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름 인상적이었던 작품들
(국내 개봉 미개봉 모두 포함, 차례는 제작 혹은 개봉일 순이며 평가순이 아님. 제목(제작년도) [감독] 배우들 순으로 표기)
-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2005)
[자크 오디아르] 로맹 뒤리스, 닐스 아르스트럽, 오레 아티카, 린 당 팜, 조나단 자카이
피에 물든 손으로 건반을 더듬는다. 폭력과 음악, 양립불가능해 보이는 두 욕망의 아슬한 줄타기가 흥미롭다.
올해, 뒤늦게 발견한 감독이라 해도 좋을 [자크 오디아르]의 좀 묵은 영화인데, 제임스 토백 감독 하비 케이텔 주연 [핑거스]의 리메이크라 한다.
요즘 잘나가는 로맹 뒤리스나 [예언자]의 닐스 아르스트럽을 다시 보아 반가웠고, 기억 가물거리는 린당팜은 첨에 동아시아 출신 유명 피아니스트 아닐까 착각할만큼 자연스런 연기다.
[예언자]의 전작이라 만듦새가 좀 투박하지만, 한편으론 전개의 거친 결이 느껴져서 좋다.
감독의 최근작인 [러스트 앤 본] 역시 수작인데, 한결 매끈해진 대신 강렬한 맛은 덜하다.
- 카를로스(2010)
[올리비에 아사야스]에드가 라미레즈, 알렉산더 슈어, 노라 폰 발트슈테덴
지난 세기말, 냉전체제는 해체되고 카를로스는 사라졌다. 국제사회주의자를 자칭하던 테러청부업자들도 사라졌다. 국제정치 지형이 격변하면서 시장이 바뀌었다. 피아의 구별이 뒤틀리고 전선은 교란되었다. 낭만적 혁명주의자의 자리를 종교적 급진조직과 익명의 전사들이 대체했다.
세상은 얼마나 더 안전해졌을까?
다른 영화들을 통해 ‘자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20세기 테러리스트 카를로스(본명은 일리치)의 전기 영화다. 3부작 5시간이 넘는 대작이다.
데뷔 후 뛰어난 두뇌와 대담한 실행력으로 스타급 대접을 받던 화려한 시절을 거쳐 볼품없이 몰락하기까지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그가 저질렀거나 관련된 유명 테러사건들을 지난 세기 역사 속에서 반추해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좌절된 급진혁명운동이 팔레스타인 무장투쟁조직과 만나 한 시대를 풍미하는 소영웅주의적 테러리즘으로 개화, 한껏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냉전 해체와 함께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거침없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첨 보는 배우들의 연기가 좋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연출도 훌륭하다.
감독의 이전작 [여름의 조각들](2008)에서 보여준 밀도있는 이야기 세공력은 상당히 놀라웠는데, [카를로스] 역시 선정적인 관점을 피해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흥미를 떨어뜨리지 않고 차분히 밀고가는 저력을 보여준다. 5시간 이상 처지는 대목이 전혀 없다.
지금 상영중인 그의 작품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현재 가장 보고 싶은 영화다.
- 디스커넥트(2012)
[헨리 알렉스 루빈]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폴라 패튼, 제이슨 베이트먼,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호프 데이비스, 맥스 티에리엇, 콜린 포드, 미카엘 뉘크비스트
현대적 삶의 보편양식이 된 SNS, 무책임하고 편의적인 그 소통방식의 허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희비극.
가볍게 툭툭 던지듯 얘기를 풀어놓으며 서서히 핵심을 파고드는 연출, 무관하지만 동떨어지지 않은 이야기를 오가며 파국을 향해 수렴케 하는 교차편집 솜씨가 능란하다. 낯익은 기교지만 꽤 설득력 있고 깔끔하다. 비슷한 스타일의 수작인 소더버그 감독의 [트래픽]을 연상시킨다.
다만 억지춘향 해피엔딩은 싹 잘라내고 싶다.
