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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미드소마 - 윤회의 중심을 향하여 (스포 100%!)

by 숲길로 2019.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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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소마 Midsommar (2019) 170분

각본, 감독 : 아리 에스터 Ari Aster

출연 : 플로렌스 퓨, 잭 레이너, 빌헬름 블롬그렌, 윌리엄 잭슨 하퍼, 윌 폴터  

촬영 : 파웰 포고젤스키 Pawel Pogorzelski

음악 : 더 헥산 클로크 The Haxan Cloak




엄청난 함축력을 과시하는 마지막 장면, 긴 여운 남기며 자막 너머 사라진다. 돌이켜보건데, 그건 찡그림이었을까 활짝웃음이었을까? 아니 그 두 표정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보고나서 평들을 검색해 본다. 가장 맘에 드는 한 줄.  

연민과 공감을 모르는 자, 싹 다 불태워라~ (씨네21 임수연)

관계의 파국 어쩌구~ 하는, 젊은 천재감독의 연출 동기도 띈다. 나아가 좀 비스듬한 맥락에서, 삶의 근원적 비극성을 이해하는 자만이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 누군가의 말도 스쳐간다.   


찡그림을 담은 메인 포스터(아래)와 달리 태양처럼 피어나는 활짝 웃음, 무슨 뜻이었을까? 풍성한 공물에 흡족해 하시는 대지모신大地母神이자 태양의 신부인 꽃의 여왕(메이퀸)? 또는 (감독의 힌트처럼) 찌질한 관계를 싹 청산하고 당당하게 다시 태어나는 자의 희열? 나아가 공포와 매혹의 질펀한 향연을 만끽하며 한껏 고무된 나같은 관객의 표정? 





무엇이 우리를 사로잡는가? 가령,

플로렌스 퓨의 울음에 공명共鳴하는 젊은 여성들. 함께 울기, 말 그대로 공명共鳴이지만 '함께함'의 풍경이 저보다 더 기이할 수 있을까?

둘이 교접하되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성性은 공동체를 넘어 우주적 사업의 풍경이다. 해학 해괴의 극치다. '온 우주가 도와준다'던 이. 박근혜였나 최순실이었나? 그 둘 다? 누구든 홀로가 아니라는, 도저한 연민과 공감의 공동체, 지극한 파시즘. 한여름밤의 꿈보다 기이하고 흥미진진한 밤없는 낮의 축제 이야기. 

함께하는 울음과 신음의 연장선상에, 보다 정화된 형태로 우주와 공명하는 모음의 긴 발성이 있다. 불가해하고 기묘한 소리의 천문天文 아닌 천문天聞. 노인은 그 발성이 '모든 것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외적 자연과 공명하는 '내적 자연'으로서의 목소리. 이땅의 유교 이상으로 가차없었던 기독교가 북유럽에서 고대 문명을 말살하거나 멸균소독하기 전에도 모든 것(Α에서 Ω까지)에 대한 비의는 이미 거기 있었던 것. 미드소마의 공포는 이질적인 문명의 충돌에서가 아니라 '망각'의 무지, 그 자신 안으로 흐르는 피(유전)에 대한 망각과 거부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상황들로부터 온다. 이미 기대하고 예견된 것들이다.

미드소마 축제를 주관하고 진행하는 건 저 영원히 흐르는 가공할 힘, 그 힘이 불태우고 삼키고 다시 낳는다. 미드소마의 공포는 때로 기이하고 코믹하다. 죽음과 죽임은 연극적이고 시체조차 인형같다. 분장 미숙이 아니라 그 힘에 지배되는 인간의 실상이다.

그 맥락에서 얼굴 일그러뜨리기. 인간의 표상인 얼굴을 물物로 되돌리는 폭력적인 삶의 제스처들. 늙은 몸은 생명이 아니라 고갈 자체이므로. 미드소마에서 죽음과 죽임은 순환의 방해물을 제거하거나 공물을 확보하는 행위다.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생명력이 고갈된 물物의 처리 과정Process은 가차없고 빈틈없다. 



그 과정Process을 아름답고 정교한 이미지로 우직하게 밀고 가며 감독은 호러의 본질을 꿰뚫는다. 시대착오와 어긋난 공간감각이 빚어내는 매혹과 공포,  혹은 혐오와 매혹. 공포는 매혹의 일종이다. 혐오하고 두려워하지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관객이라 여긴 이들이 사실은 그 제의의 제물이자 주인공이다. 순진한 자 무지한 자는 가장 먼저 제물이 된다. 경박한 호기심 또한 처단된다. 망설이고 두려워하지만 장대한 운명의 순환 회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자, 주인공이 된다. 선택받은 신성한 제물이 된다. 이토록 기이한 코믹호러,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불편한 진실'을 일깨우는. 

