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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트랜샌던스 - 몸없는 신의 가면

by 숲길로 2014. 5. 17.

 

 

 

제목 : 트랜센던스(2014)

감독 : 윌리 피터스

출연 : 조니 뎁, 레베카 홀, 모건 프리먼, 폴 베타니, 킬리언 머피

 

 

 (스포일러 엄청 많으니 영화 보실 분은 읽지 마세용~)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마음이 무엇입니까?”

스승이 답했다. “어디 그 마음을 내놓아 보아라.”

인공지능(AI) 핀과 태거 박사(모건 프리먼)가 첫대면에서 나누는 대화는 저 선문답을 연상케 한다.

박사의 물음은 ‘기계인 네게 의식이 있느냐?’ 라는 상투적인 것이었지만, 영화는 대답 대신 그 물음을 좀 더 멀리 끌고 간다. 물음의 바탕에 깔린 불안과 두려움, 희망과 꿈을 들추어내며, (마음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들이 가 닿는 저마다의 천국과 지옥을 보여준다.

장황한 대사와 유려한 이미지로 펼쳐놓는 그 풍경, 아름답고 기이하다.  

 

 

테크놀러지(과학기술)는 현대의 종교다. 영화는 그 점을 노골적으로 부각하며, 활짝 피어난 - 구체적으로 인공지능과 인터넷의 융합으로 성취한 나노기술의 전면전개 - 테크놀러지가 전지전능한 신의 얼굴로 다가올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 묻는다. 마음에 관한 저 선문답 또한 그 물음이 던져진 곳에서 더불어 피고진다.

트랜센던스(초월)이란 제목이 흥미롭다. 영화에서 그것은, AI와 융합한 인간 두뇌가 나노기술로 세계의 신기원을 개시한다는 뜻이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의식의 지향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음의 모습이며, 마음을 넘어서는 마음이다. AI에게 던진 ‘의식이 있느냐’는 물음이나, AI에 업로드된 윌(조니 뎁)을 향해 던지는 ‘넌 누구냐’ 에 대한 답은 (제목에) 이미 주어져 있었던 셈이다.

 

과학기술의 힘으로 현현한 신적 존재 앞에서 그들은 묻고 의심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혹은 ‘당신에게 마음이 있는가?’

의심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몸으로 온 신, 예수를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았다.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워쇼스키 형제(이제 남매?)가 감독한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그들은 네오가 ‘그’인지 줄곧 의심한다. 윌이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다.

지금 여기 현현한 저것이 과연 신일수 있는가? 신의 얼굴을 한 기계(=전통적 의미의 악령) 아닌가?

기독의 신은 인간으로 죽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신적 위상을 인정받았다.

없음(不在)의 방식으로만 영접되는 신. 왜 그럴까?

그게 안전하다는 걸까? 아니면 신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 빈 자리에 인간 스스로 만든 신을 놓겠다는 걸까?

 

의심하는 그들에게, 전지전능하며 모든 곳에 편재하는 윌은 기꺼이 답하고 베풀어 보여준다. AI가 인간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여기거나 그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연대하여 그에게 맞서지만 그의 대답은 끝내 사랑이다.

핍박해오는 인간들에 대한 그의 마지막 대응은 십자가를 선택하는 예수의 희생과 닮았다. 피흘리는 에블린(레베카 홀)을 안고 있는 모습도 영락없는 피에타이다(외에도 예수 이미지는 도처에 노골적으로 출몰한다. 불구의 치유와 부활 등등..).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윌의 품에서 그와 하나가 된 에블린은 말한다.

‘모든 것이 다 보인다’고. 신의 안목이다.

 

 

 

다시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누구이며, 그에게 인간의 마음이 있는가?’

영화를 일관하는 동력이 되는 이 질문이 영화의 말미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사실 저 물음은 애초부터 우문愚問이다. 시시각각 진화하는 존재 앞에 들이대는 완고한 망상일 뿐이다.

진실은 가혹하다. 물음은 바뀌어야 한다.

전지전능한 그와 더불어 거듭날 것인가 말 것인가? 혹은 진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과학기술이 현대의 종교란 건 수사가 아니다. 말 그대로의 진실이다. 진화(혹은 문명진보)는 개종이나 회심과 다르지 않는, 믿음의 문제다.

