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young Adam(2003)
감독 : 데이빗 맥킨지
드럽게 답답한 영화다. 존재의 지독한 물질성만이 모든 언어를 삼키며 창백하게 빛난다. 지겹고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일상, 글래스고 항구의 비좁은 수로를 오가며 석탄을 실어 나르는 구시대의 유물 Atlantic Eve호의 나날. 희망 따위는 검게 죽은 바다에 던져 버렸다. 아니, 그런 건 애초 없었던 꿈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말문을 닫고 섹스에 탐닉한다. 전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하다. 삶의 유일하게 남은 탈출구처럼 치러진다. 이 지겨운 세상에 섹스 외에 달리 무슨 할 일이 있느냐는 듯.
어이없이 저질러진 범죄는 그를 외면한 채 굴러간다. 죄의식 따위는 없다. 엉터리로 돌아가는 한심한 세상에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 그러나 상황은 마치 그가 세상에 없는 듯하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그보다 더 영악하거나 어리석지 않다. 다만 지독하게 부조리할 따름이다.
인간적 본질로서 그는 이미 아무것도 아닌지 모른다. 묵시적으로 주어진 부재 선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몸의 물질성은 그를 뭇 여자들의 욕망의 중심에 끌어다 놓는다. 이브라는 욕망의 심연으로 밀어 넣는 몸뚱이. 그것은 출구 없는 폐쇄회로에 갇힌 물질화한 권태와 공허일 뿐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육체적 실존 자체가 이미 모든 삶의 대책 없는 유혹이다. 그로부터 태어난 이브는 그를 유혹하고 잡아먹는다. 낳고 번성하는 삶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퇴행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그와의 섹스. 따라서 그와의 모든 관계는 불모적이고 임신한 그녀의 죽음은 필연적이다.
안개 자욱한 새벽 항구에서 죽은 여자의 흰 몸뚱이를 건져 올리는 이미지는 영화의 전부를 지배한다. 지금도 아담의 후예들은 끊임없이 죽은 몸을 낚아 올린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불모의 몸들을. 그러나 몸은 빛난다. 검푸른 화면 속에서 창백하게 빛나는 그들의 알몸들... 그건 차라리 눈물겨운 풍경이다.
최초의 남자 아담은 또한 최후의 모든 인간, 물컹대는 존재의 이물감으로 남은 욕망들이다. 세상에 내던져진 이 몸의 대책 없는 물질성은 어디에 속할까? 이 땅을 비추는 하늘의 빛이 없다면 몸은 스스로 빛나야 할까? 그러나 몸은 그저 그 자체로서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냥 문득 여기에 있다. 몸은 무덤도 삶의 환각도 아니다. 아담의 몸은 그 무엇도 아니다. 버릴 수도 취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처치 곤란한 잉여물, 제 꼬리까지 삼키고 대가리만 남은 뱀의 아가리이다. 그가 동거녀에게 자행하는 광란의 가학을 보라.
그는 그녀가 사라졌던 곳으로 그녀의 기억조차 던져버린다. 그녀의 기억으로나마 지탱되던 그의 사회적 존재는 검은 바다 깊이 잠긴다. 오래 전 그가 희망과 꿈을 던져버렸던 바로 그 불모의 바다다. 이제 그는 더욱 없다. 그러나 저 지독한 실존들, 비루한 욕망으로만 남은 몸뚱이들은 아직도 잿빛 항구를 어슬렁거린다.
한 시절 대영제국 자본주의의 영광을 이끌었던 스코틀랜드 최고의 산업도시 글래스고 항구는 세상 끝의 풍경처럼 황량하고 스산하다. 뛰어난 영상은 느리고 깊게 흐르는 검푸른 색조로 출구 없는 이 시대 삶의 황폐함을 절묘하게 빚어낸다.
두 시점을 오가며 적당히 긴장을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일상으로 미래로의 출구를 닫아버리는 잔인하도록 무심한 연출이 맘에 든다.
연기들도 더 바랄 나위가 없다. 대책 없는 청춘의 이미지를 던져버린 이완 맥그리거의 깊이 있는 연기와, <올랜도>에 주인공으로 나왔던 여배우(틸다 스윈튼)의 나이든 모습과 연기가 인상적이다.
근래 본 중 가장 나았던, 수작으로 꼽을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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