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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2014 영화 - 아주 흥미롭게 본 작품들

by 숲길로 2014. 12. 23.

 2014년의  영화들

 

기억력 점점 떨어지니 돌아서면 잊게 된다. 좋은 점도 있지만 때로 불편하기도 하다.

굳어가는 머리 운동삼아 올해 본 영화들 중 인상적이었던 작품들을 정리해 본다. 주로 올해 개봉한 것들이지만 이전의 것이나 미개봉편도 있다.

오로지 주관적인 기준으로, 아주 흥미롭게 본 작품들, 나름 인상적이었던 작품들, 그럭저럭 볼만했던 작품들, (기대에 비해) 실망스러웠던 작품들, 보고 싶었으나 아직 못본 작품들, 로 나누어 간단소감을 덧붙여 본다(영화 내용 누설 많음).

참고로 각 항목 안에서의 차례는 개봉일순이며 평가순이 아니다. 또 제목(제작년도), [감독이름], 배우이름 순이다.

먼저

 

* 아주 흥미롭게 본 작품들

 

 

- 예언자(2009)

[자크 오디아르] 타하 라힘, 닐스 아르스트럽

 

 

굵고 투박한 듯한 필치로 천천히 또박또박, 끝까지 간다. 화려한 수상작답게

잘 통제된 응축과 폭발, 무시무시한 몰입으로 자크 오디아르의 각인을 절감케 하는 영화다.

비정한 폭력과 범죄의 이야기를 경탄할만한 불굴의 성취담으로 착시하게 하는 힘있는 연출.

타하 라힘과 닐스 아르스트럽의 연기 또한 놀랍다.

 

 

-카페 드 플로르(2011)

[장 마크 발레] 바네사 파라디, 케빈 파랑, 헬렌 플로렌트, 에블린 브로슈

 

 

짐짓 구리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숙명적 사랑 이야기가

스타일리쉬한 연출로 섬광을 뿜는다.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모든 배역들의 열연은 눈물처럼 보석처럼 반짝인다.

끝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랑(들). 

 

 

- 머드(2012)

[제프 니콜스] 매튜 매키너히, 타이 세리던, 제이콥 로플랜드, 마이클 새넌, 샘 세퍼드, 리즈 위더스푼

 

 

감독의 기이한 수작 [테이크 쉘터]보다 강렬한 맛은 덜하나 재미는 낫다.

미시시피의 삶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를 감독 자신은 샘 페킨파와 마크 트웨인의 만남으로 언급했지만, 전작을 기억하는 관객의 관점에선 [테이크 쉘터]의 불편함이나 그와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된다.

배우들의 호연 덕분에, 이 영화는 미국 남부문학 전통의 성장담을 스크린에 옮기는 수준을 넘어, 대지와의 결별을 불안해하는 시대착오적 사내들의 기묘한 사랑의 모험담처럼 보인다. [테이크 셀터]의 주인공의 불안 또한 그런 느낌이었다. 혹자는 그 영화가 현대인의 불안을 은유한다고 하지만 기실 그의 불안은 전혀 현대적이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당대 질서나 세계관과 불화하는 고집센 수컷의 불안과 더 닮아있었다(보다 근원적이고 현대적인 불안은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에너미]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재능있는 감독은 북유럽 출신의 또다른 귀재 니콜라스 빈딩 레픈을 연상시킨다. 빈딩 레픈의 주인공들 또한 그런 불화하고 투쟁하며 파국을 향해 가는 수컷들이다.

이 영화에서 매튜 매키너히가 열연한 ‘머드’란 캐릭터, 그 이름이 상징하듯 그의 사랑은 대지적이다. 광활한 대륙을 가로질러 흐르는 장강 미시시피는 대지에 속한 강이다. 그의 사랑은 쉽게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테이크 쉘터]의 주인공은 대지를 휩쓸며 엄습하는 토네이도를 상상하며 수혈竪穴을 판다. 토네이도에 대한 근거없는 불안과 머드의 기이한 자신감, 그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지켜야 할 것, 잃어버릴 것은 오직 그뿐이기에 그들은 확고하면서도 필사적이다. 그 확고한 믿음을 불안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테이크 쉘터]는 불안에 관한 영화인 동시에 요즘은 보기 드물어진 믿음에 관한 영화다. [머드]는 그 믿음을 한결 부각시키며 성장담을 통해 전승하려 한다. 영원한 수컷들의 땅, 미시시피가 흐르는 미국 남부에서.

