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편안하게 본 영화다. 꽤 부드러워진 영상도 한몫한다. 종래 그는 회의하고 절망하는 구도자처럼 보였다. 그런데 구원의 암시를 얻은 걸까? 그는 이 영화가 용서와 화해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윤회를 소재로 한 전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도 일말의 암시는 있었다. 비록 마지막에서 가차 없이 뒤집어지지만, 노승과 물에서 솟아오른 부처가 있었다.
이번엔 대놓고 기적을 말한다. 기적이 없다면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고. 낯선 건 아니다. 잉그마르 베리만이나 타르코프스키가 어른거린다. 이 영화에서 기적은, ‘끝내 저버리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음’이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새롭게 만날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이 우리를 구원한다.
김기덕은 영화는 대중성이 없는 편이다. 종교와 시의 문법을 - 문법이라기보다 이미지 - 구사하는 그는 낯설다. 고도 자본주의,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동북아 유교 문화권에 오래 속했던 우리들을 그가 설득하긴 힘들다. 게다가 근대 과학의 정신과 자본주의는 저런 신성과 영감에 닿는 상상력들을 비합리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해 버렸다.
김기덕은 근대와 함께 망각되고 폐기되었던 원초적 감성이나 정서들을 불러온다. 익숙지 않은 것들을 들이대어 힘들게 한다. 그러나 그게 그의 힘이다. 그의 이야기 구조는 치밀하지 못하고, 대사는 거칠며 때로 안이하다. 그의 탓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의 대사와 이미지들은 언어 이전의 존재를 건드리고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어떤 울림 같은 느낌을 준다. 객관적 현실 이전의 원초적 장소들로 돌아가 있는 자연 풍경. 죽은 자와 만나는 곳인 산소, 안개 잠긴 산은 그들을 현실 세계로부터 멀리 데려다 놓는다. 그 곳들은 본래대로 있게 하는 곳인 동시에 세계를 되돌려 세우는 곳이다.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단풍들은, 세상은 저리 아름다운데 우린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는다. 인물들의 불가해하고 고통스런 표정들... 그 모든 것들이 말로 온다면, 말은 해석이 되고 거칠고 딱딱한 개념으로 굳어버릴 것이다.
친구간의 사랑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게 하는 건 아니다. 아버지와 딸도 대화하고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욕망과 꿈속에 사는 인간들의 세상은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여태 김기덕이 보여준 것은 근원적인 소통 불능의 세계를 욕망하고 소유하며, 이해하고 이해시키려 드는 인간들의 관계가 빚어내는 지옥도였다. 자유나 구원은, 개인적인 도피가 아니라면, 그러한 소통불능의 욕망과 관계에 대한 해법이 되어야 한다. 김기덕은 이성적 이해나 언어의 소통과 같은 근대의 코드가 아니라, 침묵을 통해 인간이 존재의 근원적인 자리로 돌아감으로써만 달라지고 새로워질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재영(바수밀다)은 사랑을 품은 채 - 환상이라 하건 말건 - 원조교제를 한다. 여진(사마리아)은 사랑했던 친구의 죄를 씻고 자신과 그 남자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친구의 행동을 되풀이한다. 그런 딸을 보호하려는 아비는 분노가 지나쳐 마치 복수하는 가부장처럼 보인다. 용서할 수 없는 딸, 그는 아내의 무덤 앞에서 목이 다 막힌다.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빗나간 우정이나 가부장적 부성애의 오해를 무릅쓰고, 왜 하필 친구이며 가족일까?
사랑은 평등하고 상호적인 마주보는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현저한 힘의 불균형이며 일방적인 것이다. 바수밀다의 지극한(순진한?) 사랑과 사내들의 탐욕, 사마리아의 미친 짓처럼 보이는 용서 행각, 용서할 수 없는 자식이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가슴 앓는 아비... 사랑은 그 이름 없는, 언어 이전의 날것들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사랑도 없고 이해도 없다면 친구나 가족은 남보다 더한 원수일 것이다.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이 구해 준 자는 그냥 남이 아니라 가장 자신을 멸시하던 자가 아니었던가?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관계. 그것이,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사는 인간의 의미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웃’이란 그 다름이 솟아나는 곳, ‘타자’를 뜻한다. 여태 김기덕은 화해 불가능한 그 ‘다름’들의 세계를 주로 드러내 왔고, <나쁜 남자>에선 이상하게 엉킨 ‘다름’의 동거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로써 거듭 나는 꿈은 딸의 꿈이자 아버지의 꿈이다. 죄의식과 분노는 겹쳐진다(이번 물은 전작들의 모순된 이미지와 달리 상투적이다. 영화의 안이함이자 부드러움). 그러나 그 아버지는 또한 모든 아버지 아니던가? 그가 바로 죄인이다. 여진 역시 재영의 자리에서 희생했었다. 아비는 딸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같은 자리, 혹은 더 낮은 자리에 선다.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 딸의 자리로 돌아가 화해한다. 분노는 사라진다. 비록 각각의 사회적 의미는 다르거나 정반대일지라도, 바수밀다의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딸에 대한 사랑은 마침내 하나로 겹쳐진다. 그리고 아비는 떠난다.
여진도 새로워져야 한다. 재영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그 아비의 딸로도 새로 태어나야 한다. 구원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기적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것이다. 사랑은 세상을 이루는 모든 존재의 ‘다름’의 인정이다.
<와이키키 브러더스>에서 룸싸롱에서 벌거벗고 기타를 연주하던 이얼이 아버지역을 맡아 뛰어난 표정 연기를 보여준다. 곽지민과 서민정이라는 안면 없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꽤 어려 보이는데, 속에서 우러나는 저런 표정이 가능한 배우를 발견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푸른 물 속 깊이 끌고 가는 듯한 에릭 사티의 피아노 음악이나 알지 못하는 기타곡들도 효과적이고 듣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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