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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스플라이스 - 자궁, 슬픈 숙주의 꿈

by 숲길로 2010. 7. 13.

제목 : 스플라이스(Splice 2009) 104분

감독 : 빈센조 나탈리

제작 : 기예르모 델 토로

출연 : 애드리안 브로디, 사라 폴리, 델핀 샤네끄(드렌), 아비게일 추(어린 드렌), 데이빗 휴렛

 

 

   

 (영화 안 보았으면 읽지 마세요. 줄거리 디따 까발립니다^^)

 

<큐브>의 빈센조 나탈리와 <판의 미로> 기예르모 델토로가 감독과 제작을 맡은 영화.

기발하고 치밀한 상상력을 기대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이 생각난다. 타협 없는 끝장, 영화 속 대사처럼 ‘갈 데까지 간다.’

제법 탄탄한 시나리오, 설득력 있는 영상 구현을 위해 십년을 기다렸다 한다. 허나 근래 워낙 익숙해진 생명공학 얘기 덕분에 별 충격 없이 와 닿는다. 그보다는 생명 자체와 인간 욕망을 꿰뚫는 안목이 돋보인다. 신랄하고 날카롭다. 기발하고 아름다운 낯선 피조물 이미지와 더불어 만든 이들 재능 실감케 한다.


사회생물학은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의 숙주일 따름’이라 주장한다. 곱씹을수록 상서롭지 못하고 괘씸한데, 어쩌랴... 영화 보고 나면 저 주장에 기꺼이 동의하고 싶어진다.

내가 꾸는 모든 꿈은 유전자의 꿈이다. 숙주의 꿈과 욕망을 지배하는 유전자의 꿈. 유전자 운반체 인간종이 다다른 이 문명 또한 숙주의 운명을 벗어나 있지 않다. 무한한 자기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과 과학기술의 꿈이 유전자의 꿈과 가장 닮아있음은 그저 우연일까?

 


 

과학자 클라이브와 엘사 부부가 창조한 드렌Dren은 다종 DNA결합으로 태어난 생명체다. 양서류 갑각류 조류 인간 모두의 특징을 지녔다. 모든 생명을 조화시키려는 원대한 통일의 꿈. 퍽 야심적이다. 인간의 무한 욕망을 구현하는 이 상상력의 바탕에는 끝없이 생산하는 여성의 자궁Matrix에 대한 은유가 엿보인다.

‘갈 데까지 간다’는 건 남편 클라이브가 아니라 아내 엘사의 의지였고, 드렌의 가능성을 구성하고 탄생시킨 이도 그녀였다.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자궁은 인간이 창조하고 낳을 최초의 변종 인류, 신생명체를 품는다. 과학기술에 겹쳐지는 자궁의 욕망.

 

여러 영화들이 떠오른다. <에일리언>에서는 괴물을 낳은 리플리의 착잡한 모성이 있었고, 크로넨버그 감독은 모든 것과 교접하려는 기이한 저 꿈의 영역을 기계에까지 확장시켰다. 나아가, 빈곤한 현실을 짓밟고 넘어서는 풍요로운 가상현실의 세계, 모든 것이 가능한 환멸의 성채를 낳는 기계자궁 <매트릭스>까지.

유전자의 꿈 또한 그녀의 자궁을 빌어, 개체와 종과 문명의 차이를 넘어 은밀하고 웅대하게 구현될 것이다.

 


기계와도 교접하는 꿈의 시대에 이종 생명체쯤이야... 과연 유전자들은 서로 조화하며 저마다 개성있게 발현한다. 기발하고 위태롭고 아름다운 이미지들 충만하다. 거장들의 솜씨 빛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날개다. 정교하고 빼어난 영상으로, 인류가 오랫동안 지녀온 날개의 환상을 더없이 아름답게 보여준다. 위태로운 지붕 끝에서 밝고도 어둔 하늘 등지고 펼쳐지는 최초의 날개, 난생 처음 교접하며 몸 전체를 감싸는 후광처럼 펼쳐지던 절정의 날개...

