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래 글은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책 <<활기찬 물질: 사물들의 정치생태학(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Duke Univ. Press, 2010)의 서문을 옮겨 놓은 것이다.
2. 이 책 뒷표지에 실린 소개글을 옮겨 놓는다.
자연, 윤리, 그리고 감정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정치이론가 제인 베넷은 <<활기찬 물질>>에서 자신의 초점을 사물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서 사물 그 자체로 이동한다. 정치 이론은 비인간적 힘들이 사건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더 나은 일을 할 필요가 있다고 베넷은 주장한다. 그런 목적을 향해 그녀는 인간적 신체들과 비인간적 신체들 모두를 관통하고 가로지르는 "생기적 물질성(vital materaility)"을 이론화한다. 베넷은, 행위주체성이 항상 인간적 힘들과 비인간적 힘들의 임시적 배치들의 결과로서 출현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공적 사건들에 관한 정치적 분석들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탐구한다. 행위주체성이 이런 식으로 분포되고 오직 인간들만의 권한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더 책임성이 있는,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정치학―개인들을 비난하고 책망하기보다 상황과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는 힘들의 그물을 식별하는 데 진력하는 정치학―의 계발을 자극할 것이라고 그녀는 제안한다. 베넷은 줄기세포, 생선 기름, 전기, 금속, 그리고 쓰레기를 비롯한 일상적인 사물들과 물리적 현상에 관한 확장된 논의를 통해 생기적 유물론의 정치적 및 이론적 함의들을 검토한다. 그녀는 화학물질들의 활발한 흐름을 일으키는 매립지와 뇌화학 및 기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오메가3 지방산 같은 물질적 구성체들의 활력에 관해 숙고한다. 도중에 그녀는 스피노자, 니체, 소로, 다윈, 아도르노, 그리고 들뢰즈의 개념과 주장들을 다루면서 서양철학에 존재하는 활기찬 물질에 관한 사유의 긴 역사를 드러낸다.
[활기찬 물질: 사물들의 정치생태학]
서문
감사의 글
1장 사물들의 힘
2장 조립체들의 행위주체성
3장 식용 물질
4장 금속의 삶
5장 생기론도 아니고 기계론도 아니다
6장 줄기세포와 생명 문화
7장 정치생태학들
8장 활력과 이기심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서문
이 책은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며,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하나의 정치적 기획이다. 철학적 기획은 근대인들의 머리를 빠르게 관통하는 한 관념―물질을 수동적인 재료, 즉 원료 그대로의, 맹목적인, 또는 생기 없는 것으로 여기는 관념―을 천천히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를 무감각한 물질(그것, 사물들)과 활기찬 생명(우리, 존재자들)로 분석하는 이런 습관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의 어구를 사용하면, "감각적인 것들의 분할"이다. 물질과 생명의 격리는, 오메가3 지방산이 인간의 기분을 바꿀 수 있는 방식이나 쓰레기가 매립지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할 때처럼 화학물질들의 활발한 흐름과 메탄의 휘발성 바람을 일으키는 방식과 같은, 물질의 활력과 물질적 구성체들의 활발한 힘들을 무시하도록 부추긴다. 나는 "생명"과 "물질"이라는 수사들을 돌리고 돌려서, 평범한 단어가 계속 반복되면 말이 안되는 낯선 소리가 될 수 있는 방식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것들이 이상한 듯 보이기 시작할 때까지 그것들을 괴롭힐 것이다. 이런 낯설게 하기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에서 생기적 물질성(vital materiality)이 형성되기 시작할 수 있다.
또는 오히려 그것은 다시 형성될 수 있는데, 이런 관념의 한 판본에 대한 표현은 수동적인 객체들보다 생기 있는 사물들이 붐비는 세계에 대한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이미 발견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감각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자연의 자발성에 대한 잠재적인 믿음"으로 서술한 것을 다시 일깨우고자 노력할 것이다. 또한 활기찬 물질이라는 관념은 서양에서 긴(그리고 잠복해 있지는 않지만, 아무튼 지배적이지는 않는) 철학적 역사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역사도 다시 환기시킬 것인데, 특히 바루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i David Thoreau), 찰스 다윈(Charles Darwin),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질 들뢰즈(Gilles Deleuze), 그리고 이십 세기 초 베르그송과 한스 드리쉬(Hans Driesch)의 생기론의 개념들과 주장들에 기댈 것이다.
