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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보고 듣기

패러디의 시대

by 숲길로 2013. 4. 6.

 

최근 우리는 유튜브를 통해 화제가 된 두 편의 영상물을 접했다. <레밀리터리블>과 <레스쿨제라블>이 그것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레밀리터리블>은 성공을 거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군대 버전으로 패러디한 것이고, <레스쿨제라블>은 <레밀리터리블>을 다시 고등학교 버전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패러디’는 권위 있는 작품을 모방하면서 거기에 조롱, 풍자, 희화화 등 새로운 의미를 담는 기법이다. ‘군대’와 ‘고등학교’라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훈육기관이 <레미제라블>의 감옥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는 점을 활용한 이 패러디물은 엄청난 유튜브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우리 시대의 주된 형식인 패러디가 가진 막대한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패러디는 어디에나 있다. 이제는 군대와 학교뿐 아니라 정치도, 방송도, 기업도, 예술도 자신이 웃음거리, 농담의 소재가 되는 데 관대하다. 군대는 <푸른거탑>에, 정치는 강용석과 ‘여의도 텔레토비’에, 예술은 낸시 랭에 무관심할 수는 있을지언정 얼굴을 붉히며 불편함을 표출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 시대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패러디이기 때문이다. 근대가 모순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더 나은 진보를 이루는 과정으로 특징지어진다면, 오늘 우리의 시대는 이러한 근대적 진보의 가치관이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때이다. 여전히 경제성장, 민주주의, 진리, 투쟁, 역사, 이념 등의 말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70~80년대와 달리 이제 그 말들은 대중과 학생과 노동자를 모으지 못한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생존’이라는 정언명령 앞에서 무용지물인 이러한 말들이 속해 있는 곳, 즉 정치, 학교, 군대, 언론 등 시효가 지난 근대적 제도는 패러디의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혹은 과거의 관습과 업무를 반복하되 모순의 극복으로 나아가지는 않는 자기복제와 자기패러디를 수행한다.

가령 한국 정치는 근대적 과제인 통일, 지역구도, 패거리, 부패 등의 모순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이미 실패했다. 정치라는 그 기표만은 남아서 선거나 여야대립 같은 제도와 습관을 반복한다. 선거 때마다 ‘새 얼굴’을 갈망하는 데 묶여 있는 이 죽은 정치는 사실 자신을 패러디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의 ‘여의도 정치판’과 SNL의 ‘여의도 텔레토비’ 사이에 차이는 없다. 군대와 학교도 마찬가지다. 이제 이 대표적 훈육기관들은 과거와는 달리 ‘훈육’을 담당하지 못한다. 군대는 무서움을 없앴고, 학교는 교사의 권위를 없앴다. 오히려 사회가 ‘전쟁터’이고, 기업이 ‘학교’이다. 본질이 사라진 군대와 학교는 그 자체로 자신의 이름을 패러디하고 있을 뿐이며, 따라서 <레밀리터리블>이나 <레스쿨제라블>에 불편해할 리가 없다. 대학은 어떤가. 최근의 마광수 선생 사건이 보여주듯, 이제 대학생은 수업에 들어가되 교재를 사려 하지는 않는다. 교수와 학문의 권위가 이미 사라진 죽은 대학은 기존의 습관을 자기복제하면서 스스로를 대학이라 부른다. 대학은 이제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평생 자기계발’ 과정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방송과 기업이 대학의 역할을 패러디하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자리에 입담으로 무장한 자기계발 엔터테이너들을 우리 시대의 새로운 ‘교수’로 등장시킨다. 이들의 ‘교재’는 언제나 베스트셀러다.

패러디는 죽은 제도와 이념, 죽은 진정성의 무대에서 자라나는 버섯이다. 최고경영자 이명박은 5년간 대통령직을 패러디했고, 연예인은 캐릭터를 만들어 자신을 패러디하고, 일베 유저들은 역사를 패러디하고, 그렇게 패러디는 지속된다. 패러디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급진적 꿈이 흘러가버린 곳에 남아 킥킥대는 웃음소리다. 눈물 흘리는 이들은 늘어나지만 들리는 것은 그 웃음소리뿐이다.

 

                                                                                                               -  문강형준(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