잘 고양된 생명의 상태가 동경과 희열이라면, 저 날개야말로 그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표현물 아닐까.

 


 

피조물이 암컷에서 수컷으로 진화하는 대목은, 만나면 싸워야 하는 수컷들의 폭력성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처럼 보인다. 또 숨 돌릴 틈 없는 과잉경쟁사회에서 남자보다 더 남성적으로 변해가는 여자들(냉혹한 보스도 여자다!)에 대한 풍자 같기도 하다.

꽃처럼 피어나며 아름답게 어울리던 드렌 이전의 두 생명체도 수컷으로 진화하며 서로 죽이고 자멸한다. 슬픈 숙주들... 

 

매혹적인 피조물 드렌. 그러나 불안을 느낀 클라이브는 어린 드렌을 죽이려 한다. 자식을 죽이려는 가짜 아비의 모습에 희랍신 크로노스가 어른거린다. 태어나는 아들, 자신의 미래를 삼키며 진화를 거부하지만 끝내 패배하고 마는 운명. 시간이란 유전자를 지닌 그 신 역시 슬픈 숙주였던 셈이다.

 

자라나면서 인간의 얼굴을 닮아가는 드렌, 그녀를 화장시키는 엘사...

그러나 유전자는 암컷과 수컷 저마다에게 명령을 각인한다. 매혹되기를, 품고 낳기를... 차츰 미묘한 감정 드러내는 드렌, 어미와 딸 두 암컷 사이에 흐르는 애증. 반면 수컷은 필연적으로 매혹되는 존재다. 다가서는 아비 혹은 수컷 클라이브...

 

 

수컷으로 변태한 드렌. 사나워지더니 어미 엘사를 탐한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수컷, 클라이브와 드렌은 서로 찌른다. 드렌 이전의 그 피조물들처럼, 걸핏하면 찔러대는 세상 모든 수컷들처럼, 그 역시 찔러 넣음으로써 끝내고 돌아선다(번식시키는 찌르기와 살해하는 찌르기). 뒤늦게 이루어진 크로노스의 살해는 그러므로 아비의 성공이 아니라 수컷의 환멸과 파국의 풍경이다.

  

자신의 피조물에 매혹된 이는 희랍신화의 피그말리온이었다. 과학기술 문명의 여명기에 프랑켄슈타인이란 천재적 괴기 버전이 저  변신의 고전을 혹독하게 비튼 이래, 부정과 파탄의 매혹 또한 피조물 서사의 한 축으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이 영화 역시 그 계보 잇는 또 하나의 독창적인 변주라 할 만하다.

 

 

엘사는 끝내지 않는다. 아니 끝낼 수 없다. 찌르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자궁이야말로 숙주를 넘어서는 숙주의 자격일까? 그녀는 신인류 최초의 유전자를 선취하며 기꺼이 어미로 진화한다.

무궁한 생식을 꿈꾸는 암컷. 숙주의 꿈은 자본의 꿈과 행복하게 조화한다. 태어날 생명의 운명을 지배하는 건 자본과 과학기술이지만, 끝까지 가버린 저 맹목의 욕망이 과연 우리의 자유 아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어저께 보았던 <킬러 인사이드 미>만큼 많은 관객들 불쾌해 할 영화다.

<킬러...>가 인간 내면의 극단 풍경을 까발린다면 이 영화는 안팎의 한계 모두를 더듬는다. 생물학적 의미와 윤리적 의미 양쪽에서 대체 어디까지가 인간이냐고 묻는다. 이기적 동물의 본성은 아마도, 전자는 너무 좁게 후자는 너무 넓게 규정하고 싶을 것이다.

 

생명현상은 맘대로 다룰 수 없는 무엇이다. 착각은 위험한 자유다.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이라면 그건 이미 인간 윤리의 영역이 아니다. 차라리 생명 자체의 욕망, 유전자의 욕망이라 불러 마땅할 게다. 스스로 이룩한 문명을 통제하지 못할 때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중 나선구조물의 충실한 운반자, 영원한 그 숙주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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