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책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 다른 곳으로...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2003)
감독 : 소피아 코폴라

출연 :

 

어디선가 <화양연화>에 빗대는 스무자평을 보았다. 비올라였던가, 아니면 그 음역에 닿는 바이올린이었던가. 갈망처럼 깊고 낮게 가던 음악에 실려 느리게 흐르는, 불가능한 사랑. 침묵으로 묻어둔 한 시절의 빛. 아니, 빛보다 더 빛나던 그림자. 그게 <화양연화>였다. 장만옥과 양조위의 눈빛과 몸짓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했던 아름다운 멜로였다. <화양연화>와 비교하기엔 조금 딸리지만 나쁘진 않다. 다만 더 건조하고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전혀 다른 이야기다.


멜로를 피하려는 듯 가장자리를 천천히 더듬어가는 이런 영화들에선 배우 선정과 연기력이 결정적이 아닐까 싶다. 파삭하게 지친 남자의 얼굴은 코믹하던 옛모습이 어른거려 오히려 그럴듯하고, 스칼렛 요한슨이란 앳된 여배우도 쉽지 않는 역을 뛰어나게 소화한다. <판타스틱 소녀 백서>는 보지 못했지만,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호스 위스퍼러>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본 기억이 어렴풋하다. 둘 다 사춘기를 꽤 힘들게 지나가는 조역이었던가.

음악은 글쎄, 좋았던 거 같은데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둔해서일까, 넘 자연스러워서일까?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퇴폐적 나른함이 가득한 재즈의 스탠더드, ‘마이 퍼니 발렌타인’를 패러디한 곡일까?

 

 

역시 제목 번역은 욕지기가 날 정도로 터무니없다. 우리말 제목이 최소한의 암시는 담았겠지 싶었는데 이거야 원...

영화를 보며 동양인으로 많이 불편했다는 점이 수긍이 간다. 일본인들은 더했겠다. 어떻게 보면 lost in translation 이란 제목 자체가 불쾌하다. 주인공들은 일본을 그다지 이해하려 애쓰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원숭이스러움을 경멸하는 시선을 애써 감춘다. 돈 벌러 억지웃음 지으러 와서 젠 체 하는 꼴이란.... 

뭐 이 따위야... 했는데 차차 그게 아니구나 싶었다. 오히려 영화가 쉽게 말랑해지지 않게 하는 의도적인 강조일까? 사실, 우리도 외국에서 알아듣지 못할 소음이나 시선, 그들만의 우스꽝스런 짓거리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비슷한 걸 느낀다. 낯선 곳에서 내가 멍청해지는 거나 그들을 멍청하게 여기는 거나 그게 그거다. 사람들은 늘 후자를 택한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난 오히려 감독의 그러한 냉정한 시선을 높이 사고 싶다.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이해하는 척 하는 데서 터무니없이 신비화나 근거없이 낮추어 보는 편견이 나온다. 대표적인 예가 <라스트 사무라이> 같은 기이하고 불가해한 코미디... 

어쨌건 바로 그 점, 굳이 적극적으로 덤비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낯선 문화 속에 던져진 현실이 이 영화가 솟아나는 곳이다. ‘불가능’이란 인상의 바다가 다른 어떤 가능성의 장소가 된다.

환멸이 가능케 해 주는 것이 뭘까...? 영화는 그걸 차분하게 보여주려는 듯하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서양철학자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란 그가 고향이 아닌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 머물렀기 때문에 가능했다란 주장, 전혀 일리가 없진 않다.


언어의 고도孤島,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곳에서 사라질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다시 돌아오기. ‘새로운’이란 형용사의 영원한 매혹. 다른 언어와 문화의 바다에 표류하는, 지친 남자와 외롭고 불안한 여자. 여자의 젊음 위에 드리워지는 남자의 나이와 키의 그림자...

‘다른 곳’에 가면 누구나 떠나온 곳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림자, 멀리 있는 것이 아득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그림자가 되어 있다는 것. 자신을 끌고 가는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을 때 길은 보일 것이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두 가지 방법뿐이다. 길을 묻든가, 그게 싫으면 헤매든가.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는 일에 디따 지친 나머지 길을 묻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짜증스럽게 헤맨다. 그러다 무슨 대단한 거라도 발견한 양 ‘이제 난 다르게 살고 싶어’ 라고 떠벌인다.