이 책의 정치적 기획은, 가장 야심차게 서술하면, 활기찬 물질 및 활발한 사물들과 더 지적인 그리고 더 지속가능한 관계를 맺기를 고무하는 것이다. 지침이 된 질문은 이렇다. (비인간적) 신체들의 활력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공적인 문제들에 대한 정치적 반응들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활력"은 인간들의 의지와 설계들을 방해하거나 차단할 뿐 아니라 그것들 나름의 궤적, 성향, 또는 경향을 지닌 유사 행위자나 힘으로서도 작용할 수 있는 사물들―식품, 상품, 폭풍, 금속―의 역량을 의미한다. 내 열망은 인간들의 주변으로 그리고 내부로 흐르는 활기찬 물질성을 분명하게 표현하여, 사물들의 힘을 더 제대로 다룬다면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분석들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잡동사니, 폐물, 쓰레기, 또는 "재활용품"이 아니라 쌓아 올린 한 더미의 활발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물질을 접한다면 소비 유형들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음식 섭취가 그것들 가운데 몇몇은 내 것이고, 대부분은 내 것이 아니며, 그리고 어느 것도 항상 우위에 있지는 않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신체들 사이의 만남으로 이해된다면 공중보건에 어떤 차이가 초래될 것인가? 물질 속 활력의 유일한 원천은 영혼 또는 정령이라는 가정이 부재하다면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싸고 어떤 쟁점들이 제기될 것인가? 전기가 하나의 자원, 상품, 또는 도구뿐 아니라 더 급진적으로 하나의 "행위소(actant)"로서도 여겨진다면 에너지 정책 과정에 어떤 변화가 초래할 것인가?
행위소라는 술어는 브뤼노 라투르의 술어인데, 행위소는 인간이거나 아니면 비인간일 수 있는 행위의 원천으로서, 효험을 지니고, 일을 할 수 있고, 차이를 나타내기에 충분한 정합성을 지니고, 결과를 산출하고, 사건들의 행로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든 한 시행에서 다른 한 존재자를 변경시키는 어떤 존재자"인데, 그것의 "능력은" 행위에 앞서 미리 상정되기보다 "[그것의] 수행에서 도출된다". 몇몇 행위소들은 원(原)행위소로서 더 잘 서술되는데, 이것들의 수행 또는 에너지들이 너무 작거나 너무 빨라서 "사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효과의 다중 양식과 정도를 다루는 어휘를 개발하고자 한 라투르의 시도, 더 분산된 행위주체성을 서술하기 시작하고자 한 시도를 찬양한다. 라투르는 인간들에게 독특한 것 또는 심지어 유일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간주되는 것을 전략적으로 무시하는데, 나도 그럴 것이다. 최소한 잠시 동안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그럴 것이다. 나는 구체적인 "사물들"에 아낌없이 주목하며 특수한 물질적 배치들의 독특한 역량 또는 유효한 힘들을 강조한다. 일반적인 것보다 덜 수직적인 평면 위에 인간적 행위소들과 비인간적 행위소들을 나타내려는 시도는 인간적인 것에 관한 의문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고 주체성과 그것의 기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 그리고 그것의 경계들에 관한 풍성하고 다양한 문헌을 무시하는 것이다. 주체성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가리키는 철학적 기획도 신의 견지에서 보는 인간의 독특함, 물질성으로부터의 벗어남, 또는 자연의 지배라는 환상들과 얽혀 있곤 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는 곳에서도 철학은 여전히 아포리아적이거나 돈키호테적인 노력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비주체들에서 비롯되는 능동적인 힘들에 대한 어휘와 구문론을 개발하는, 그래서 그것들을 더 잘 식별하는 과업에 집중하기 위해,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주체성이라는 주제는 지체없이 처리된다. 나는 일반적으로 그림자 속에 내던져진 것―물질적 행위주체성 또는 비인간적 사물들이나 전적으로 인간적이지는 않는 사물들의 효과―를 조명하기를 바란다. 나는 인간중심적 형식으로 행해진 정치 이론의 향연에서 남은 재료로 요리를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나는 수행적 자기모순의 혐의를 초래한다. 결국 활기찬 물질에 관한 이 이론을 표명하고 있는 자는 인간 주체가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데, 물질, 생명, 자기, 이기심, 의지, 그리고 행위주체성 같은 조작적 관념들의 수정을 고려하면 수행적 모순인 듯 보이는 것이 당연히 없어진다고 나는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물질의 활력을 옹호하는가? 내 예감은 죽어 있거나 철저히 도구화된 물질이라는 이미지가 인간의 오만과 정복 및 소비라는 지구를 파괴하는 우리의 환상들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 신체들의 주변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순환하는 더 넓은 범위의 비인간적 힘들을 탐지하지(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그렇게 한다. 우리를 돕거나 파괴하고, 강화시키거나 무력하게 만들고, 품위를 높이거나 떨어뜨릴 수 있는 물질적 힘들은 아무튼 우리의 주목을 요청하거나, 또는 심지어 "존중한다"(이 술어를 칸트적 의미를 넘어서 연장시켜). 본질적으로 생기 없는 물질이라는 수사는 더 생태학적이고 더 물질적으로 지속가능한 생산 및 소비 양식들의 출현에 대한 걸림돌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내 주장들은 인간의 생존과 행복에 대한 이기적이거나 의욕적인 관심에 의해 고무되는데, 나는 인간-물질성과 사물-물질성 사이의 더 주의를 기울이는 만남들과 더 녹색인 형태들의 인간 문화를 조장하기를 바란다.(생기적 유물론의 "생태학적" 특성이 마지막 두 장의 초점이다.)
