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 밀목재 - 황적봉 - 천왕봉 - 쌀개봉 - 동학사
황적릉에서 쌀개봉 천황봉을 거쳐 신원사 쪽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공단 직원을 만나는 바람에 엉뚱하게 동학사로 내려온 산행.
천왕봉의 누런 빛깔 웅장한 암릉과(수십m 밧줄)과 이어지는 바위 날등길이 압권이다. 다가가며 보는 천황봉과 지나온 길 돌아보는 맛이 뛰어나다. 건너보이는 쌀개릉과 자연성릉의 시원스런 하늘금과 잎 진 계절에 드러나는 섬세한 암릉미는 계룡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라 할 만하다.
황적릉
장군봉 능선에서도 느낀 바지만 계룡산은 아주 격조가 있다. 높지 않으면서 웅장하고 사방 힘차게 뻗치면서도 경박하지 않다. 암릉은 화려하기보다 절제된 아름다움과 힘을 보여주며 어떤 내면성마저 느끼게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뭇 사람들이 신운명 개벽의 꿈을 계룡산 자락에 묻곤 했을까...?
권력 구조의 변화와 세계 개조의 꿈을 지형지세에 비추어 고무하는 것은 일종의 소박한 풍수지리인 동시에, 인문적 가치 중심으로 산과 물의 형세를 바라보고 자연을 품평하는 유가의 공간적 세계관의 한 변주이기도 했다. 그것은 동북아시아 문화권이 오래토록 공유해 온 중세적 사고의 일면일수도 있겠는데, 여태도 우리는 은연중 그렇게 자연을 바라본다. 도시가 과밀해지며 생활 터전이 각박해질수록,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날의 삶이 피폐해질수록 그 태도는 어쩌면 더욱 심해질지 모른다.
문명을 벗어나 자연 자체와 만나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 자연에 대해 당대적인 가치를 투사하고 감정이입하는 짓은 바로 문명을 살아가는 인간현상의 일부다. 그래서 산 오르는 일은 나름 예민한 현실적 관점을 내포하는 문화 행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산을 다니며 스스로도 산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고 수없이 다양한 산행 태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심심풀이 땅콩으로 몇몇만 짚어보자...
새로운 산만 줄기차게 찾아다니는 수집가형. 이는 다분히 성과에 집착하는 산업화 시대의 감성이 반영된 스타일이다. 반드시 정상석을 챙기고 그 모습이 초라하면 안타까워한다. 또 산세가 좋음에도 이름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데, 가시적으로 드러난 이름이 곧 산행의 수확물이며 이름이 없으면 얻은 결과도 없기 때문이다. 산 이름과 주등산로에 대한 이들의 해박은 놀라울 정도라 수백을 넘어 천수백에 이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이름 있는 산이 사천여개란 풍월도 이들에게 들은 것이다. 단, 이들은 특정 산의 다양한 코스와 모습에는 꽤 약하다.
막무가내 앞만 보고 달리는 검프(포레스트 검프!)형 또는 운동광형. 대간(정맥) 종주자들 중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하는 듯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온 몸의 모세혈관이 전율하는 맛으로 걷고 또 걷는다. 마라톤의 ‘러닝 하이’ 현상에 탐닉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이들은 짧은 코스, 그저 어슬렁거리며 구경이나 하다 오는 코스는 견디지 못한다. 그들의 감각은 아드레날린 과잉 분비에 지배되어,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맛보는 따위의 오감은 현저히 퇴화되어 있다. 극단적으로 풍경에 거의 무감각한 경우조차 있다. 그 점에서 보면 아주 성찰적인 내면의 소유자들일 거 같은데 다 그렇진 않은 듯하다. 그저 산길을 끝없이 속도감 있게 걷는 맛을 즐기거나 오로지 완주란 실적을 위해 걷고 또 걷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수는 앞의 유형(수집가)과 겹치기도 한다.
다양한 산, 유명산보다 큰 산 한 둘이나 몇몇을 골골이 찾아다니는 탐험가형. 지리산 매니아, 설악산 매니아란 식이다. 이들의 길 찾는 감각은 거의 동물적이다. 그리고 쉽게 품평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리나 설악은 경외의 대상이지 감히 품평할 영역이 아니다. 그 경외가 신비화하는 산의 이미지는 때로 우스꽝스러운 미신 수준이지만, 지나치지만 않다면 매우 신중하고 깊이있는 태도라 할 만하다. 특정 산에 대한 이들의 구체적인 정보력은 대단하여 어떤 산을 좀 더 다녀보고 싶을 때 많은 도움이 된다.
오직 풍광에만 몰두하는 산놀이파형(물론 산을 오르지 않고 산을 빙자해 기슭에서 노는 부류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들은 늘 유유자적이다. 속도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고 하는데, 빨리 못 가는지 안 가는지 남들은 알 도리가 없다. 또 시시콜콜 날씨와 계절에 따른 다양한 풍경을 탐하며 원근경 조망을 중시하지만, 감각의 과잉착취인지 감성의 풍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유별나게 조망을 찾고 좋은 경치를 만나면 늑장을 부려 때로 단체 산행의 시간 차질을 초래하지만 스스로는 남들보다 한결 재미있게 산행한다고 주장한다.
이 네 가지는 다양한 산행 스타일 중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따로 나누지 않았지만 지리학자나 수도사형도 있다) 또 특정 스타일에만 전적으로 속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이 몇 스타일의 혼합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는 어떻게 여기든 남들이 객관적으로 보면 보다 두드러지는 경향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근래의 호감 스타일은 산놀이파. 수집가나 검프형은 조금 비호감이고 탐험가형은 비동감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남들이 보기엔 수집가나 검프이기도 하며 때로 탐험가형이 되기도 한다. 가고 싶은 곳은 많아 과욕을 부리거나 속도에 집착하기도 하고 경험과 능력에 비해 무모해지기도 한다.
그렇듯 유형이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거라, 이리 보면 이거고 저리 보면 저거에 지나지 않는 것. 요컨대, 유형 나눔 자체가 산에 못가서 저지르는 주관적인 심심풀이 말놀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얘기...
천황봉
황적능선과 천왕봉 암릉의 여러 모습들
쌀개릉
자연성릉과 은선폭
자연성릉
문필봉릉
자연성릉
쌀개봉
은선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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