 

 

-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

[아쉬가르 파르하디] 베레니스 베조, 타하 라힘, 알리 모사파, 폴린느 뷔르레, 엘리 아귀

 

 

감독의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이후에 펼쳐지는 또다른 이야기같다.

감정의 섬세한 결과 파장을 민감하게 포착하며 촘촘하게 짜나가는 이야기의 힘,

표정과 몸놀림 하나하나, 한박자 쉬어가는 들숨과 날숨의 기복까지 빈틈없는 연기의 힘.

낯익은 배우들을 다시 만나니 반갑다. 아직도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저 아이, 푸아드.

 

 

-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압델라티프 캐시시] 아델 엑사르코풀로스, 레아 세이두

 

 

긴 클로즈업들, 살빛의 따뜻함에 물들며 몸의 아름다움에 취하다.

사랑 속에서 권력을 읽으며 성장한다.

차이는 매혹을 부르고 파국을 낳는다, 는 건 누구의 얘기였던지 모르겠다.

질문, 아주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표현되는 동성의 성행위와 그 사랑을 파탄으로 내모는 기우뚱한 현실 중

어느 쪽이 더 이상한가?

영화도 훌륭하지만 연기는 더 좋다. 모든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아델 엑사르코풀로스와 블루의 그녀, 레아 세이두.

두 배우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내 흐뭇~ 

 

 

- 아메리칸 허슬(2013)

[데이비드 O. 러셀] 크리스찬 베일, 에이미 아담스, 브래들리 쿠퍼, 제니퍼 로렌스, 제레미 레너

 

 

캐릭터의 향연, 이런 대배우들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좌충우돌, 누구 하나 허술함 없이 저마다 빛나도록 할 수 있다니!

가발쓴 대머리 건달이 된 배트맨, [마스터] 이후 부쩍 눈여겨보게 된 에이미 아담스와, 제대로 망가지는 [헝거게임]의 여전사까지, 끝까지 흥미진진한 진수성찬.

 

 

- 노예12년(2013)

[스티브 매퀸] 치에텔 에치오포, 루피타 니옹고, 마이클 파스밴더, 베네딕트 컴버배치, 브래드 피트, 사라 폴슨

 

 

익명의 몸이란 없다. 살아있는 모든 몸은 저마다 고통과 쾌락의 현장이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그곳을 우린 알몸,이라 부른다. 스티브 매퀸 감독은 몸 이미지의 전문가다. 대도시의 밤을 떠도는 소통불가능한 몸들의 고독과 피폐를 더없이 절절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셰임]이나, 단식투쟁으로 여윌대로 여위어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몸을 냉정한 시선으로 따라가던 [헝거]가 전작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한물가도 한참 간 노예제도의 부당함이나 읊조리고자 이 영화를 만들진 않았을 터이니,

자유란 결국 몸의 일이다. 이 영화는 자유없는 몸들이 겪는 일을, 몸의 고통에 휘둘리며 공포에 떨며 망가지는 영혼의 풍경들을 선정적일 정도로 치밀하고 미시적으로 그리고 있다.

 

문제는 그것일 게다. 화면 가득 차오르는 몸, 귓속을 후벼파는 채찍소리와 함께 체감하는 듯한 고통의 이미지. 관객은 피학과 가학의 모호한 경계에서 서성인다. 그 고통에 공감하지만 끝내 그 몸은 내 몸이 아니므로. 또한 그것은 이미지이므로.

쾌락의 이미지가 저와 같다면 그건 포르노가 될 것이다. 고통의 박진 또한 지나치면 리얼리티를 떠나 포르노를 넘본다. 사실 이 영화에도 고통의 포르노라 부르고 싶은 대목들이 엿보인다(이 방면 사이코급 전문가가 있다. 멜 깁슨 감독).

그래서 이 놀라운 몸 이미지의 대가, 미술가 출신 스티브 매퀸 감독의 영화는 불편하면서도 찬탄하게 된다. 다음 영화를 기다린다.

 

 

-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 3.6

[장 마크 발레] 매튜 매키너히, 제니퍼 가너, 자레드 레토

 

 

[카페 드 플로르]의 그 감독만으로도 미더운데, 입신 경지 연기의 매튜 매키너히까지.

