으며 듣는 팔봉 정상의 바람소리. 짙게 드리워진 녹음이 흔들리며 쏟아지는 파도소리인 양 싱그럽다.

정상 너머 느리게 구비치는 능선의 숲이 좀 더 우거지고 어둑어둑했더라면 소리 없는 걸음이 한층 그윽했을 터. 그러나 유월의 숲은 향기롭다. 모든 소음들은 숲으로 잦아든다. 예기치 못한 즐거움 또한 곳곳에 있으니, 단조로운 녹음을 깨며 빛을 일신하는 한 줄기 나리꽃. 숲길 벗어나 살짝 외면한 채 생각에 잠긴 듯 고개 숙여 있다.

 

 오르며 굽어보다

 

 

 


그늘로 오는 오후의 숲길을 걸어내려 다다른 산성골. 큰 비로 물 불어난 계곡을 첨벙거린다. 먼 귀로 스쳐 들었던 명성을 실감한다. 응봉산 용소골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청석골 푸른 물바닥. 황톳빛 도는 흐린 물색이지만 넉넉한 수량으로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팔봉 오르던 한낮의 목마름을 다 씻어내고도 남는다. 햇살 범접치 못하는 깊은 그늘, 저 푸른 바위는 어쩌면 푸르게 굳어가던 숲그늘이 물빛에 비쳐 이루어진 것일까. 어두우므로 더욱 푸르던 물길의 돌바닥...

모든 좋은 골짜기에는 도회에서 잊혀지고 쫓겨난 이야기들이 돌아와 바람소리 물소리로 머물며 속삭이는 듯하다. 지나는 이들은 알지 못하고 다만 궁금해 할뿐인데, 혹 운 좋은 이는 그런 얘기 한 두 자락  얻어 듣고서 혼자 웃음 지을지 모를 일. 푸른 돌 물가 그늘 깊은 곳에 혼자 앉아 있던 이의 모습은 그런 얘기 한자락 남몰래 엿들은 듯 흐뭇해 보인다.  

뚝 잘라 뻥 뚫린 바위 구멍인 독립문 바위, 쌓아놓은 거대한 벌집처럼, 홀연 눈앞을 가로막으며 치솟는 황소바위. 낯익은 모습이다. 몇 년전 낯선 나라 산길 걸으며 보았던 ‘큰 벌집(big beehive)' 이란 이름의 바윗덩이와 흡사하다. 거대한 원통 모양의 바윗덩이는 그날도 누런빛의 울퉁불퉁한 기하학적 표면을 수천수만의 뜬눈인양 반짝이며 햇살을 뚫고 솟아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팔각산 주릉이 드높고 왼쪽으로는 거침없는 햇살 거두어 협곡을 깊게 그늘 지우며 까마득히 솟는 장대한 바위벽들... 수시로 툭툭 트이는 골짜기 옆 비탈들엔 지천으로 흐드러진 개망초꽃들, 유월의 눈부신 산자락을 나른한 흰빛으로 물들인다.

산길 끝나는 곳에 펼쳐진 밭 한 자락이 무슨 입체와 색채의 퍼포먼스처럼 인상적이다. 고인돌 무리 같은 검은 바윗덩이들이 드문드문 웅크리고, 정성들여 갈아놓은 흙빛 밭고랑 사이, 파랑 우산을 쓴 노란 허수아비를 지키며 펄럭이던 흰 조각들... 문득 눈부셔, 헛것인양 놀랍고 황송스럽던 마무리 풍경이었다.

산성골

 하산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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