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프랭크 다라본트
안개는 사물을 모호하게 한다. 견고한 모든 것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아니, 가장 헛것만이 비로소 가장 견고하게 자라나는 것일까? 비루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가 가진 전부인 이성, 종교, 사랑, 용기... 그러나 죽음은 그것과 무관하게 휘몰아쳐오고 때로 그것이 가는 길을 따라 우리를 덮친다.
모호하게 감추는 안개는 또한 낯선 사물을 낳는다. 바깥의 안개는 허술하게 차단된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며 안으로부터도 안개의 몸들을 키워낸다. 하나이던 안개몸은 둘 셋 넷으로 늘어나며 군서 생물처럼 거대한 한 몸의 괴물로 자라나 마침내 자신의 세계를 삼켜버린다.
백척간두에서 길을 끊는 산안개가 그러하듯, 세상 끝의 풍경으로 안개보다 더 어울리는 건 없다.
밀려오는 안개는 일종의 예감이었고, 바깥으로의 모든 길을 끊어버린 안개는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기에 앞서 우리 자신들의 정체부터 밝히라는 다른 세계에서 날아든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안개는 세상의 끝이었다.
종말론적 광신자들의 위협에서 탈출을 감행한 이들은 시동이 꺼져버린 차 안에서 망연히 쳐다본다.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 안개 속을 유유히 걸어가는 거대한 괴물을.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을 연상시키는) 그 장면은 세상 끝의 풍경이었다.
그들은 결단한다. 할 만큼 했으니(!) 스스로 세상을 끝장내기로. 바로 그 순간 그들은 공황에 빠진 저 종교적 종말론자와 또다른 의미의 종말론자가 된다.
그래서 이건 종말론에 관한 영화다, 라 말해도 되겠다.
공포가 종교의 심리적 기원이란 얘기는 진부하지만, 뛰어난 연출에 힘입어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스티븐 킹의 원작을 프랭크 다라본트가 연출한 이 영화는 같은 원작자와 감독의 <쇼생크 탈출>이나 <그린 마일> 못지않다. 오히려 더 재미있다.
장대한 스펙터클이나 현란한 액션 없이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뛰어난 영상미는 실체없는 공포의 대상을 잘 표현하고, 사실적인 캐릭터와 현실감있는 이야기 전개는 긴장의 밀도를 서서히 더하여 공포반응의 수위를 극한치까지 높인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가히 백미다. (합리주의자이길 거부하는) 감독의 통찰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이성의 한계 혹은 합리성의 모순을 날카롭고도 절묘하게 드러낸다. 오래오래 기억될 기막힌 피날레이기에 단숨에 이 영화를 수작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영화를 보며 나는 어렴풋 느낀다. 우리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근본적으로는 종말론자가 아닐까 하고. 누구 하나 허술함이 없는 탄탄한 캐릭터들 중 일관되게 공감이 가는 이가 있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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