 

갈 데까지 가버린 현생인류 문명의 양태에 넌더리를 내거나, 불완전한 개체의 한계를 넘어 연대의식 충만한 신인류로 진화한다는 설정 자체는 낯설지 않다. (본지 오래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68세대에 대한 환멸로, 인류를 무성생식하는 유기체로 진화시켜버리는 미셀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가 던진 문제의식과 충격도 바로 저거였을 게다.

기이한 진화론이지만, 사실 그 원조는 성서의 ‘소돔과 고모라’나 ‘노아’ 아닐까 싶다. 그것은 불량품으로 판명된 대다수 피조물을 정리하고 우량품종 일부만 추려 다시 번성시키겠다는 제노사이드 우생학이다. (뜬금없는 얘기일지 모르나, 유대인을 말살하려 했던 히틀러 역시 그 해괴한 우생학의 뿌리가 유대인들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 성서임을 간파하고 비웃지 않았을까?).

다행히 이 영화는 현문명에 대한 혐오가 별로 도드라져 보이진 않는다. 윌(Will, 의지?) 이란 이름의 전능하신 분께선 분노하고 징벌하는 신이 아니다. 저능한 인류를 업그레이드하거나 오염된 세계를 되살리고 재구성하는 데 더 골몰하신다.

그의 존재가 던지는 물음은 단순하지만 답은 어렵다.

인간 개체들이 의식을 공유하며 ‘하나이면서 전부인’ 존재로 진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달리 말하면, 찌들고 오염된 지구에서 불완전하고 열등한 개체로 아등바등 살다 죽을 것인가,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의 지평에서 ‘서로 다른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 것인가?

(좀 안이해 보이는 결말부를 감안하더라도) 과학기술의 진보가 제기하는 문제를 종교적 선택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읽어낸 시각은 놀랍고 참신하다. 기존의 AI나 인터넷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보여준 다소 도식적인 윤리의식을 훌쩍 넘어선다.

 

영화 이미지들 - 예고편 캡처

AI에 반대하는 테러가 영화의 초반부를 끌고가는 힘이다.

현실에서 자주 보듯, 테러는 그들이 우려한 상황을 막거나 늦추는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촉진시키기도 한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자유'는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다.

탈육신하여 AI에 업로드되면서 광활한 인터넷 세계를 누비는 그의 자유가 있고,

AI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할 거라 여겨, 폭력으로라도 그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겠다는 이들도 있다.    

 

'모든 곳으로' 는 인터넷의 정신이기도 할 것이다. 

광활한 넷은 신적 존재의 물리적 실재이자 감각기관이다. 인터넷이 없다면 신의 편재(遍在)도 없다.   

 

사막 한가운데 외진 촌락이 과학기술 종교의 메카가 된다는 설정은 그럴듯하다.

모든 종교들이 그 초창기에는 세상의 박해를 피해 일시적인 고립과 단절이 필요했다. 그러나...

 

고립은 말 그대로 일시적이다. 인터넷을 통해 신의 지배는 세상도처에 미친다. 그는 어디에나 있다.

  

병들고 다친 이를 치료하는 전능자의 손길,

고통받는 이들과 더불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예수와 닮았다.

 

과학기술 종교의 기본 인프라인 발전시설.

[매트릭스]의 에너지원은 배양된 인간생체였지만, 윌의 에너지는 햇빛이다. 

유기체의 착취없는 세계. 나노기술이든 양자기술이든.. 

   

윌이 구현하려는 나노월드는 세상 만물이 서로 통하고 이어지는 연금술 세계다.

어디서 본 귀절인지 기억나지 않으나, '우리 몸의 기원은 우주먼지 한조각이다.'

이렇게 말해 놓으면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무기물과 유기체가 상통하는 마법같은 변신의 세계. 이렇게 말하면 왠지 섬뜩해진다.

여하튼, 윌이 꿈꾸는 세상의 끝에는 그러한 범신론적 우주가 있는 듯하다. 진정한 신적 비전일까? 

그럼에도 그건 한낱 인간이 꿈꾸던 미래가 아니라는 사실.

개벽이 오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일까, 개벽의 망상을 거절하는 신중한 현명함일까? 

 

영화의 백미, 슬로모션으로 이어지는 나노월드의  정경. 최고의 촬영감독 출신다운 연출이다. 