"유목론"에서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유물론적 생기론"이라는 관념을 실험하는데, 그 관념에 따르면 활력은 물질-에너지에 내재한다. 그 기획이 내 기획을 고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들뢰즈와 가타리처럼 나는 현대 과학과 문학의 잡다한 저술가들뿐 아니라 에피쿠로스주의, 스피노자주의, 니체주의, 그리고 생기론적 전통들에서 선택적으로 끌어낸다. 이 기획은 여러 과업의 추구를 동시에 요청하기 때문에 내가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필요하다. 그 과업들은 (1) 행위주체성, 행위, 그리고 자유라는 수용된 개념들을 때때로 극한까지 연장하는, 활기찬 물질의 실정적 존재론을 서술하기, (2) 인간 신체에 물질 활력에 대한 미학적-정동적 개방성을 유발하기 위한 논증들과 다른 수사학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생명/물질, 인간/동물, 의지/결정, 그리고 유기적/무기적이라는 존재신학적 대립쌍들을 없애기, 그리고 (3) 비인간적 행위소들의 기여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정치적 분석 형식을 묘사하기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우리 주변과 우리를 통과하여 흐르는 생기적 물질성에 대해 증언을 하려고 노력한다. 줄기세포, 전기, 음식, 쓰레기, 그리고 금속들의 움직임과 효과가 정치 생활(그리고 인간의 삶 자체)에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공적으로 출현하자마자(흔히 처음에는 인간의 기획이나 기대를 교란함으로써) 거의 즉시 이런 활동들과 힘들은 인간의 기분, 행위, 의미, 의제, 또는 이데올로기로 표상된다. 이런 빠른 대체 덕분에 "우리"가 정말 저 모든 "그것들"―내가 의지하는 (비기계주의적, 비목적론적) 유물론의 전통에 따르면, 잠재적으로 강력한 행위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그것들―을 관장하고 있다는 환상이 지속된다.
스피노자 자신은 전적으로 유물론자는 아니지만, 그가 이 책에서 나의 초석이다. 나는 다른 신체들과 동맹을 형성함으로써 자체의 활동 능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의욕적 신체라는 그의 관념에 의지하며, 만물은 같은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의 신념을 공유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이란 "자연의 질서를 따르기보다 교란한다"는 관념을 거부했고, 대신에 "선, 평면, 또는 입체에 대한 탐구와 꼭 마찬가지로 인간 행위와 욕망을 고려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루크레티우스도 자신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일종의 일원론을 표현했는데, 만물은 변덕스러운 동일한 질료, 원한다면 같은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는 말한다. 루크레티우스는 그것들을 원기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우리는 원자, 쿼크, 입자 흐름, 또는 물질-에너지라고 부른다. 이런 동일질료설, 즉 깊이 내려가면 만물은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단순한 기층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이런 암시는 생태학적 감성과 공명하는데, 그것 또한 내게 중요하다. 그러나 몇몇 판본들의 심층생태학과는 대조적으로, 나의 일원론은 부분들의 매끈한 조화도 공통 정신에 의해 통일된 다양성도 상정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표현하듯이, 여기에서의 신조는 "존재론적으로는 하나, 형태적으로는 다양한"이라는 것이다. 미셸 세르가 <<물리학의 탄생(The Birth of Physics)>>에서 말하듯이, 이 세상은 다양하고 가변적인 물질성들이 충돌하고, 응고되고, 형태를 갖추고, 진화하고, 해체되는 소란스러운 내재적인 마당이다. 나는 에피쿠로스주의가 허공에서 낙하하고 빗나가는 개별 원자들이라는 너무 단순한 심상을 품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에는 여전히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다―그리고 이상한 난류의 논리를 알게 된다면 인간의 존엄과 품위 있는 정치가 육성된다―는 그것의 확신을 공유한다.
