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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경상권

주왕산 - 주왕의 정글에서 푸르게 헤매다 (040807)

by 숲길로 2007. 6. 4.

코스: 주산지 - 별바위 - 정맥길 - 798봉 - 갈전골 - 대문다리 - 절골  - 주차장

 

 

 

산행 기점은 주산지. 물이 많이 줄어 잠겼던 왕버들의 밑둥치가 드러나 보인다. 근래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촬영지로 더 유명해져 넓은 주차장도 생기고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김기덕 감독은 강렬한 개성의 영화를 저예산으로 빨리 찍어치우기로 유명한데, 그답지 않게 이 영화는 사계절 주산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고루 담고 있어 주산지를 보기 위해서도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었다.

 


주산지

 

주산지를 왼쪽으로 따라가다 막아놓은 목책을 넘어 맨 꼬리로 붙는다. 곧은길이 잠시 이어지더니 곧 오른쪽 울창한 숲으로 파고든다. 점차 길이 흐려지며 사라지는 느낌. 에라 모르겠다, 나무줄기랑 바위에 엉기고 안기며 앞사람만 따라 오른다. 선두는 심설산행 러셀하듯 길을 만들며 치고 나간다. 바위가 나타나도 우회로가 없으니 그냥 기어오른다. 작전 나온 주왕산 유격대가 따로 없다.

마른 이끼 두텁게 덮인 큰 바위를 숨차게 올라선다. 시원한 바람에 땀 식히며 바라보니, 멀리 왕거암에서 흘러내리는 줄기와 금은광이 능선, 그 너머 태행산 능선까지... 발아래는 흐린 물빛의 주산지가 아름답다. 가야 할 별바위가 어디쯤일까? 지도 꺼내 머리 맞대고 방향을 가늠하니, 이런...! 별바위가 아니라 주산지의 남쪽에 동서로 뻗은 능선을 오르고 있다. 저 멀리 솟은 멋진 바위봉이 별바위구나... 한 시간은 걸릴 듯하다. 아무렴 어떠랴, 갈 길이 확실해졌으니 다리품만 더 보태면 되지... 그래도 주왕산 숲은 활엽종의 큰 나무들이 워낙 울창해서 대책 없이 길을 막는 잡목들이 우거지지 않은 편이다.


그럭저럭 능선. 길 흔적이 보이나 싶더니 곧 뚜렷한 길과 이어지며 표지가 나타난다. 알고 보니, 주왕산 남쪽 무포산에서 피나무재를 건너 왕거암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과 만난 것이다. 별바위 직전까지 길은 수월하면서도 울창한 숲길이다. 기분 좋은 길, 산책하듯 걷는다. 오르막이 나타나자 왼쪽으로 우회하여 별바위(745.2M)를 오른다.

숨차게 오르려니 눈앞에 뱅뱅 별이 뜬다고 별바위라던 어느 분의 농이 이름의 유래와도 멀지 않은 듯, 바위 아래 작은 구멍(박영환님의 사진)으로 올려다보면 별이 보인다고 별바위란다. 바위벽 돌구멍 하나를 통해 깊고 푸른 밤하늘,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그들의 상상력. 그러나, 밤이 아니라 대낮에도 별을 보는 우리 몸의 체험적 상상력이 한 수 위가 아닐까?^^ 

조그만 돌무더기탑이 서 있는 별바위 전망이 그만이다. 바람 맞으며 사방 둘러보고 다시 길을 간다. 별바위 내려서서 머잖은 곳, 동쪽으로 전망이 트인다. 우설령 넘어가는 914번 지방도가 산허리를 따라 희게 흐르고 그 너머 팔각산이 어렴풋하다. 얼마 전 팔각산에서 보았던, 서쪽 멀리 가파르게 솟으며 뚝 떨어지던 봉우리가 주왕산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별바위였던 것 같다. 팔각산 남쪽으로는 동대산에서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검푸른 하늘금으로 시원하다.

 


 

 

별바위의 조망들

 

곧 출출해진다. 적당한 그늘에서 점심식사. 빵조각을 꺼내는데 종종 뵈었던 아주머니가 밥을 덜어주신다. 곁들여 과일까지. 고마우셔라. 여태 성함도 몰랐는데 담에 만나면 꼭 챙겨 물어봐야지...