죽이고 죽임, 먹고 먹힘. 희생제는 그 순환 회로를 신성화하는 의례다. 살벌한 생존경쟁을 통해 날로 자기증식하며 전지구를 쓰레기로 뒤덮어가는 자본제적 생산소비 체제 역시 그 회로의 최신 최악 버전일 테지만, 짐짓 '인권'의 가면과 '환경'의 스크린 뒤에서 진실을 외면하곤 한다. 영화의 독창성은 공포의 탁월한 연출만큼 우리가 잊고 사는 문명의 어떤 외설적 핵심을 환기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 지점에서 '미드소마'는  '경계선'을 닮았고 동류의 고전 '위커맨(1973)'을 확장변주한다.



물物의 귀환. 윤회가 한낱 개념이 아니라 눈앞에서 생생하게 구현되고 있는 현재진행형 만물의 운명이라면?

그녀는  대지적 생명체(풀)와 하나됨을 환각한다. 꽃, 태양(빛)과 대지의 합작품으로서 꽃, 꽃의 화신인 오월의 여왕(메이퀸). 꽃에 싸인 플로렌스(꽃의 도시!) 퓨. 꽃이 된 그녀는 비로소 꽃처럼, 꽃으로 웃는다. 다 불태우며 다시 태어난다. 네가 숭배하던 것을 불태우고 네가 불태우던 것을 숭배하라! 는 유명한 개종의 모토. 제물을 품은 성소는 불태워져 하늘로 치솟고 그들의 검고 비스듬한 집들은 더욱 완강히 대지를 파고든다.   


장애인 예지자. 상투적인 캐릭터지만 그는 소위 '호모 사케르'란 개념에 정확히 대응하는 존재다. 근친교접으로 태어난 저주받는 열외자, 동시에 공동체의 운명을 예지하는 부정적으로 신성한 자. 그는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존재이나 없어선 안될, 공동체의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구성적 핵심이다. 


투신과 얼굴 짓이기기, 윤회의 바퀴에 스스로를 내던져 물화物化하기. 물성物性을 확증하듯 일그러진 클로즈업이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기억을 더 강렬히 일깨우며 기괴함을 극대화한다. 여기엔 물화物化를 의례의 과정Process으로만 이해하는 관점과, 존재의 '기억'에 사로잡히는 관점 사이 대립이 있다. 이 영화가 관계의 파국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될 때, '기억'과 '과정'의 대립은 좀 더 도드라진다. (순환)과정으로 나아갈 것인가, 기억에 머물 것인가. 물物을 넘어선 고유한 인간인가, 인간을 넘어선 우주적 물物인가?

현대엔 절대인권의 개체를 배제한 또다른 인간은 없다. '인류'는 그 확장 개념일 뿐 자연계의 순환을 매개하는 엄중한 생태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다. 죽음에 사로잡혀 (자기연민에 빠져) 머물 것인가, 저 장대한 순환의 공동체로 나아갈 것인가? 물론 이건 올바르게 제시된 선택지가 아닐 것이다, 해도 

피의 대물림, 감독의 전작인 '유전hereditary'이란 우리 개체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어떤 힘의 지배를, 우리 각각은 그 어떤 힘의 숙주에 지나지 않음을 뜻한다. 그 힘이 '미드소마'에서 확대 재현된다. 그 힘은 문명인文明人 개체를 훌쩍 넘어서고 몸은 한낱 태양과 대지에 바치는 제물쯤으로 여긴다. 하여 우리 모두는 숙주宿主다. 우리가 체제를, 공동체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체제가 우리를 안고 끌고 간다. 체제가 우리 몸을 빌어 살아간다, 영원히.




새삼 느낀다, 잘 만든 영화는 관객을 물신숭배자로 만든다. 보이고 읽히는 것들 너머의 어떤 무의미한 것들에 매혹되고 탐닉케 한다. 연출된 상황을 넘어 스스로 증식하는 사물들의 이미지와, 사람(의 관계) 너머 걸리는 불가해한 풍경들, 영원히 말로 태어날 수 없는 그것들에 홀린다. 


전작 '유전'과 이 '미드소마' 두편만으로 거장이 된 천재감독의 엄청 영악하게 짖궂고 독창적이고 불편한 영화. 절묘한 음악(향) 어우러진 기이하고 아름다운 영상에 눈돌릴 틈 없지만 보다가 몇 번은 뒤집어져야 하는 코믹(?) 호러 걸작. 더하여 '레이디 맥베드'의 압도적인 무게감, 박찬욱의 '리틀 드러머 걸'에서 긴장 넘치는 호연의 주인공 플로렌스 퓨까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