비인격적 정동
내가 <<근대적 삶의 매력(The Enchantment of Modern Life)>>을 저술했을 때, 내 초점은 인간적 정동, 더 구체적으로는 매혹의 기분이나 기쁨과 불안의 이상한 조합의 윤리적 관련성에 관한 것이었다. 착상은 일상 세계―자연뿐 아니라 상품과 다른 문화적 생산품들―에 대한 감각적 매혹의 순간들이 스스로를 윤리적 원리들의 승인에서 윤리적 행동들의 실제 실천으로 움직이는 데 필요한 동기부여 에너지를 증강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책의 주제는 정치 이론 내부의 더 큰 조류, 즉 여성주의적 신체 연구와 "자기 배려"에 관한 미셸 푸코의 작업에 의해 대체로 고무된 일종의 윤리적 및 미학적 전환에 속한다. 이런 탐구들은 신체 운동, 명상, 성, 그리고 먹기 같은 신체적 행위와 "욕망"을 윤리적 레이더 스크린 위에 다시 놓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몇몇 정치이론가들―<<저스티스 인터룹투스(Justice Interruptus)>>에서의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가장 두드러질 것이다―은 이런 전환이 경제 정의, 환경의 지속가능성, 인권, 또는 민주적 거버넌스 같은 경성의 정치적 쟁점들을 희생하며 정체성에 관한 연성의 심리문화적 쟁점들로 후퇴했다고 비판했다. 다른 이론가들(나는 이 진영에 속한다)은, 윤리적 감성과 사회적 관계들을 형성시키고 재형성시키는 신체적 규율 자체가 정치적이며, 그것이 없다면 어떤 원리나 정책도 한 다발의 말에 불과할 위험이 있는 "미시정치학"이라는 (적게 탐구된) 분야 전체를 구성한다고 대응했다. 경제의 녹색화, 부의 재분배, 권리의 강화나 확장은 이런 결과들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인간의 성향, 기분, 그리고 문화적 배치가 없다면 전혀 있지 않을 것이다.
윤리적 전환이 자극이 되어 정치이론가들은 영화, 종교적 관행, 뉴스매체 의례, 신경과학적 실험, 그리고 윤리적 의지 형성의 다른 비표준적 수단들에 더 주목하였다. 그 과정에서 "윤리"는 더 이상 주로 일련의 신조들을 가리킬 수 없게 되었으며, 그것은 도덕적 내용, 미학적-정동적 형식, 그리고 집단적 분위기 사이를 잇는 중개들의 복잡한 집합으로 간주되어야 했다. 여기서 정치이론가들은 낭만주의 사상가들(나는 장 자크 루소, 프리드리히 쉴러, 니체, 랄프 왈도 에머슨, 소로, 그리고 월트 휘트먼을 생각하고 있다)이 오래 전에 강조했던 것―일련의 도덕적 원리들이 실제로 지탱하려면 걸맞는 정동의 분위기 또는 풍경이 정착되어야 한다―을 확인했다.
나는 계속해서 정동이 정치와 윤리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 신체에 특정하지 않는 "정동"으로 가지를 낸다. 이제 나는 정동적 촉매들이 초래하는 인간의 관계 형성 역량의 증가보다 비인간적 신체 내에 존재하는 대로의 촉매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이런 힘은 초인격적이거나 간주체적이 아니라 (이상적으로도) 인간으로 상상될 수 없는 형상들에 고유한, 비인격적 정동이다. 이제 나는 매혹이라는 수사가 어떻게 두 방향을 가리키는지 훨씬 더 강조하는데, 첫 번째 방향은 매혹당했음을 느끼고, 그 때문에 행위 역량이 강화되기도 하는 인간들을 향하고, 두 번째 방향은 인간 신체와 다른 신체들에 (유익한, 유해한) 결과를 산출하는 사물들의 행위주체성을 향한다. 유기적 신체와 무기적 신체, 자연적 객체와 문화적 객체 (이런 구별은 여기서 특별히 특이하지 않다) 모두가 정동적이다. 여기서 나는, 대체적으로 무엇이든 어떤 신체의 활동성 및 반응성 역량을 가리키는 스피노자주의적 정동 관념에 의지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 점을 이런 식으로 서술한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달리 말해서, 그것의 정동들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떻게 다른 정동들, 다른 한 신체의 정동들과 조합을 이루어...그 신체를 파괴하거나 또는 그것에 의해 파괴되고,...그것과 행위 및 정념들을 교환하거나 더 강력한 신체를 구성하는 데 같이 합류할 수 있는지 아니면 할 수 없는지 알기 전에는 그 신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또는, 데이비드 콜(David Cole)에 따르면, "정동은 한 신체가 다른 한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묘사하는 입자-힘들의 충돌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주관적 감정 이전에[또는 없이] 느끼는 역량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정동은 주체성으로 고정화되는 경향이 없는 힘들의 마당을 만들어낸다." 내가 비인격적 정동 또는 물질적 활기라고 부르는 것은 물질에 부가되어 깃드는 영적인 보충물 또는 "생명력"이 아니다. 내 관점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생기론이 아닌데, 나는 물리적 신체에 들어가서 생기 있게 만드는 별개의 한 가지 힘을 상정하기보다 정동을 물질성과 동일시한다.
