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 산행 다녀오는 길에 간만에 남의 살 한 점 먹자며 식당엘 들렀다. 국내산 돼지고기만 취급하는 곳인데 놀랍게 빈자리가 없다. 오랜만에 와 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엉거주춤 대기번호표 받아쥐고 난롯가에 앉으니 우리 앞에도 두 팀이 더 기다리고 있다. 10여분 이상 기다려도 자리 나지 않아 짱더러 “나갈까?” 물으니 귀찮다며 그냥 기다리잔다.
머, 그렇게 멀거니 이십여분 기다려 남의 살 두어점 먹고 오긴 왔는데...
겁나게 붐비던 그 집 분위기 떠올리며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살처분 매몰지 얘기 듣고 있노라니, 이제 과연 남의 살 먹는 일이 예전같지 않게 되었음을 새삼 느낀다. 절에서는 살처분 짐승들 천도제 올리고 범종교계에서도 지나친 육식문화에 한마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윤리란 건 진실의 이면일 따름이다. 아무리 뭉개고 회피해도 질문은 더욱 벼려져 되돌아온다. 어쩌면 우린 지금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을 마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끔 기웃거리곤 하는 페리스코프에 흥미로운 글 있어 옮겨본다).
가축을 향한 인간의 폭력, 지나치지 않은가?
동물을 사랑합시다.
인간과 동물 사이는 어떤 관계인가. 서양의 주류사상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절대적 경계가 있다고 보았다. 구약성서 창세기편에서는 세상 만물이 인간의 지배를 받으며 동물도 그 일부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보았다. 근세에 와서는 데카르트가 동물을 영혼이 없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설명했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모든 동물이 인간과 함께 윤회의 고리들을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모든 동물을 인간과 함께 진화의 흐름 속에 자리잡은 존재로 본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절대적 구분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와 통하고 지금의 인간보다 더 진화된 존재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인간제일주의에서 벗어나는 경향도 있다.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도 인간과 동물의 절대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것이든 짐승의 것이든 참혹한 시체를 보면 마음이 언짢고, 인간이든 짐승이든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괴롭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다. 인간과 덩치가 아주 차이 나거나 신체구조가 크게 다른 동물, 예컨대 곤충이나 물고기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덜 느끼는 것이 보통이나 인간과 비슷한 동물이라 하더라도 인간에게와 똑같은 동정심을 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정상적인 인간의 동정심은 모든 동물에게 미친다.
서양의 주류사상에서 동물을 인간과 격리시키려 한 것은 문명단계에 들어와서 농경보다 목축에 비교적 비중을 많이 둔 때문이라고 하는 설명이 있다. 늘 잡아먹어야 하는 동물에 대해 동정심을 억누르고 살해행위의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관념의 주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미 펜실베이니어 대학의 제임스 서펠 교수는 <동물, 인간의 동반자>(윤영애 옮김, 들녘 펴냄)에서 동물과의 관계는 문명 발생과 함께 인간이 가지게 된 문제라고 설파한다. 원시상태의 인간은 여러 동물들 중의 하나로서 다들 하는 것처럼 쫓고 쫓기고 치고 받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었는데, 문명을 가지고 동물을 키우게 되니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잡아먹기 전까지 내 손으로 먹이 주고 돌보면서 남의 동물 아닌 ‘내 동물’로 정을 들여 놓았는데 막상 잡아먹으려면 뭔가 내 식구 죽이는 것처럼 찜찜하고, 저항도 못하는 놈을 죽이려니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책을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법을 동원하게 되는데, 서펠 교수는 이것을 절연, 은폐, 책임전가, 왜곡의 네 영역으로 구분한다.
절연(detachment)은 관념을 이용한다. 앞에서 말한 서양 주류사상이 대표적인 예다. 어느 심리학자는 실험실의 쥐가 관념화되는 현상을 다룬 논문에서 ‘좋은 쥐’ ‘나쁜 쥐’ ‘먹이용 쥐’의 구분을 지적했다고 한다.
좋은 쥐는 실험대상으로서, 동물학대방지의 기준이 적용된다. 좋은 쥐가 도망쳐 통제에서 벗어나면 나쁜 쥐가 되므로 어떻게 잡아죽여도 상관없다. 다른 실험동물의 사료로 쓰이는 먹이용 쥐에게는 또 별도의 기준이 적용된다.
은폐(concealment)는 동물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대부분 유럽 언어에서 쇠고기, 돼지고기, 사슴고기를 가리키는 단어들이 소, 돼지, 사슴의 단어들과 별도로 쓰이는 것이 그 예다.
