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Belle De Jour (1967. 102분)
감독 :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출연 : 까뜨린느 드뇌브(Catherine Deneuve). Jean Sorel. Michel Piccoli.
우리는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갈까?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의 무엇을 아는 것이며 어떤 그를 아는 것일까? 인간이란 도무지 규정할 수 없음과 닮음꼴이다. 나에게 너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원한 수수께끼다.
'양면성'은 진부한 문법이다. 영화는 양면성을 넘어 각각의 면이 서로에게 어떤 필연성도 가지지 않는 다면의 세계를 그려 보인다. 시공간은 더 이상 연속과 연장으로 표상되지 않는다.
단절되고 독립된 각각의 세계를 흘러가는 하나이자 여럿인 영혼이 있을 뿐이다. 요조숙녀와 창녀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고명한 의사는 매저키스틱한 유희에 탐닉하는 환자이기도 하고, 근엄한 신사는 죽은 딸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요조숙녀의 꿈같은 죄의식의 현실과 창녀의 현실적인 꿈. 어느 것도 진정한 현실이 아니고 어느 것도 더 이상 꿈이 아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얽혀 있을까? 다중의, 다면의 현실 또는 꿈이 만나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입체파 그림의 결과 아닌 의도처럼, 보여주고자 하는 각자의 모습만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을까? 아니, 각 현실은 끊임없이 교감하고 소통한다. 다면성은 단면의 순수한 완전함을 지탱하는 근거가 된다. 꿈은 현실의 꿈이고 현실은 꿈의 꿈이다. 또 그 반대이기도 하다. 나비의 꿈을 꾼 장자가 곧 장자의 꿈을 꾼 나비이듯이.
장자와 나비를 잇는 것은 무엇일까? 나비건 장자건 그건 곧 '나'의 꿈이다? 그럼 나는 그 꿈같은 현실, 현실 같은 꿈의 미로에 얽혀든 또 다른 한 마리 나비일 뿐인가? 꿈의 무게든 현실의 무게든 크면 클수록 나는 짓눌린다. 각 단면의 벽은 너무나 얇고 투명하며 서로 맞물려 있어 그것은 한 순간 돌이킬 수 없이 서로를 찢어 놓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면, 너는 무엇일까? 무수한 나의 단면에 비친 알 수 없는 객체의 또 한 단면일 뿐일까? 그러나, 꿈속의 네가 갑자기 뛰쳐나와 현실의 나를 덮친다. 현실의 너는 핏기조차 가신 채 창백히 누워 있다. 그러나 동시에 너는 나의 꿈을 후려치는 채찍이 된다.
부뉴엘 감독은 여기쯤서 슬그머니 입을 다문다. 그저 나는 나비이고 동시에 장자라고 말할 뿐, 진정한 구현에 이르는 길은 보여주지 않는다. 꿈은 계속되리란 희미한 미소만 남긴 채...
장자와 나비를 잇는 끈을 굳이 찾아야 할까? '나'란 욕망의 표지일 뿐 그 배후의 실체가 아니다. 내 천의 얼굴 하나하나는 더 이상 '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나의 천의 얼굴이 아니라 천의 얼굴이 곧 나이다. 나는 남자인 동시에 여자이며 숙녀인 동시에 요부다. '나'란 분열된 욕망, 그 자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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