다시 내 목적은 물질성 자체에 내재하는 활력을 이론화하고, 그래서 물질성을 수동적 실체, 기계주의적 실체, 또는 신이 깃든 실체와 같은 수사들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이런 활기찬 물질은 인간들이나 신의 창의적 활동을 위한 원료가 아니다. 그것은 내 신체이며, 볼티모어 잡동사니의 신체(1장), 프로메테우스의 사슬(4장), 그리고 다윈의 벌레(7장)뿐 아니라, 전기라는 전적으로는 신체가 아닌 것(2장), 소화되는 음식(3장), 그리고 줄기세포(5장과 6장)이다.
방법론에 관하여
나는 헤겔-마르크스-아도르노보다 데모크리토스-에피쿠로스-스피노자-디드로-들뢰즈의 전통에 속하는 유물론을 추구한다. (사적 유물론자들이 하는 것처럼) 사회적 헤게모니를 드러내기 위해 인간 권력의 흔적을 쫓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바는 자연적 신체들과 기술적 인공물들의 비인간적인 사물적 힘, 물질적 행위주체성의 향기를 쫓는 것도 공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나는 "쫓는다"라는 말을 자크 데리다가 동물에 관한 자신의 성찰의 맥락에서 전개한 의미에서 사용한다. 데리다는 존재하기와 쫓기 사이의 친밀성을 지적한다. 존재하는 것(무엇이든, 누구든)은 항상 (무언가, 누군가를) 쫓는 것이며, 항상 그것이 아무리 비인간적일지라도 무언가로부터의 부름에 반응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 활기찬 물질을 대변하는 과업에 적절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문에 사물들의 독립성을 지우지 않으면서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비인격적 정동의 모호하지만 도처에 존재하는 세기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필요한 듯 보이는 바는 기꺼이 소박하거나 어리석게 보이는 것, 아도르노가 자신의 "어릿광대 같은 특질"이라고 부른 점을 긍정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 이것은, 사건들(정전, 식사, 사슬로 묶임, 쓰레기의 경험)을 존재적으로 다양한, 모두 전적으로 물질적이지만 몇몇은 인간적이고, 몇몇은 비인간적인 행위소들 사이의 만남으로 기꺼이 이론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필요한 것은 인간 신체의 외부와 내부에서 작동하는 비인간적 힘들에 대한 세련된, 끈기 있는, 감각적인 세심함이다. 나는 사물들과 그것들의 정동들에 대한 세심함을 일으키는 방법을 생태철학자들과 생태여성주의 철학자들인 로먼드 콜즈, 밸 플럼우드, 웨이드 시코르스키, 프레야 매튜스, 웬델 베리, 앵거스 플레처, 베리 로페즈, 그리고 바바라 킹솔버뿐 아니라 소로, 프란츠 카프카, 그리고 휘트먼으로부터 배우려고 노력했다. 이런 대항문화적 종류의 지각을 숙달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마치 수동적 객체들과 그것들의 법칙지배적 메커니즘들을 대면하는 능동적인 인간 주체들로만 이루어진 듯 보인다. 이런 외양은 (니체와 베르그송 각각이 나름의 방식으로 주장하듯이) 우리의 생존이 달려있는 행위지향적 지각에 필수불가결할지도 모르지만, (니체와 베르그송도 강조하듯이) 항상 이런 허구적 삶를 사는 것은 위험하고 반생산적이며, 또한 그것은 "더 녹색의" 감성 형성에 이바지하지도 않는다.
