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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솔라리스 - 사랑과 영혼 SF ?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솔라리스 (solaris 2002)
감독 : 스티븐 소더버그

출연 :

 

죽음은 지배하지 못하리라

알몸의 죽은 자들 하나가 되리니

바람과 서녘달 속 그와 함께 머물리라 

뼈는 씻기고 씻긴 뼈마저 사라져도

팔꿈치와 발치에는 별들이 함께 하리라

미친다 해도 온전할 것이며 

바다 속에 가라앉아도 다시 솟으리라

연인은 가도 사랑은 잃지 않으리니

죽음은 지배하지 못하리라


 - 딜런 토머스의 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 중에서 - 

(영화 대사를 까먹었기에... 엉터리 번역을 양해바람^^)


사랑하는 이는 죽어 별이 된다. 바람과 서녘달의 벗으로 머문다. 이는 영원한 소망이다. 이승의 못다 한 사랑은 어느 먼 별에서 완성된다. 견우 직녀가 그랬고 별자리로 남은 서양 신화의 숱한 사랑들...

 

뜬금없이 웬 싯구절? 주인공들이 읊조렸고, 영화의 주요 모티브다. 소더버그의 리메이크 <솔라리스>를 타르코프스키 원판과 차별하는 힘일 듯도 하지만, 스타니슬라브 렘의 원작 소설이나 타르코프스키판은 보지 못했다.

영화는 짧은 시간에 기억, 가상현실, 죽음, 고독... 등등의 코드를 걸러낸다. 근래 환타지 기법의 발전에 힘입어 부쩍 쏟아졌던, 기억이 인간의 정체성이라느니, 현실보다 더 리얼한 가상현실 또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가짜인간이라느니 하는 포스트모던한 영화들을 연상시키지만 결국에는 낡은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이 영화가 타르코프스키의 리메이크를 벗어나지 않는 미덕이 여기 있다. 소더버그는 고전적으로 답한다. 사랑(!)이라고. 그 낡은 것(?)을 고독하고 황폐한 우리 영혼의 정수리에 줄줄 들어붓는다.

재미로 따지자면 그닥 점수를 줄만하지 않다. 그러나 저 러시아 몽환적 사실주의자(말이 되나?)의 헐리우드식 번역으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거 같다. 좀 더 느린 호흡으로 촘촘히 짰으면 싶은데 대사가 앞질러 간다(헐리웃 아니랄까봐!). 감독의 장기인 교차편집은 지루하지만 효과적이다. 미국 영화 특유의 오버액션이나 지나친 단순명료의 유혹도 용케 뿌리치고 있다. 솔라리스 행성의 미묘한 색감과 이미지, 행성 궤도를 도는 우주정거장의 모습은 스펙터클보다 두려움과 동경의 상반된 정서를 표현하듯 적당히 신비롭다. 

    

 


‘스노’란 인물의 비지터(기억 속 인물이 현실로 나타나는 현상)는 정말 독특하다. 그는 분열된 자아, 믿음 없는 니힐리스트이며 결단하지 못하는 숙명론자이기도 하다. 멋진 반전으로 폭로되는 그의 정체는 믿음 없는 시대, 거울의 자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스노가 믿음 없는 자라면 ‘고든’ 박사는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철저히 고수하는 근대적 주체다.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그는 과학의 합리성만을 신봉할 뿐 아무도 믿지 않는다. 솔라리스가 일으키는 신비한 현상을 과학으로 규명하여 유일한 현실인 지구를 보호하려 한다. 현실과 가상, 그의 이분법은 명쾌하다. 그는 ‘앎이 곧 힘’이라는  근대 이래 가장 강력하고 현실적인 윤리를 대변한다.

정신과 의사인 주인공 케빈. 그는 꽤나 착잡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아내 레아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 속에서 살아간다(영화는 그 무의식의 억압을 드러내 해소하는 심리학적 치료과정으로도 읽힌다). 죄의식은 아내의 비지터로 돌아온다. 그가 비지터 레아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기억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녀는 누구일까? 죽어버린 레아가 있고 비지터 레아가 있고 그 사이 모호하게 떠도는 레아에 대한 기억이 있다. 비지터 레아도 케빈을 통해 점차 자신이 누군지 깨닫고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사랑하며 마침내 자기를 희생한다. 하나의 사랑과 두 번의 죽음. 그녀는 믿는다. 지구도 여기도 아닌 어딘가에 둘이 함께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죽은 그녀의 손에는 언젠가 그들이 함께 했던 노래가 쥐어져 있었다. 그 사랑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어떤 결단을 가능케 한다. 

지구와 솔라리스 사이의 양자택일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푸른 별에서 온 케빈은 어느 쪽을 택할까? 지루하던 영화가 제법 속도를 내는 파국의 순간, 케빈의 결단으로 솔라리스는 정체를 드러낸다. 비지터가 인간이냐 아니냐, 그녀가 진짜냐 가짜냐의 질문은 우주 공간 속으로 사라진다. 지구라는 현실이냐 환상의 사랑이냐 역시 사이비임이 폭로된다. 진리는 합리를 초월한다.

 

 


소망하나 믿지 못하는 사랑, 먼 솔라리스. 인간의 능력만을 과신하는 과학은 솔라리스를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솔라리스는 소망의 별이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초월하는 능력이며, 믿음이며, 자기희생하는 사랑의 힘이다. 영화의 결말은 사랑이라는 믿음의 힘을 보여준다. 유치하게 말해, ‘믿음 소망 사랑’은 셋이지만 하나다. 그 삼위일체는 우리가 꿈꾸는 별이 솔라리스임을 암시한다. 솔라리스는 지구라는 푸른 별의 꿈, 꿈꿀 줄 아는 생명체인 인간들의 영혼 위에 머무는 불멸의 성좌다. 우리의 유일한 현실인 지구의 의미는 단지 산소 충만한, 생명체의 발생과 서식의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이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솔라리스는,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힘을 믿는다면 마침내 이루어지는 구원된 이 땅의 모습이기도 하다.


횡설수설... 이쯤 되면 완존 <사랑과 영혼 SF>네... 소더버그 너머 타르코프스키의 그림자를 더듬거리다 ‘사랑과 영혼’의 별, 솔라리스에 불시착하다?

아무렴 어때, 그게 헐리웃 영화 보는 재미인 걸... 그럴수록 타르코프스키가 더욱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