다시 능선 숲길을 따라 오르내린다. 더운 날씨지만 산 깊은 울창한 맛이 워낙 좋아 묵묵히 끝없이 흘러갔으면 싶다. 곧 신술골 갈림길 안부다. 대부분은 장대장님과 함께 신술골로 하산키로 하고 다섯명만 계속 진행한다. 늘 꿋꿋한 철인 손사장님, 몇 년 전 강원도 어느 산에서 뵌 듯한 일흔 노익장 어르신, 밥을 나누어 주시던 홍일점 아가씨 같은 아주머니, 복슬이 아빠(?) 털보 아저씨, 나머지 한사람까지 오인조다. 시간상 왕거암까지는 무리일 듯하나 가는 데까지 가 보는 거지 머. 길을 나서는데 뒤에서 박수가 쏟아진다. 에구에구 쪽팔려라~~ 무신 히말라야 원정대 같구만...

복슬이 아빠, 왈

“엿보고 있다가 저 분들 가고 나면 우리도 살살 뒤따라 내려갑시다 ~ ”

“좋지요^^”


더 오붓해졌다. 오히려 적막했던가, 입담 좋은 복슬이 아빠가 쉼 없이 얘기를 늘어놓으신다. 덕분에 지루함 없이 길을 간다. 주등산로와 달리 넓지 않은 오솔 산길의 우거진 숲, 긴팔 입은 복슬이 아빠는 줄곧 가지에 걸려 옷을 찢어먹는다. 아까 선두에서 러셀(?)하면서도 그랬다는데...

“아, 돈드는 옷 찢지 말고 몸으로 때우시라니까요?”

킬킬대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말이 씨가 됐나, 갑자기 쾅! 별이 번쩍인다. 위로 가로누운 나무에 머리가 부딪치며 목뼈까지 삐그덕거린다. 거의 목 디스크감이다.

“몸으로 때우는 게 좀 과격하시구만? 적당히 하세요, 업고 갈 사람 없수, ㅋㅋ.”

“업고 가긴 바라지 않으니 묻고나 가시우, 그저 삽질이나 잘 좀 해 주시구랴...”


그러나 좀 덥다. 목도 계속 말라온다. 가을의 주왕을 꿈꾼다. 참나무, 단풍나무, 쪽동백 등 활엽이 많아 환상의 능선길이다. 이년 전 가을, 주왕산(720봉)에서 칼등고개를 넘어 가메봉쪽으로 아내와 둘이 걸은 적이 있었다. 적막 산길은 온통 빛과 바람의 아우성으로 넘치고 있었다. 생각 속으로 조금 시원해진다.

밖에서 산은 높고, 안에서 산은 깊다. 만족할 만큼 숲을 잘 표현한 이미지는 여태 본 적이 없다. 숲은 어떤 평면적 시야도 담아낼 수 없는 넘쳐흐르는 입체의 질(質)이다. 경계 없는, 결코 닫히지 않는 무한한 내부가 숲이다. 이렇듯 깊고 그윽한 숲길을 걸으면 나무가 계절을 낳는 것이란 느낌이 든다. 저들끼리 수런대고 흔들리며 깊게 그늘지는 공간을 빚고, 위로 아득히 빛나는 우듬지로부터 환하게 열리는 허공을 펼쳐 놓는다. 지구상 모든 민족이 가진, 우주를 낳는 나무의 신화는 결코 낡지 않는 근원적 감성일 것이다. 하늘과 하늘을 휘저어 태어난 지상의 모든 이미지와 형태들은 넘쳐흐르는 나무, 숲으로부터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산에 홀린 자들에게 숲은 또한 세상의 영원한 바깥이며 비밀스런 장소다. 산은 유혹한다.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간다. 사랑에 빠진 자들이 사라지고 싶어 하는, 사회와 언어가 사라지는 그 곳으로...

산은 산냄새가 나야지, 사람 냄새가 과하면 안 된다며 내내 묵묵하신 노익장 어른도 많이 흐뭇하신 표정이다.


