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 :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
봄은 식물의 발정기다. 꽃가루는 식물의 정자고, 꽃잎은 식물의 난자다. 나처럼 야한 생각을 비슷하게 많이 하는 가까운 후배 정주는 나무에 파릇한 물만 올라도 환장해 어쩔 줄 몰라 한다. 사방이 포르노인데 흥분이 안 되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찬란한 봄조차 엄숙주의에 젖어 근엄한 표정 지으며 산다면 도대체 인생이 뭐냐는 거다. 이 아름다운 봄에도 그 어떠한 에로틱한 상상이 가능하지 않다면 도대체 뭐가 살아있냐는 거다. 옳다.
언제부터 이런 몹쓸(?) 생각으로 인해 봄이 이토록 괴로워진 것일까? 원시시대, 사냥꾼들은 잡은 사슴의 숫자를 화살 끝에 새겨 넣었다. 기억하기 위해서다. 어느 순간부터 사냥꾼들은 이 숫자 표시를 머릿속에 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호학적 매개’(semiotic mediation)다. 상징에 의해 매개되는 기억·추론과 같은 인지능력이 내면화되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지능력은 저절로 작동하지 않는다. 기름이 있어야 움직이는 자동차처럼 사유의 동기가 있어야 한다. 발정기다!
동물의 존재 이유는 종족 번식이다. 발정기를 위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인간도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이 여타 동물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차이는 ‘매일 발정기’라는 사실이다. 발정기의 무한리필이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애나 어른이나 평생토록 오직 그 생각(!)뿐’이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이다.
직접적 접촉 없이도 성행위의 짜릿함을 상상할 수 있게 되자, 인간의 발정기는 다양한 문화적 외피를 입게 된다. 상징적 매개물이 갈수록 다양해진다는 이야기다. 하늘거리는 주름치마로부터 가죽장화와 채찍, 혹은 촛농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의 양상은 매우 즐겁다. 인간의 문화예술행위의 대부분은 ‘발정기의 기호학적 매개’의 산물이다. 인간 에로티시즘의 기호학은 여인의 다리에서 완성된다. 망사스타킹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자들은 왜 망사스타킹을 신는가? 왜 가슴골이 깊게 파인 옷을 입는가? 왜 그토록 짧은 치마를 입는가? ‘남자들 보라고…’라며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주위의 여인들로부터 집단적인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여인들의 비난이 옳다. 절대 남자들 보라고 망사스타킹을 신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여인들의 주장처럼 ‘자기만족’을 위해 입는 것도 절대 아니다. ‘자기만족’론은 ‘남자들 보라고’론보다 더 어설프다. 설득력도 전혀 없다.
‘보이지만 안 보이는 걸로 하기’다. 빤히 보이지만 절대 내놓고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발정기의 기호학적 매개’의 미학적 완성은 바로 망사스타킹과 같은 ‘훔쳐보기’와 ‘드러내기’의 변증법적 긴장에 있는 것이다. 그 유명한 샤론 스톤의 ‘다리 바꿔 꼬기’야말로 이러한 미학의 20세기적 결정판이다. 눈앞에 빤히 드러내지만 안 보이는 걸로 하자는 것이다.
트위터와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관음증과 노출증의 21세기적 양상이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를 통해 자신만의 은밀한 느낌과 생각, 행위를 적나라하게 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서로 훔쳐본다. 서로의 내밀한 세계를 디지털 기기의 액정화면을 통해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디지털적 애무가 대낮에 사방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봄에는 좀 야한 생각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다. 매일같이 컴퓨터 화면을 통해 ‘훔쳐보기’와 ‘드러내기’에 몰두하면서, 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봄날의 에로티시즘에 입술꽁지 내리며 엄숙하고 근엄한 척하지 말자는 거다.
이 찬란한 봄날, 신정아의 책이나 훔쳐보고 흥분하는 천박한 변태짓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개나리가 노랗게 올라오고 목련이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데 가슴 설레지 않는다면 도대체 언제 살아있음을 느낄 것인가? 그래서 난 요즘 망사만 보면 흥분한다. 이젠 증상이 많이 심각해져 낚시 가게 그물만 봐도 흥분한다. 봄엔 그래도 된다.
원본출처 : 한겨레 신문 11.4.14 [김정운의 남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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