에이즈 환자들의 투병기 아니, 투쟁기라니 싶어 좀 시큰둥했다. 그러나 의외로 시나리오가 만만치 않다. 저런 류의 소재가 자칫 빠져들기 쉬운 상투적인 관점을 잘 피해가며 매우 사실적인 이야기가 역동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연출 또한 [카페 드 플로르]의 감독이라 믿기지 않으리만치 차분하고 안정감이 있다.

그러나 역시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배역들의 연기 아닐까 싶다. 살을 쏙 빼고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해버린 매튜 매키너히는 말할 바 없고, 대체 저 배우를 어디서 보았더라 싶어 전작들까지 찾아보게 만든 자레드 레토까지. 알고보니 [미스터 노바디]의 그였다.

 

 

- 그녀 her(2013) 5.22

[스파이크 존즈]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 루니 마라, 에이미 아담스

 

 

스티브 매퀸 감독의 영화들이 존재의 생생하고 비린 물성, 즉 연약하기 그지없는 저마다의 우주를 물들이며 막막하게 무너져 내리거나 고통에 떠는 몸들의 이미지에 줄곧 집착해 왔다면,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어댑테이션] [존 말코비치 되기]등의 작품들을 통해, 몸을 벗어나 자유롭게 떠돌거나 나 아닌 누군가로 변신하고픈 자의 갈망들에 관심을 보여왔다. 그것들은 꽤나 경쾌하고 기발했다.

몸없는 컴퓨터 OS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 이 영화, 요즘으로 보면 발상 자체가 썩 기발하진 않다. 허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 디테일 풍부한 시나리오는 단연 빼어나다. 아기자기하게 전개되는 대화나 밀고 당기는 은근한 갈등들도 재미나거니와,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는 결말이 흥미롭다. 그 자체로야 낯설지 않은 설정이지만, 그것이 세계의 또다른 가능성과 한계를 제시(암시?)하면서 새로운 사랑의 생태학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잘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결국 몸이 문제일까? 우리가 누군가를 ‘너’라고 부를 때, 그 ‘너’는 ‘어딘가’에 ‘누군가’로 있어야 한다는 걸까? 그러면 도처에 존재한다는 신은 어떤가? 드러나는 몸도 없고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신을 그들은 늘 사랑한다고 되뇌지 않던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건만 그 존재를 믿어의심치 않는다면서.

좀 무거운 얘기가 되어버리지만 바로 그것이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노아]가 던지는 핵심 질문인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보단 가볍다. 달리 볼 곳이 많다.

외로움 역시 몸 가진 자만의 일이다. 몸없는 그녀(사만다)는 끝내 외롭지 않다. 어디에나 있으므로.

목소리를 육성이라고도 한다. 몸의 소리란 뜻이자 목소리를 몸의 일종으로 본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사만다가 목소리를 버리고 문장文章과 문장, 그 아득한 사이에 머무르기로 했을 때 그녀는 사라진다. 더 이상 몸이 없으니 외롭지 않다.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는다. 아니 모두를 사랑한다, 그것도 동시에. 몸없고 말없는 신이 우리 모두를 고루 사랑하시듯.

 

 

- 에너미(2013) 5.29

[드니 빌뇌브] 제이크 질렌할, 멜라니 로랑, 사라 가돈, 이사벨라 로셀리니

 

 

하늘이 창이라면 하늘 사라진 안개도시는 출구없는 미로다. 도플갱어에 홀리듯 이끌려가는 엇갈린 만남들, 그 역시 또다른 미로다.

원작은 현대사회의 다양한 위기적 양상을 예리한 비유나 풍자로 잘 담아내는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이라 한다.

감독 역시 ‘현대인의 존재론적 위기’를 표현하고 싶었다는데,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좀 난해한 문법으로 그럴듯하게 풀어낸 듯하다.

눈먼 폭력이 낳은 경악스런 현실을 수려한 영상과 밀도감 있는 서사로 그려가면서 가슴먹먹한 충격 반전을 안겨주었던 [그을린 사랑]의 드니 빌뇌브 감독답게, 역시 영상이 훌륭하다.

 

 

- 모스트 원티드 맨(2014) 8.7

[안톤 코르빈]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레이첼 맥아담스, 윌렘 데포, 로빈 라이트

 

 

 

존 르 카레 원작의 사실성 높은 서사의 무게와, 사진작가 출신 감독의 수려하고 차분한 영상.

비정한 도시 함부르크에서 펼쳐지는 최고의 스파이물이지만 과잉긴박을 버린 호흡은 느리고 깊다.