이런 과업에 대해, 비판 이론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행인 탈신화화 이론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자제하며 사용해야 하는데, 탈신화화는 무엇이든 어떤 사건이나 과정의 핵심에 사물들로 부당하게 투사된 인간의 행위주체성이 놓여 있다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의심의 해석학은 이론가들로 하여금 비인간적 행위주체성의 그릇된 외양 아래에 놓인 은밀한 진실(인간의 권력 의지)의 징조에 대해 몹시 경계하기를 요구한다. 칼 마르크스는, 상품이 인간들에 속하는 행위주체성을 부여받는다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상품을 탈신화화하여 그것의 물신화를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부시 치하의 애국적 미국인들은 "테러와의 전지구적 전쟁"이나 전직 검찰총장 알베르토 곤잘레스 판 법치 내에서 이기심, 탐욕, 또는 잔인함을 드러냈다. 여성주의 이론가 웬디 브라운이 "우리를 각성시켜", "관용의 담론이...다만...자유주의적 사유와 실천의 편익을 확대하는 체하면서...서양을 [높게 평가하고] 나머지를 타자화한다"는 점을 밝히겠다고 약속할 때, 그녀는 탈신화화를 수행한다.
탈신화화는, 관리들이 (덜 부당한 판본들의) 법치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고, (인종적, 문명적, 종교적, 성별적, 계급적) 지배 체계를 부과하려는 시도들을 감시하려고 애쓰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정치에서 필수불가결한 도구이다. 그렇지만 그것의 정치적 효험에는 한계가 있는데, 예를 들면, 불법성, 탐욕, 거짓말, 과두정, 또는 위선의 폭로가 믿음직하게 도덕적 분노를 산출하지 않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분노가 행위 개선을 촉발하기도 하거나 촉발하지 않기도 한다. 또한 브라운은, 자유주의적 관용의 "그릇된 자만"의 폭로가 자유주의자들의 제국 추구에 대한 "정당화"를 약화시킬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제국에 대한 "동기부여"를 반드시 약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게다가 인간들의 입장에서 윤리적 정치 행위는 현존하는 제도에 대한 주의 깊은 비판뿐 아니라, 유토피아적이라도, 실정적인 대안들을 필요로 하는 듯 보인다. 탈신화화의 다른 한 옹호자인 조디 딘은 이런 문제점을 인정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현재를 평가하고, 비판하고, 또는 탈신화화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성취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탈신화화를 향한 집요한 접근은 실정적 구성들의 가능성에 불리하게 작동한다. 프랑소와 미테랑 정부에 관한 한 논의에서 푸코는 탈신화화에 의존하는 자신의 이전 경향과 결별하여 성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개혁을 제시한다. "나는 오랜 동안 내 태도였지만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 이렇게 말하는 것―우리 문제는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법률 및 개혁 조치들과 잘 지내게 내버려 두라―으로 구성되는 태도에 오히려 짜증이 나게 되었다. 그것은 내게 바른 태도인 듯 보이지 않는다." 다시 핵심은 비판과 대안들―그것들 자체가 이후의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될 대안들―의 실정적 구성 둘 다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탈신화화가 드러내는 것은 항상 인간적인 것, 예를 들면, 몇몇 인간들의 다른 인간들에 대한 숨겨진 지배 추구, 끼친 해악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고 싶은 인간적 욕망, 또는 (인간) 권력의 부당한 분배이다. 탈신화화는 물질의 활력을 시야에서 가려 정치적 행위주체성을 인간적 행위주체성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것들이 내가 반대하는 경향들이다.
비인격적 정동의 현존을 탐지할 수 있는 역량은 그것에 휘말리기를 요구한다. 최소한 잠깐 동안 의심을 중지하고 더 자유롭게 처신할 필요가 있다. 저 바깥에 있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거의 확실히 그것의 대부분을 놓칠 것이다.
유물론들
몇 년 전에 나는 한 친구에게 소로의 야생 개념은 들뢰즈의 가상계 관념과 푸코의 비사유 개념과 흥미롭게 연관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세 사상가 모두, 전적으로 실재하고 강력하지만, 본질적으로 표상할 수 없는 힘을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친구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가 "유물론적 시각"을 결여했기 때문에 자신은 그것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응대했다. 그 당시에 나는 이 응대를 그 친구가 마르크스에 의해 고무된 평등주의적 정치를 신봉하고 있다는 점을 내게 알리는 방식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논평은 달라붙었고, 결국 그것은 이런 사유들을 불러 일으켰다. 왜 "신체와 쾌락"에 대한 푸코의 관심이나 "기계적 조립체"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흥미는 유물론적이라고 간주되지 않았던 것인가? 어떻게 마르크스의 물질성 개념―다른 많은 사건들을 불러 일으키는 경제 구조와 교환으로서의 물질성―이 유물론적 시각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는가? 물질성에 관한 경쟁하는 철학들 사이에 또는 물질성이 어떻게 정치에 중요한지에 관한 경쟁하는 설명들 사이에 더 강건한 논쟁이 왜 없는가?