근대화된 세계에서 공장화된 목축장과 도살장은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게 자리잡는다. 그리고 개체로서의 동물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대량사육에도 은폐의 효과가 있다. 가공육의 개발도 같은 원리로 육류 소비 촉진에 도움이 된다.
책임전가(shifting the blame)는 문명 초기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수법이다. 기르던 동물을 잡으면서 제사 올릴 귀신들이 요구해서 부득이 죽인다든지, 동물의 수호신이 동물을 더 좋은 곳으로 보내 이승을 떠나게 하는 것이라든지, 여러 가지 핑계가 여러 종족의 풍속에서 발견된다고 서펠 교수는 소개한다. 근대세계에서 일부 동물을 ‘해로운 동물(vermin)'로 규정해 인간에 대한 죄악을 박멸의 명분으로 삼는 것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왜곡(misrepresentation)도 관념화의 일종인데, 동물의 종류에 따라 인간의 특성 중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뒤집어씌우는 수법이다. 게으르고 더러운 돼지, 비굴한 개, 음흉한 고양이, 멍청한 소(양, 당나귀), 교활한 여우, 흉포한 곰, 탐욕스러운 늑대, 등등 끝이 없다.
가축의 경우 이런 규정은 자기충족성을 가지기 때문에 딱하기도 하다. 돼지는 더러운 동물이라 해서 더러운 환경 속에서만 살게 하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만다. ‘꼬마돼지 베이브’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이런 고약한 운명을 깨뜨려 보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동물의 딱한 사정에 동정심을 느끼며 읽다 보니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런 수법이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근년 미국의 대외정책에 납득하기 어려웠던 측면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절연: “미국은 다른 모든 나라와 다른 특별한 나라야. 근대세계 최초의 공화국인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국가니까. 미국 이외의 국가에는 무슨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있어. 그런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기네 문제니까, 미국만 흔들리지 않게 지키고 있으면 다른 나라들도 미국을 따라오게 되어 있어. 인류평등 좋아하네. 자기네 나라를 미국처럼 만들어놓은 뒤에 평등 얘기하라고 그래.”
은폐: “전쟁터에서 군인과 군인이 마주치는 일을 극력 피해야 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추를 눌러 게임 하듯 사람을 죽여야 해. 피해자들에 대한 구체적 보도는 최대한 막거나 어렵게 해야 해. 물론 우리쪽 피해내용은 최대한 극적으로 광고해야 하지.”
책임전가: “우리는 아프간인을 좋아하고 이라크인을 사랑하지만 탈레반과 후세인 때문에 부득이 공격하는 거야. 아프간인과 이라크인이 더러 죽고 다치고 고생도 하겠지만, 탈레반과 후세인 밑에서 영원히 신음하기보다는 우리에게 감사해야지. 더러 몰지각한 자들이 우리를 원망한들 어쩔 거야. 탈레반과 후세인을 날치게 놔둔 자기들 잘못을 탓해야지.”
왜곡: “이라크가 유엔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그러니 경제제재를 풀라고? 후세인이 어떤 놈인지 아직도 모르는구먼. 두고봐, 목을 조인 채 몇 달만 지켜보면 본색을 드러낼 거야.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도 있다고 그랬다고? 그거 개발하고 있다는 얘길 거야. 걔들 얘기는 무조건 최악의 뜻으로 해석하면 돼. 악의 축이잖아? 제네바 합의를 우리 쪽에서만 어기고 있다고? 맘대로들 떠들라고 그래. 우리 나팔이 훨씬 더 크니까. 우리 말 안 듣겠다는 건 바로 세계평화를 등지겠다는 뜻이야. 그걸 우리가 증명해 보여야 해.”
히틀러의 시대를 살아 보지 않았지만 대개 비슷한 수법들이 판을 쳤을 것 같다. 우리 모두 동물을 불쌍히 여길 줄 압시다. (2002. 12. 5)
권력관계,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서로가 상대방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크게 갈라진다. 특히 관계의 주도권을 가진 지배자 측의 관점이 중요하다.
지배자의 관점을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극단으로 인식한다. 피지배자를 나와 똑같은 존재로 보고 그의 행복과 고통을 내 행복과 고통처럼 여기는 천사적(인도주의적) 관점. 그리고 피지배자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착취 대상으로만 여기는 악마적 관점.
그러나 현실 속의 인간들은 그 중간에 있다. 악마적 관점이든 천사적 관점이든 완벽한 극단에 이른 사람이 있다면 정신병원에 보내 마땅하다. 보통사람은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피지배자가 약자라는 점에서는 나와 다른 존재로 보고, 마음이 독한 사람이라도 피지배자를 행복도 고통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물건처럼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도 권력관계는 도처에 존재한다. 직장에서의 상하관계, 학교에서의 사제관계, 가정에서의 친자관계 등등. 마음이 착한 윗사람은 권력관계의 폭력성을 줄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크다고 하는, 권력관계의 본질은 사라질 수 없다. 학생의 선생에 대한 책임이 선생의 학생에 대한 책임보다 클 수는 없지 않은가?