허나 공든탑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냉혹한 반전, 그 처참하고 아름다운 대미에서 그만 망연자실해진다.

이 영화가 유작이 되어버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그의 연기는 단연 최고다.

영화는 끝나고, 다시는 그를 볼수 없다.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 백일염화(2014)

[디아오 이난] 요범, 계륜미, 왕학병, 왕경춘

 

 

기이하고 흥미진진하고 신비로운 기운 감도는 영화.

여태 본 중 가장 묘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계륜미와, 녹아들듯 배역을 소화하는 요범의 뛰어난 연기가 한몫한다.

당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수 없는 21세기 중국의 현실을 이해하기엔,

향수에나 젖고 싶은 장예모는 말할 것도 없고

지아장커조차 과격한 무협퓨전을 기웃거리며 버거워하는 마당에

지아장커와 동년배인 디아오 이난 감독의 이 영화는 또다른 안목을 보여주는 듯.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웨스 앤더슨] 랄프 파인즈, 토니 레볼로리, 시얼샤 로넌, 틸다 스윈튼, 윌렘 데포, 애드리안 브로디, 에드워드 노튼, 머레이 아브라함, 빌 머레이, 주드 로, 레아 세이두...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이 작품은 그 중 빼어나다.

숱한 대배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적절히 캐릭터를 살려낸다. 낭비가 없다.

살벌하지만 잔인하지 않은 난장활극, 뼈있는 대사들과 구석구석 박혀 있는 유머감각, 비현실적으로 화려한 원색조의 동화풍 색채감 등...

기본적으로 따뜻한 톤을 지닌 그의 영화들은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는 편이지만, 

이 영화는 배우들 눈요기만으로도 푸짐하다.  

 

 

- 나를 찾아줘(2014)

[데이빗 핀처] 밴 애플렉, 로자먼드 파이크, 킴 디킨스, 타일러 페리

 

 

짐짓 제목을 잘못 읽는다, ‘나를 죽여줘’. 

어매이징 에이미, 로자먼드 파이크란 배우의 서늘하고 가면같은 인상 너머로, 쓸쓸한 미소와 좀 짠하다 싶은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샘 멘데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를 보았을 때의 전율을 다시 느낀다. 하나 허술한 캐릭터가 없다. 원작 소설가가 각본을 맡았다.

무시무시하게 잘 만든 영화다.

 

한 대사가 머릿속을 맴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꽤 용감하고 그럴듯한 의역이다. 원문은 what did we do each other? 였던 거 같다.

의역을 따르면 샘 멘데스 감독의 [레볼루셔너리 로드]에도 비슷한 대사가 있었을 것이다.

젊은 세대는 이 영화에서 큰 재미를 느끼기 힘들지 모르겠다. 스릴러라기엔 미진한 대목이 많다. 그러나 회한과 수치를 느껴본 자는, 그리고 권태마저 느껴본 자는 알 것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와 [아메리칸 뷰티]를 가장 낮은 고도에서 관통하는 건 타락도 수치도 회한도 아닌, 바로 권태 아니던가.

안쓰럽다, 모든 이들이. 부서져버린 모든 것을 지탱하기 위한 필사적인 연출들. 그거, 사랑일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블러디 에이미는 7월 5일생이다. 미국건국일이 7월4일이던가? 태어나자말자 삐걱이며 무너지는 집.

살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 사라져야 한다는 역설. 그건 비극이다.

고대의 비극은 운명비극이었고, 근대의 그것은 의지와 욕망의 비극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저것은 뭔가?

무엇을 얻기 위함일까? 아니 잃지 않기 위해서?

[나를 찾아줘]란 우리말 제목과 원제 [gone girl]은 정확히 거울대칭이다. girl을 잃어버린 현실에서 어매이징 에이미는 존재의 불안 혹은 위기를 느낀다. 그녀의 분투는 소멸에 대한 저항이다. 나를 찾겠다는.

쉼없이 그녀는 말한다. 말이 그치면, 존재한다. 말로, 몸으로, 다시 지위로. 그녀의 자아찾기는 결국 포지셔닝이 관건이고, ‘어디’에 ‘누구’로 있느냐는 것. 그 어디에 있기 위해 필사적이 되는 것. 그런 사람들의 행태를 관음觀淫하며 낄낄대는, 또한 그런 세상들의 이야기...