이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윌이 구축한 세상의 파괴와 (재)창조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어쩌면 끊임없이 세상을 부수고 짓는다는 힌두신화의 축도라 할만한, 아름답고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의 나노월드는 파괴가 불가능한, 파괴와 동시에 실시간 재생이 가능한 세계다.

그래서 섬뜩하다.  '불멸' 이란 단어가 머리를 스쳐간다. 

불멸은 신의 속성이다.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몸으로 불멸하는 자, 우리는 그들을 좀비라 부른다. 

누가 신이고 누가 좀비인가?

 

사랑은 늘 치명적인 무엇이다.

주인공들의 생사여탈권은 언제나 사랑이 쥐고 있다. 난 당신을 사랑하는데...

그러니 대체 어쩌란 건가? 

사랑이 마음이라 해도, 몸 없이는 마음도 없으니 사랑은 결국 몸의 굴레다.

예수의 몸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도 사랑이었다. 에블린이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사랑이고,

간신히 몸으로 부활한 윌이 다시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도 끝내 사랑이다. 

신의 사랑? 몸 없는 이의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몸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랑을 어떻게 믿으라고?

사랑은 불멸의 운명을 벗어나 미끄러져내린다. 사랑 앞에서 함부로 불멸자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내 곁에 없잖아' 

어서 몸을 내놓아보라는 저 투정이 신적 존재의 운명을 바꾼다.

'어디 네 사랑을 증명해 봐' 는 '네 필멸의 운명을 입증해 봐!' 란 뜻이다. 

그것이 언제나 사랑의 가혹한 명령이었다. 사랑하려면 죽어야 한다.  

마침내 이룬 죽음의 자리에서 사랑은(만!) 불멸한다.

 

종교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럴까..?

이 영화에서도 새삼 느낀 거지만, 인간은 다른 종교로 개종했을 따름이다. 스마트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초조해지는 현대인들은 이미 인터넷교, 테크놀러지교의 신도 아닌가? 적응과 수용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과학기술문명이 종교와 다를 바 없다는 거북한 진실.

윌과 에블린이 건설한 테크놀러지교 공동체 브라이트우드brightwood의 주민들이 때로 좀비처럼 보였듯이, 너도나도 스마트폰만 조물락거리고 있는 군상들 역시 누군가의 눈엔 좀비처럼 비치지 않을까?

테크놀러지교의 철학적 기반은 유물론이다. 그것은 근대산업자본주의 이래 불패의 이념이다. 영화의 후반부, 전지구적 스케일로 전개되며 구현되는 연금술같은 나노월드의 장대한 비주얼은 범신론적 꿈과 비전의 황홀로 가득하다.

아마 그 꿈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에블린은 그의 품에서 ‘모든 것이 다 보인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신적 비전이거나 진정한 초월자의 시선 아닌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연기緣起세계 속에서 삼라만상을 통찰하는 것.

그녀가 본 것 또한 그러했을까?

 

 

 

허나 바로 그 ‘모든 것을 보는’ 시선이 종교 특유의 매혹인 동시에 함정(혹은 덫)이 아닐까?

영화의 도입부, 투명하고 계시적으로 드러나는 세상이 아닌, 저마다 피고지는 꽃들... (꿈꾸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마당에 해피엔딩을 가장하려 애쓰는 티가 역력하여 그닥 설득력 없는) 그 장면은 결말부에 이르러 다시한번 되풀이된다.

피고지는 꽃들이 던지는, 마음에 대한 그 질문이 가닿는 자리는 끝내 정치적이다.

몸 없이 마음이 가능한가?

(불교적으로 말하면) 불가능하다. 영화에서처럼 의식을 통합하면 여러 몸의 감각경험은 하나의 마음으로 수렴할 것이다. 마음이 하나인데 몸이 여럿이라면 대체 그 몸은 무엇일까? 저마다의 고유한 마음이 없는 몸들, 그러나 ‘한마음’인 몸들.

‘한마음’이란 대목, 무척 낯익고 아름답게 들리지만 또한 섬뜩하고 기괴하지 않은가? 서로 사랑하는 이들조차 저마다의 마음이 천당과 지옥인데, 대체 ‘한마음’이라니... (그래서 '한마음'은 언제나 속내 감추려는 정치의 수사다).

