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책

파 프롬 헤븐 - 기다림, 새로 시작할 수 있음인...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파 프롬 헤븐 (far from heaven 2002)
감독 : 토드 헤인즈

출연 :

 

 

가을로부터 오는, 그러나 천국에서 먼 처연한 사랑 이야기.

 

단 하나의 빛만 있었다면 세상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었으리라. 서로 다른 사랑으로 고통해야 하므로 우리는 어둠에서도 기다림에서도 아름다움을 본다.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오는, 자신조차 낯선 어떤 사랑과 기다림들은 풍요롭다. 슬픔은 은밀하고 우아하다. 성의 장벽을 넘어가고 인종의 거리에 절망하는 사랑. 마침내 묵묵해진다.

가을은 빛 없는, 색이 사라진 계절을 예감한다. 가을에서 겨울, 봄으로 가는 그 시간의 흐름은 투명하지 않다. 그러나 빛이 사라진 곳에 내리는 침묵은 봄을 꿈꾼다...  


침묵으로부터 풀려나오듯 화면 위로 번지는 낯선 이야기들. 물들어오는 계절의 빛.

지상적 존재의 몸짓에 깃드는 슬픔과 고통. 깊은 감정들은 몸 위로 드리워지는 빛깔들이 되는가? 연보랏빛 스카프와 가을빛에 어울리는 푸른 드레스... 덧없이 빛나는 것들의 윤곽으로 느리게 흘러내려 그림자가 되고 존재의 무게가 된다. 단풍숲길의 황홀은 사물을 넘어 소리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가 된다.

빛의 세계 속으로 난 오솔길. 그들은 그 길을 따라 가을의 시간으로 걸어 들어간다. 저 현란한 빛의 풍요는 조화롭고 아름답지만 그 순간에 멈추어 있지 않다. 시간 속으로 열릴 때 세계는 가능성을, 아니 불가능의 가능을 빚어 놓는다. 그녀가 그들 하나하나를 떠나보내야 했을 때, 그들은 타인들 속으로 사라진다. 오직 먼 빛의 기다림과 같은 사랑의 가능성이 남았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혼자다. 그러므로 타인을 본다. 타인은 일체감을 통해 체험될 수 없다. 타인 앞에서 우린 더 이상 지속을 말할 수 없다. 기다림은 기대가 아니다. 갈 수 없는 타인의 방들, 그녀는 그 앞에서 머뭇거린다. 미래에의 기대가 아닌 기다림에 머문다. 현재로 떨어져 올 수 없는 시간, 기차를 타고 떠나는 그를 바라보는 심정은 먼 곳으로의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침묵하는 시간의 의미로 다가오는 타인의 얼굴이다.

 

 


두 번의 떠나보냄. 보내는 자로서 그녀는 거기 머문다. 오래된 장소는 낯설어졌다. 머물 곳 없음을 감당해야 하기에 천국은 아득하다. 떠날 곳 없는, 남은 자들의 땅.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알지 못할 새로운 출발에 서 있을 뿐이다. 미래란 어떤 등가물도 가지지 않는 전적인 낯설음이다. 새로이 시작할 나날... 익숙한 세계는 오히려 의미를 잃은 세계이다. 익숙함은 낯설음을 통해 솟아나야할 자신에 대한 이해를 숨기고 불안을 감춘다. 낯선 것만이 세계를 충만케 한다.

자유란 그러므로 전혀 새로운 어딘가로 되돌아오는 힘이다. 그녀는 자유롭다. 떠나보낼 수 있는 자만이 다시 오는 새로움을 진정한 새로움으로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새로움은 그러나 익명으로부터 솟아나온다. 타인의 방은 내가 열어 밝히는 곳이 아니다. 미래의 시간은 스스로 열려온다. 이른 봄, 높이 피는 목련처럼. 기다림을 말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땅의 빛나 보이는 것들은 어쩌면 환각 위에 세워진 성채다. 믿음, 사랑, 편견... 모든 견고한 것들은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

 

 


사랑에 관한 우화를 통해 세속의 진실을 말한다. 원하는 바대로 살고 싶지만 원하는 게 무언지 우린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합리란 거의 편견에 가깝다. 자신의 숨겨진 내부로부터 솟아나 드러나는 낯설음을 정직하게 감당할 용기가 있는가?

익숙하던 것들이 낯설어져 오고 혐오하던 것들을 가장 소중하게 용납해야 하는 계절. 가을이란 철모르는 한 때를 지나서 흘러간다. 그러나 우린 어쩌면 영원한 천국의 가을을 거닐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풍숲 사이를 걸으며 누리는 저 아름다운 한 때가 가장 가혹한 시련일 수 있음은 가을이 아니라면 어느 계절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