서울시 교육청의 체벌 금지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체벌의 원천적 금지에 반대한다. 보수주의자답게. 선생의 학생에 대한 책임을 아주 크게 본다면 매질 아니라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학생을 좋은 길로 이끌어줄 수 있게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상황에서는 체벌 금지가 옳다고 본다. 선생이 학생의 장래를 좋게 만들어주려는 아무리 큰 책임감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 뜻이 잘 살아날 수 있는 현실이 아니지 않은가? 옛날 훈장은 자기 회초리질의 효과를 두고두고 모니터링 했는지 몰라도 지금의 선생은 그렇게 할 길이 없지 않은가?
우리 교육계의 체벌은 통상 선생의 책임감보다 권한의식에 근거를 둔 것이다. 지배자인 선생이 피지배자인 학생을 자기와 다른 존재로 보는 악마적 관점에 치우친 현상이다. 선생과 학생 사이의 권력관계가 지켜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실현할 수 있는 책임의 범위를 넘어서는 무절제하고 야만적인 지배 방식은 시정되어야 하며, 우리 교육계에서 통용되어 온 체벌의 대부분이 이 범위에 든다고 생각한다.
인간사회에는 힘의 강약 차이가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 차이는 모든 인간관계에 권력관계의 측면을 만들어준다. 식당의 손님과 종업원 사이에서도 이 측면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종업원을 업신여기고 무리한 요구를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 책임보다 권한을 늘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 ‘남’을 ‘나’와 다른 존재로 보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다.
권력관계에 너무 예민한 이런 사람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저해되는 존재다. 그런 사람들의 역할이 큰 사회는 성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성공한 사회가 되려면 권력관계에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들이 그 성질 죽이지 않고는 자기 인생이 편할 수 없게 만드는 기제가 작동해야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쥬’도 그런 기제의 하나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권력관계에 엄청 예민한 사람들이 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자리에 쫙 깔려있다. 이놈은 어떻고 저놈은 저떻고 흉보기도 부질없다. 성질을 그렇게 타고났고, 생긴 대로 노는 것뿐이지 않은가? 투표권자의 대다수를 점하는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그런 자리에 앉힐 수 있는지, 그것이 내 보기에는 정말 큰 문제다.
구제역 사태를 보며 그 생각이 또 난다. 인간이 강자, 소가 약자가 되어 있는 세상에서 인간이 소를 키워 멋대로 잡아먹고 벗겨먹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생명과 다른 생명 사이에 지켜야 할 금도(襟度)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도 금도가 있고, 공직자가 권한을 행사하는 데도 금도가 있다. 식민주의자가 식민지 백성을 괴롭히는 데도 금도가 있고, 주류 민족이 소수민족을 핍박하는 데도 금도가 있다.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강자에게 유리한 그 체제가 지속가능성을 가지기 위해서도 지킬 필요가 있는 것이 금도다.
소를, 돼지를, 근처에 구제역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떼로 죽여 파묻는 짓, 생명과 생명 사이의 금도 안에 있는 일일 수가 있는가? 인간이라는 종(種)이 소라는 종을 지배할 힘이 있다 해서 이런 짓까지 해도 되는 것일까? 일본인이 조선인을 총칼로 억누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지른 온갖 범죄보다 덜한 짓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짓을 할 바에야 차라리 소와 돼지에 대한 ‘지배’를 포기해야 되는 것 아닌가?
“질 좋은 쇠고기를 싼 값에 먹기 위해” 다른 생명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폭력적 태도는 강자의 책임에 눈 감고 권한만 떠받드는 자세에서 나온다. 그런 태도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극한적 행태를 우리 어린이들이 보면서 자라나고 있다. 영상물 속의 폭력은 인간을 향한 것이기에 못 보게 해야 하는 것이고 다른 동물을 향한 폭력은 어떤 것이라도 괜찮다는 것인가?
폭력의 본질은 ‘금도’에 얽매이지 않는 ‘강자의 자유’에 있다. 인간을 향한 폭력이든 가축을 향한 폭력이든 마찬가지다. 소에게 ‘소답게 사는 길’을 거부하는 사회에서 ‘사람답게 사는 길’을 사람들이 바란다는 것이 지나친 사치 같다. 구제역 사태는 ‘함께 사는 세상’을 거부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를 보여준다.
머레이 북친의 말이 생각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그 역(逆)도 성립하는 것 같다.
- 출처 :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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