- 로렌스 애니웨이(2012)
[자비에 돌란] 멜빌 푸포, 쉬잔느 클레몽, 나탈리 베이, 모니아 초크리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는 아름다운 영화.
‘조숙한 천재’는 자비에 돌란 감독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89년생이니, 만23살에 만든 세 번째 장편영화다. 그래서인가, 범람하는 색채와 화려한 의상, 치기나 허세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이미지의 향연이 그의 영화에선 별로 어색하지 않다. 탐닉하는 젊음의 빛, 분수처럼 펼쳐지며 범람하는 순수한 현재.
바로 그 때문에 이 영화는 호불호가 나뉠 듯하고, 나 또한 취향이 아니란 이유로 best 범주에 넣질 않았다. 누군가의 취향은 best of best로 꼽기도 할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상찬할 만하다. 남녀 2역을 소화하는 멜빌 푸포는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고, 연인 역의 쉬잔느 클레몽도 눈길을 떼기 힘들다. 시니컬한 엄마 역의 나탈리 베이도 good.
참고로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전해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참 프랑스다운 이야기다.
- 인사이드 르윈(2013)
[에단&조엘 코엔] 오스카 아이삭, 캐리 멀리건, 저스틴 팀브레이크
코엔 형제의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아름다운 영화.
끝까지 작렬하지 않는 담백한 연출이 돋보인다. 그런데 좀 심심하다. 코엔 형제의 영화를 많이 보아온 터라 별 새로울 것은 없다는 느낌.
물론 이런 좋은 영화에 감흥이 일지 않는 건 순전히 내 취향 탓일 터.
저스틴 팀브레이크란 배우, 유명한 스타음악가라는데 연기는 그럭저럭이다. 캐리 멀리건은 여전히 뛰어난 연기력에다 귀엽고 이쁘다.
-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2012)
[스콧 맥기히, 데이빗 시겔]줄리안 무어, 오나타 에이프릴,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스티브 쿠건, 조애나 밴더햄
이 영화가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여섯살 메이지 역의 오나타 에이프릴의 인상이 워낙 강하기 때문.
영화 자체도 훌륭하다. 나름 공들인 이야기가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저(2014) 3.26
[조&앤소니 루소] 크리스 에반스, 스칼렛 요한슨, 사무엘 잭슨, 로버트 레드포드
이 뻔뻔하고 유치한 제목이라니! 때문에 보기를 적잖이 망설이게 되는 영화.
물론 만화(그래픽 노블)가 원작인 아메리카 태생의 대부분 히어로물들은, 그 대책없는 허세와 유치한 맛에 욕하면서도 보게 되지만, 대놓고 대장 아메리카를 광고하는 이같은 경우는 좀 지랄맞다. 그런데...
막상 영화내용은 그 뻔뻔함을 도마에 올려놓고 스스로가 자초한 상황을 곱씹어보는 듯한 쪽이다. 요즘의 맨맨 히어로물들, 언제부턴가 출생의 비밀을 궁금해하거나 자기정체성을 고민하며 배꼽 들여다보는 게 유행인 모양이다. 뭐 그렇다고 끝까지 가거나 다 갈아엎는 건 아닌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마무리한다.
어쨌건 히어로 집단의 자중지란을 거침없는 SF활극 버전으로 보는 재미는 아주 쏠쏠하다.
이런 (단독이건 떼거리건) 히어로물들은 시리즈를 이어서 보면 좋다. 장편만화 보는 맛이 제대로 살아난다.
참고로, 캡틴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전편[퍼스트 어벤져]은 꽤 실속있는 전쟁물이기도 하다.
- 천주정(2013)
[지아 장커] 강무, 왕보강, 자오 타오, 나람산, 지아 장커
[스틸 라이프]를 보고 받았던 신선한 충격의 느낌이 아직 생생한데, 차분하고 서늘하게 깊이 파고들던 응시를 그 감독이 내려놓았다.
출구없는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분출한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냉혹한 피의 절편들이나 코맥 매카시의 소설 원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카운슬러] 같은 영화가 떠오른다.