한번쯤 더 보아도 좋겠다. 결혼남녀의 이야기만 아니라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도 연상시키고, 남녀의 성역할을 뒤바꾸어 보면 [셔터 아일랜드]도 떠오른다.

 

모든 사랑은 꿈으로 시작한다. 그게 1절이다.

훗날 다시 부르는 사랑노래는 핏빛 치정극이 된다. 휘날리는 그들의 슈가스톰에 [셔터 아일랜드]의 장밋빛 재가 오버랩한다. '우리가 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는 진부한 질문이다. 유사 이래 누천만년동안 수많은 결혼남녀들이 되뇌어왔던.

영화의 광고카피를 달아본다면 이쯤일 게다. ‘결혼을 정의하다. 우아한 막장극’ 혹은

‘슈가스톰에서 감동없는 누아르까지, 권태없는 결혼은 미션 임파서블.’

어쩌면, 시대막론하고 인기를 끈 대부분의 결혼서사는 막장이었을 게다. 가령, 맥베드.

‘나를 찾아줘’는 썩 현대풍이지만 ‘사라진 여자’는 충분히 통시적인 보편성이 있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맥락과 의미망이 있었을 것이다. 제목을 곱씹다보니 벤 애플렉 감독의 [곤 베이비]란 영화가 떠오른다. [셔터 아일랜드]의 원작 소설가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우리말로 [가라, 아이야]로 번역되었던가.

어쨌건, ‘곤 우먼’이 아닌 ‘곤 걸’이다. 얼핏 스치는 생각, 이거 소년소녀의 비정한 성장담 혹은 어른용 잔혹동화인가. 그런 거 같다.

영화는 요즘 유행하는 모든 힐링을 비웃는다. 힐링 따위는 없다. 쓰디쓴 인내만 있을 뿐. 징후들이 있었고 붕괴가 있었고 지금은 그 이후, 벅찬 연출의 시간. 그러므로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곤 베이비, 곤 걸, 아이도 가고 여자도 가고... 이미 무너진 집.

돌아온 아이, 돌아온 여자. 그러나 그 아인 내 아이가 아니고, 소녀 아닌 그녀는 피칠갑한 전사가 되어 있다.

 

음악이 인상적이다. 긴장을 고조시키기보담 드라마의 비극성을 객관화하는 면이 있다. 서늘하게 물러나 응시하게 한다. 감정이입을 요구하기보다는 관조케 한다. 막장에 품격을 부여하는 힘이다. 비극을 연출하는 악행 앞에서 분노하기보다는 처연해진다.

살짝 뜬금없어 보이는 끝부분은 없는 게 나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나쁘진 않다. 그래도 역시 없는 게 나았겠다.

 

 

- 타임 패러독스(2014) 개봉예정

[마이클&피터 스피어스리그] 에단 호크, 사라 스눅, 노아 테일러

 

 

걸출한 SF작가 로버트 하인라인의 소설이 원작이라는데, 원제목은 숙명이란 뜻의 프리데스티네이션predestination. 좀 선정적인 느낌의 [타임 패러독스]란 제목은 영화의 sf적 측면에 주목하지만 프리데스티네이션(숙명)은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를 더 잘 표현하는 듯.

숙명(pre-destination)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운명(destination)은 닥쳐오는 것이다.

숙명적 윤회, 우주 삼라만상이 브라흐만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힌두신화가 생각나지만 이 영화의 숙명은 그런 장엄장대한 신화의 위광이나 향기가 없다. 질감좋은 비주얼의 영화무대는 비감하고 쓸쓸하다. 넓게 본다면, 더그 라이만 감독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와 비슷한 발상이랄 수 있겠지만, 이 영화의 죽음은 그런 경쾌한 리셋팅의 이미지가 아니다. 카프카의 세계처럼 무겁고 현대적이거나 우울한 근미래풍이다.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너바나](1997)란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 영화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문득 그가 한없이 쓸쓸해지면서 그가 마시던 독주 한잔 더 권하고 싶어진다.

꽤 괜찮았던 뱀파이어sf인 [데이브레이커스]를 연출한 감독 작품으로, 그 영화도 에단 호크 주연이었다.

 

 

꼽아놓고 보니 올해 우리나라 영화로는 썩 재밌게 본 작품이 없다.

내 편견 탓인지, 실제로 수작이 없었던지, 아니면 취향 탓에 못보거나 안보고 지나쳤는지... 

여하튼 아쉬운 노릇이다. 유능한 감독들의 내년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