798봉 전 왼쪽으로 희미한 길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그리 내려서면 역시 신술골 줄기 쪽이다. 갈전골로 빠지려면 798봉은 넘어서야 한다. 

드디어 798봉. 아마 오늘의 최고봉이 될 듯하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밋밋한 육봉이다. 이제부터 줄곧 왼쪽을 살핀다. 먼저 내려간 분들이 오래 기다릴듯해 길이 보이면 무조건 내려서기로 한다. 740봉 전, 왼쪽으로 비교적 뚜렷한 길 흔적이 있다. 잠시 쉬고 곧장 내려선다. 얼마 가지 않아 갈전골의 상류인 마른 개울이 나타나더니 곧 물이 보인다. 물이 모자라던 차라 반갑게 떠 마신다. 달다. 개울을 따라, 때로는 옆으로 흩어지는 흐린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걷는다. 부산 메아리 산악회 표지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길은 아니다. 타잔 놀이터 같은 정글탐험 나온 건지, 걸핏하면 덤불에 긁히고 풀쐐기에 쏘이고... 앞장 선 손사장님은 꿋꿋이 길을 찾아가신다. 하긴 산에 무슨 길이 있나, 도로가 길이지. 산길이란 오히려 산이 특별히 배려하고 마련해 준 공간일 뿐이다. 갈전골(칡밭골?)이란 이름답게 과연 칡덩굴도 많아 보랏빛 꽃은 만발하여 향기를 풍긴다. 터널처럼 얽힌 곳은 꽃그늘을 머리에 이고, 수북 떨어진 꽃잎을 사뿐 밟으며 간다.

계곡물도 차츰 불어난다. 홀랑 벗고 달궈진 몸을 풍덩 던져 넣고 싶은 곳도 심심찮게 보인다. 샌들로 갈아 신고 애들 마냥 첨벙거리며 물길을 간다. 원시림이 끝나가고 주왕산의 또다른 비경이 슬슬 모습을 드러낸다. 


알탕의 충동을 참으며 도착한 대문다리 삼거리. 내려온 쪽은 등산로가 아니라며 목책이 막혀 있고 가메봉 쪽으로만 등로가 열려 있다. 오늘도 돈 많이 버는구만, 이러다 산꾼들 떼부자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것네...

이제부터가 진짜 절골인 셈이다. 푸른빛이 도는 너럭바위 물가에 앉아 숨 돌리며 사진도 한 컷.

물에 비친 산 그림자가 곱다. 푸른 숲이 푸른 물에 젖으면 숲과 물, 산의 모든 것은 서로를 닮아가며 맑고 가벼워진다. 걸음이 느려질수록 사람 또한 그리 될 것이지만 바쁜 몸은 종종 곁으로만 미끄러진다. 오를수록 더 무거워지는 몸, 진실로 가벼워지려면 한결 느려져야 하리라. 벗어버려야 할 무게가 아니라 몸 스스로 가벼움의 물질이 되어가면서...

 


 

 

이후부터 내내 길은 수월하고 절경이 이어진다. 위협하듯 솟은 절벽 사이 협곡과 널찍한 암반, 검푸른 물 담긴 단지마냥 앙증스런 용소와 폭포... 연신 감탄하며 지루한 줄 모르고 걷다가 적당한 곳에서 알탕까지 하고...

그러나 많이 늦었다. 신술골로 내려간 분들이 너무 오래 기다리겠다. 발걸음 붙드는 풍광에도 곁눈질만 흘리며 부지런히 걷는다. 절골 매표소 통과하니 여섯시 반 남짓이다. 여덟 시간여 산행이 끝난다.

먼저 내려오신 분들이 일부러 챙겨 두신 푸짐한 찌짐에 맥주로 목 축이고. 오래 기다려 준 것만도 고마운데 이런 황송할 데가...


돌아오는 길, 넘어가는 해가 유난히 붉다. 더욱 검고 선명해지는 산줄기들... 아무리 보아도 싫지 않으니, 다음 날엔 또 어느 산을 오르내리고 있을거나... 

 

 

 

06. 5월의 주왕산 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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