폭력에 탐닉하는 그대들, 폭력의 극한을 보여주랴? 니 사는 세상의 맨얼굴을 보여주랴? 하듯이.
지금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똑바로 지켜보며 시시비비하거나 훈수 따위나 할 시기는 지났다는 걸까? 장르를 넘나드는 퓨전 무협활극은, 이만하면 제법 볼만한 영화가 되겠냐며 다그치는데, 답은 더욱 요원해진다. 더 풍성한 볼거리는 얻었지만 메아리는 더 공허해졌다.
영화 작풍의 변화를 중국 현실의 변화와 연관짓는 건 무리일 수도 있다. 그냥 감독 개인의 변모쯤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래서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 님포마니악 vol.1,2 (2013)
[라스 폰 트리에] 샬롯 갱스부르, 스텔란 스카스가드, 스테이시 마틴, 샤이아 라보프, 크리스찬 슬레이터, 우마 서먼, 윌렘 데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는 늘 세상의 모든 견고한 것들을 향해 메스를 휘두르거나 총구를 들이댄다. 그게 제도이건 관념이건 가차없이 부수고 무너뜨려 그 바닥을 들여다보거나 까발린다. 그 극단성에선 비슷한 부류를 찾기조차 힘들 정도다. 인간 내면에 도사린 기이하고 뒤틀린 욕망을 끄집어내는데 일가견 있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조차 그의 과격함에 비하면 공손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는, 영화를 통해 모종의 극단주의나 허무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볼때마다 고소苦笑를 금치 못한다. 멀리 갈 바 없이 [안티 크라이스트]가 그랬고 [멜랑콜리아]가 그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좀 다른 점이 있었다. 대체 이 영화를 끝까지 봐낼 수 있을까... 염려하며 쓰게 웃고 있었다는 것. 늙었나부다.
섹스중독자 여성의 편력기라 할 이 영화는 전작들에 비해 그닥 세지 않다. 오히려 꽤 웃기는 편이다. 좀 지루한 구석마저 있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도 보여줄수 없는 그만의 그 통렬함이 있기에.
- 고질라(2014)
[가렛 에드워즈] 애론 테일러 존슨, 엘리자베스 올슨, 브라이언 크래스틴, 줄리엣 비노쉬, 와타나베 켄, 데이빗 스트라탄
요즘 원전 설계도 유출로 좀 시끄러운데, 바로 그 원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영화다.
핵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전개되는 전반부도 좋고 두 괴수의 정체가 전혀 다르다는 따위의 설정도 그럴 듯하지만,
다이내믹하기보단 신비롭고 안정된 톤으로 회화적인 느낌을 풍기는 영상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영화다(극장에서 본 이유). 전투기들이 하늘에서 툭툭 떨어지는 대목이나 특수부대원의 공중 하강 장면은, 묵시록적인 묘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며 비주얼의 향연 [에반게리온]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야기에서 특히 곱씹을만한 대목은 없다. 단순한 줄거리에 대사도 단순하다.
다만 무토=無道란 괴수 이름이 재밌고, 인간과 괴수의 대립이 아니라 괴수 대 괴수란 설정이 흥미롭다. 그들은 신과 악마 혹은 생태학적 대자연과 기술문명이 빚은 괴물의 이미지로 대립하는데, 일본원작을 유럽출신 감독이 각색한 결과물로 보인다. 어쨌든 인간이 들러리가 되는 그런 대립구도는 심형래의 [D-워]를 연상시키는 점이 있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98년작 [고질라]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잘 만들었다. 원작에 충실한 리메이크라기에 원작(54년, 혼다 이시로 감독)도 구해서 보니, 그 역시 상당한 수작이었다. 가렛 에드워즈 감독의 전작으로 [몬스터즈]란 저예산 영화가 있는데, 괴수물의 틀을 빌어 탁월한 감각과 예리한 안목으로 설득력 있는 현실비판을 담아낸 작품이다.
- 인간중독(2014)
[김대우] 송승헌, 임지연, 조여정, 온주완
탐닉, 혹은 죽음에까지 이르는 지독한 사랑.