얼마 동안 정치 이론은 물질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해 왔다. 그러나 이 물질성은 가장 흔히 인간의 사회적 구조들이나 그것들과 다른 객체들에 "묻어 들어가 있는" 인간적 의미들을 가리킨다. 정치 자체가 흔히 전적으로 인간적인 영역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 기록되는 바는 인간 행위에 대한 일련의 물질적 제약이나 맥락이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완고한 저항이 내가 추구하는 생기적 유물론과 이런 종류의 사적 유물론 사이의 주요한 차이일 것이다. 나는 인간 언어와 사유에 관한 자기도취적 반성에 대항하려고 시도하며 (자연, 인간 신체, 그리고 인간의 인공물들에서 작동하는) 비인간적 힘들의 행위주체적 기여를 강조하고, 심지어 과도하게 강조할 것이다. 세계를 관장하고 있다는 인간들의 자기도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인간형상주의―인간적 행위주체성이 비인간적 자연 속에 얼마간 반영되어 있다는 관념―를 계발할 필요가 있다.
1장 "사물들의 힘"에서 나는 생기적 유물론의 어휘에 속하는 두 술어―사물-힘(thing-power)과 외-부(pot-side)―를 탐구한다. 사물-힘은 일반적인 인공 제품들이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넘어서서 독립성이나 활기의 흔적을 표명할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을 나타내는데,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경험의 외부를 구성한다. 나는 발견된 객체들(내 사례들은 거리의 잡동사니, 카프카 소설 속의 인형, 범죄 수사에 사용되는 기술 장치에서 비롯된다)이 어떻게 그것들 나름의 어떤 효과―아마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불러 일으키는 말, 이미지, 그리고 느낌들로부터 작지만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정도로 독립된―를 지닌 활기찬 사물들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나는 이것을 전에는 대상으로 알려진 사물의 물질성에 고유한 활기로 제시한다. 이것은 한 가지 메타질문을 제기한다. 이런 활기를 이론화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또는 그것은 (아도르노가 말하듯이) 덧없을 뿐 아니라 포괄적 지식에 대한 오만한 인간 의지와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폭력적인 인간 의지와 결부된 탐구인 것인가? 그의 비판에 비추어, 그리고 <<부정변증법>>에서 시도한 "객체의 우위를 향해 더듬어 나아가려는" 아도르노 자신의 노력을 고려하여, 나는 생기적 유물론이라는 "소박한" 야심을 옹호한다.
사물-힘이라는 개념은 비인간적 세계를 마주치는 한 방식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또한 그것은 (최소한) 두 가지 문제점을 나타내는데, 첫째, 그것은 안정되거나 고정된 존재자들(사물들)의 활력에만 주목하며, 둘째, 그것은 (비록 개체들이 인간들은 아닐지라도) 너무 개체주의적인 견지에서 이 활력을 제시한다. 2장 "조립체들의 행위주체성"에서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로부터 차용한 "조립체(아상블라쥬)" 개념을 통해 물질적 행위주체성의 그림을 풍성하게 만든다. 행위주체성의 소재는 항상 인간-비인간 작업 집단이다. 나는 개별적 사물의 활력에서 이질적인 집단들을 통합하거나 형성하려는 물질의 경향이라는 (스피노자주의적) 기능으로서의 활력으로 이동한다. 그 다음에 나는 전력망 사례를 통해 인간-비인간 조립체들의 행위주체성을 탐구하는데, 북아메리카의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친 2003년의 정전 사태에 초점을 맞춘다.
3장 "식용 물질"에서는 음식에 초점을 맞추어 실험을 계속한다. 비만, 최근의 음식 글쓰기, 그리고 식사 문제에 관한 소로와 니체에 의해 구성된 관념들에 대한 연구에 기대어, 기분, 성향, 그리고 결정들에 영향를 미치며 인류 속에서 그리고 인류와 함께 작동하는 행위소로서의 식용 물질을 위한 변론을 제시한다. 여기서 나는 뒷장들에서 개발되는, 본질적으로 불순한 인간-비인간 조립체로서의 자기 개념을 옹호하기 시작한다. 또한 나는 내가 물질에서 상정하는 활력은 비물질적 원천, 생기를 불어 넣는 정령 또는 "영혼"에 가장 잘 귀속시킬 수 있다는 대안적 관점을 고려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피한다.
4장 "금속의 삶"에서는 "하나의 삶"이라는 개념을 통해 계속해서 생명/물질 대립쌍을 갉아먹는다. 나는 물질을 본질적으로 활기가 있는(그러나 영혼이 깃들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비기계주의적) 유물론을 위한 단단한 사례―무기 물질의 사례―를 계속 언급한다. 내 사례는 금속이다. 금속―일반적으로 견고하고 생기 없는 실체의 화신―이 활기찬 물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나는 아이스퀼로스의 프로메테우스를 암석에 결박한 "단단한 사슬"을 과학사가 시릴 스미스에 의해 서술된 다결정 금속과 비교한다.