저 상투적인 대사는 침묵 속에 던져져야 마땅하거늘... 방정맞은 그 말이 <화양연화>와 이 영화를 질적으로 차별짓고, 동과 서의 정서를 극명하게 갈라놓는다. 많은 미국 영화들처럼, 너무 멍청한 건지 관객에게 자상한 건지, 아니면 그들의 종교가 되어버린 가족의 가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란 건지... 어쨌건 그 목소리가 그나마 나지막해서, 또 다른 말의 울림을 얻지 못하고 사라져서 다행이라 싶다.


첫 장면은 놀랍도록 아름답다. 시선을 등지고 위와 아래를 나누는 몸, 세상을 하늘과 땅으로 나누는 몸, 부질없이 상품화된 몸이 과잉인 요즘 저 몸은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일어서지 않는 수평선, 하늘과 땅이 그곳에서 하나로 흘러간다, 아니, 그득 고인다.

그게 뭐, 사랑이라면 글쎄, 조금 쓸쓸할 테고,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시선, 묵묵히 들여다보는 눈동자 같은...

 

 


마지막의 여운도 좋다. 역시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하지만 정반대의 표정을 지닌다. <화양연화>의 남자는 폐부 깊숙이 묻어 두었던 한마디를 앙코르 와트의 벽에 침묵으로 묻지만, 이 영화의 남자는 품에 안긴 여자의 귓속에 묻는다. 한 시절의 봉인과 새로운 시작의 암시. 동과 서의 차이가 여실히 확인되는 대목이며 두 영화를 비교 불가능하게,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영화로 만드는 대목이 아닐까? 

[lost in translation]이란 제목은 역설적이다. 의사소통의 불가능이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듯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하다. 말은 허위와 공허도 실어 나른다. 언어가 같은 아내와 남편들이지만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들 모두 떠나온 곳과의 대화에 실패한다. 말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은 이미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잠재한 불가능을 드러나게 했을 뿐이다.

<화양연화>와 조금이나마 비슷해지는 대목이 있다면 또한 여기가 아닐까. <화양연화>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침묵에 있음을 보여준다. 꾹꾹 눌러 말을 삼키며 흘러가던 그 시절이 화양연화였다고 말이다.

바위벽과 연인의 귀는 얼마나 멀리 있는가? 언어와 침묵의 거리일까? 그건 아닌 듯하다. 귀에 속삭이는 언어는 어쩌면 말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유통될 수 없는 말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비밀에 속하기에 침묵에 더 가까울 것이다. 말이 불가능한 곳에서 가능한 것과, 차마 말할 수 없는 것...

그래서 lost in translation은 다시 해석된다. 말로부터 사라지기. 언어는 그들이 온 곳이다. 가족이 있는 곳이다. 그들이 벗어나고 싶은 곳은 일본이란 장소가 아니다. 새로움이 없는 세계, 말이 있으나 소통이 불가능했던 모든 곳이 그들이 벗어나고 싶은 곳이다. 의사소통의 불가능이란 사라진 환상, 환멸의 은유다. 일본은 환멸과 재생의 땅이 된다.

 

 

소음만 가득한 듯한 일본이란 낯선 별에 불시착한 남과 여. 그들은 제대로 길을 잃었다. 거기서 그들은 다른 곳,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곳을 찾은 듯하다. 말이 길을 잃었기에 그들은 서로의 귀에 속삭여 줄 수 있는 진실의 언어를 찾은 것이다. 그 곳에 말이 있었다면, 낯설지 않은 그들의 말이 있었다면, 낯선 그들이 서로 만날 수 있었을까...?

 

 

 

'영화,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0) 2007.09.01
인 더 컷  (0) 2007.09.01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0) 2007.09.01
솔라리스 - 사랑과 영혼 SF ?  (0) 2007.09.01
사마리아 - 우리는 기적을 믿는가?  (0) 2007.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