나중에야 안다, 그게 중독이었음을.
그 곳은 서로 대립하던 생生과 사死의 열망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
[음란서생] [방자전]등을 연출한 김대우 감독은 풍자성 강한 시대극을 현대적 감각으로 빚어내는 데 능란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선 시대와 캐릭터가 밀착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 충분한 개연성을 가진 꽤 괜찮은 설정의 엔딩이었음에도 좀 뜨악해 보였던 건 그래서일 터. 일종의 반전이자 대미인 그 대목이 겉도는 느낌이었다는 건 멜로영화로선 상당한 핸디캡이라 여겨진다. 근래 드문 개성있는 멜로였지만 감성의 밀도는 뒤로 갈수록 희박해지더라는 느낌.
임지연이란 배우, 매우 인상적이다.
- 트랜샌던스(2014)
[윌리 피스터] 조니 뎁, 레베카 홀, 모건 프리먼, 폴 베타니, 킬리언 머피
강렬한 한방 같은 건 없지만, 애초의 발상을 선정적이지 않게 차분하게 잘 풀어낸 듯.
뤽 베송의 [루시]가 성급하게 발상만 나열하며 헐떡대다가 피칠갑 홍수 속에 익사해버린 점과 비교하면 이 영화의 장점이 돋보인다.
비주얼도 좋다. 다시보고 싶을만큼.
다만, 크리스토퍼 놀란이 제작자였다는 사실이 기대치를 높였던 측면이 있는데, 그의 [인터스텔라]를 보고 난 지금은 그 기대치가 거의 무의미해 보인다.
이 영화에 대한 별도의 소감이 있었으므로 장황한 언급은 생략.
-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
[브라이언 싱어] 휴 잭맨, 제임스 맥어보이, 마이클 파스밴더, 패트릭 스튜어트, 이안 맥컬런, 제니퍼 로렌스, 할리 베리, 엘렌 페이지, 니콜라스 홀트, 판빙빙, 안나 파킨, 팜케 얀센
새천년이 열리던 그 해, 평범한 다수 대중에게 위협받는 ‘초능력을 가진 소수’란 발상에 입각한 SF물이 출시되었다. 관객들은 기존의 히어로물과 전혀 다른 21세기형 SF물의 등장을 알아차리고 경탄하며 반겼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야기는 진화하지 못했고, 초능력자들은 다수 대중들과 다를 바 없이 어금버금한 쌈질에만 골몰했다.
이후 십수년, 진화 없는 세상은 결국 지난 세기의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그간 깨우친 게 있다면, 이야기가 진화하는 게 아니라 안목이 진화한다는 것. 제대로 된 안목이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 그래서 다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다.
다수 범속한 대중의 냉전시대를 비집고 들어가 해석의 지평을 넓힌다. 초능력은 그저 수퍼파워가 아니다. 멀잖은 과거, 황당할 수 없는 시대극을 배경으로 제법 치밀한 초능력자들의 성장사가 이어진다. 그건 요즘 유행하는 서사의 경향이기도 하다.
오랜 자뻑의 꿈에서 깨어나기.
엑스맨 시리즈 역시 장편만화처럼 이어보는 재미가 괜찮은 연속물이다. 캐릭터와 갈등이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인다.
- 도희야(2014)
[정주리] 배두나, 김새론, 송새벽, 김진구
불편하지만 궁금한 현실, 그리고 그 이후의 근황.
일단 시나리오가 좋은 듯. 언제 어디서나 작동하는 세상의 미시권력 관계, 거기 길들여지기.
출구는 있을까?
차분한 연출은 다양한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들을 거칠거나 단조롭지 풀어버리지 않고 무척 사실적으로 다루어 살려낸다. 여기에 좋은 연기가 뒷받침되니 캐릭터가 잘 살아난다. 좋은 영화 만나 기분좋게 보면서도 끝내 조금 불편하다. 이 영화의 힘이다.
영어제목이 띈다. A Girl at My Door.
출구를 묻던 질문을 거둔다. 손 내밀면 그게 시작일 터이니.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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