하나의 신조로서 생기적 유물론은 물활론, 낭만주의적 자연 추구, 그리고 생기론을 포함하는 여러 비근대적(그리고 흔히 불신받는) 사유 양태들과 유사한 점들이 있다. 나는 이런 유사점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수용하고, 어떤 것들은 수용하지 않는다. 나는 고전 생기론을 특징짓는 생명/물질 대립쌍을 거부한다. 5장과 6장에서 나는, 특히 자연과학과 생명공학의 발전이 유기와 무기, 생명과 물질 사이의 선을 점점 더 문제적으로 만들고 있음에도 이 분할이 왜 그토록 지속되었으며 그렇게 강경하게 옹호되었는지 묻는다. 5장 "기계주의도 아니고 생기론도 아니다"에서 나는 물질 속 "활력"의 이름을 짓고자 한 세 가지 매력적인 시도―임마누엘 칸트의 빌둥스트리프(Bildungstrieb, 조형 충동), 발생학자 드리쉬의 엔텔레키(entelechy), 그리고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elan vital, 생명의 약동)―에 초점을 맞춘다. 드리쉬와 베르그송은 둘 다 철학에 당대의 과학을 주입하려고 노력했으며, 둘 다 기계주의적 자연 모형들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내게 그들의 생기론들은 매우 소중한 현상 유지 조치를 구성했으며, 활기찬 물질성의 철학이 채울 수 있을 열린 공간을 유지했다.
6장 "줄기세포와 생명 문화"에서는 부시 행정부의 마지막 임기 동안 배아 줄기세포에 관한 정치적 논쟁들에서 표현된 "생명 문화"를 지지하는 조지 W. 부시와 다른 복음주의적 옹호자들의 현대 생기론을 탐구한다. 나는 줄기세포의 만능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 세포들을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본원적 분할의 한 쪽에 위치시키려는 생명 문화 옹호자들의 노력에 저항한다.
7장 "정치생태학들"은 생각하고 글을 쓰기가 가장 어려웠는데, 그곳에서 나는 생기적 유물론이라는 형이상학(자연학)과 정치 이론 사이의 만남을 주선하기 때문이다. 나는 활기찬 물질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공적인 것", "정치 참여", 그리고 "정치적인 것"을 포함하는 정치 이론의 여러 핵심 개념들에서 울려 퍼질 수 있는지 탐구한다. 나는 활기찬 물질의 또 하나의 사례, 다윈에 의해 연구된 독창적인 벌레들에 관한 논의로 시작한다. 다윈은 벌레들을 자연뿐 아니라 역사에서 작동하는 행위소로 취급한다. "벌레들은 세상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다윈의 인간형상화가 자극이 되어 나는 정치체 자체가 일종의 생태계가 아닐까하는 역의 변론을 고려하게 된다. 나는 그런 착상을 옹호하기 위해 공적인 것을 문제의 창발적 효과로서 간주하는 존 듀이의 모형을 사용한다(그리고 연장한다). 그렇지만 나는 랑시에르에 의해 제기된 그것에 대한 반대도 고려하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이해가능한 체제의 외부에서 비롯되는 불화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정치를 전적으로 인간적 노력의 독특한 영역으로도 모형화한다. 나는 정치생태학으로서의 정치에 관한 정의와 해악에 대한 공유된 경험에 의해 탄생하게 되는 인간-비인간 집합체로서의 공중 개념을 승인하면서 7장을 끝맺는다. 나는 이 공중이 랑시에르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으로 지명하는 "분열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 "활력과 이기심"에서는 생태철학과 생기적 유물론 사이의 다양한 연결들을 함께 모은다. 활기찬 물질로서의 우리 자신들에 관한 경험을 계발하기 위한 몇 가지 전략들은 무엇인가? 그 과업은 이 매혹적이고 위험한 물질-에너지를 효과적으로 그리고 지속가능하게 사로잡는 방법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번역: 김효진
출처 : Daum블로그 [사물의 풍경]
'영화,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 영화들 (0) | 2019.12.25 |
---|---|
경계선 Border, Gräns (0) | 2019.02.22 |
2014영화 - 보고 싶은데 아직 못본 작품들 (0) | 2014.12.28 |
2014 영화 - (기대에 비해) 실망스러웠던 작품들 (0) | 2014.12.28 |
2014 영화 - 그럭저럭 볼만했던 작품들 (0) | 2014.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