 

‘너는 누구냐’, 는 질문을 다시 돌아본다.

'다양하면서 하나인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예수처럼) 개체인 동시에 전체인 것.

 ‘현대의 자아는 초월론적이 아니라 정체론적’이라고 한다. 초월하는 의식주체가 아니라 욕망을 표현하고 자기확인하는 몸주체다.

초월하는 의식조차 몸을 버리지 못한다. 욕망을 통해 자기동일성을 확보하는 몸이야말로 오히려 초월의 근거다.

빌릴 눈없고 손발없는 신 윌이 가능할까? 카메라나 센서 없는 AI 핀은 또 어떤가?

몸없는 윌은 엔지니어의 몸을 빌어 그녀를 안으려 한다. (그녀를) 갈망하는 윌..

다름아닌 그것이 마음이고 의식일 게다. 끝내 그는 제 몸으로 부활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부활했지만,  몸은 죽고 두뇌만 AI에 업로드되었던 윌은 원래 몸으로 부활한다. 그리고 순교하듯 다시 죽는다.

그의 신성을  비틀고 의심케 하듯,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이 기묘한 비대칭의 의미는 무엇일까?

 

개체를 버린 진화의 실상은 몸없는 좀비다(원격의식에 지배되는 좀비는 두뇌 없는 자가 아니라 제 몸이 없는 자다).

그가 잠시 빌렸던 그 몸들은 전지전능 유일 의식의 단말기로 작동하는 기관일 따름이었다.

‘모든 것을 본다’는 그 황홀한 전지적 시선은 다름아닌 신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의 눈(目)이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안전하지만 그것이 몸을 양도하고 얻은 유토피아라면...?   

 

 

 

테크놀러지는 종교다, 란 명제로 시작했는데 막상 정리해놓고 보니 무리하고 상투적인 단순화로 떨어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SF영화들의 근미래상이 종종 파시즘 체제인 것은 근거없는 설정이나 우연일까?

정의롭고 강력한 신적 존재가 통제하는 근심걱정 없는 세상.

이러한 테크놀러지교 공동체의 모습이 과연 인류가 꿈꾸는 미래상일까?

엉뚱한 얘기지만, 근래 흥행하는 역사극들에서도 정의롭고 강력한 군주를 꿈꾸는 작품들이 꽤 보인다.

이 무슨 퇴행일까? 민주주의 시대에 이래도 되는 걸까?

‘민주’를 전제하면, ‘정의롭고 강력하다’는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근대시민혁명이 왕을 내친 것은 그가 정의롭지 못해서라기보담 혼자 너무 많은 권력을 가졌기(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집중된 권력은 그 자체로 정의롭지 않다. 힘이 약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계몽군주의 심중을 헤아리려는 영화들,

그래서 못내 불편하다.

 

영화의 만듦새는 좀 뜻밖이다. 첨부터 한방 터뜨려놓고 팽팽한 긴장과 기름진 물량공세로 밀고가는 헐리웃 대작 스타일이 아니다. 마이너 혹은 B급스러운 스타일이다. 맘에 든다.

별 긴장없이 장황한 대사들에 몰두하기 좋은 전반부는 꽤 차분하다. 보기에 따라 지루할 수도 있겠다(역동적인 SF 기대하는 아동들에겐 인기없겠다). 후반부 들어 비주얼이 돋보이지만, 아주 다이내믹한 전개는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설득력 있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향연이다.

특히 윌이 표현하는 모호한 신적 위상의 이미지도 흥미롭고, 물水로 구현되는 나노월드의 이미지도 꽤 인상적이다. 물은 양면성을 지닌 신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물질이다. 그것은 품고 재생시키는 모성의 물질인 동시에, 분노하는 아비의 심판의 물질이기도 하다.

 

캐스팅에 돈은 많이 들었겠지만, 연기력 뛰어난 배역들도 맘에 든다.

언제 보아도 좋은 조니 뎁은 말할 것도 없고, 몇몇 씬만으로도 만만찮은 무게감 과시하는 모건 프리먼,

빼어난 비주얼의 호러물 [어웨이크닝]으로 눈길 사로잡았던 레베카 홀도 반가웠고,

기대보다 배역 비중이 약해 좀 실망스러웠던 킬리언 머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