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변산 갑니다. 광활한 김제 만경 평야를 가로질러 달립니다. 지평선을 지우는 안개로 번지며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칠석날 비 오면 십리에 천석을 감한다는 원망이 따가웠음인지 차창 너머 비는 고요해 보였고, 곰소만 잿빛 뻘도 어두웠습니다.
산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먼 폭포, 휘청이며 내리는 물줄기를 희롱하며 산 오르는 구름만 망연히 봅니다. 엷어져가는 비를 따라 깊을수록 더 환해지는 전나무 숲길을 걸어 내소사 들었습니다. 수련 연못이 가장 먼저 눈에 듭니다.
푸른 계절을 섬겨 오래 기억하는 꽃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언제 어디선가 보았던 햇살 맹렬한 여름 한낮의 수련은 물에 빠진 명상이거나 터질 듯 희고 붉은 잠이었습니다. 오늘, 가는 비 내리는 흐린 연못의 수련은 다만 흘러가는 모든 것들의 중심, 허공인 하늘을 담아 받들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의 긴 터널을 건너온 격렬한 상실과 같은 고요입니다. 꽃이 욕망이라면 그것이 다다른 길은 참혹하도록 아름다운 절정입니다.
가는 계절의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한두 점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집니다. 빗방울은 숲 그림자 잠긴 수련 연못에도 떨어집니다. 이름과 달리 수련(睡蓮)은 잠들지 않고 빗속에 고요히 깨어 있었습니다. 깨어 있는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빛의 방울인 양 눈을 깜빡이며 물을 간질입니다. 물의 낯에 쉼 없이 파지는 볼우물을 희롱하며 깔깔댑니다. 그들의 수련은 섬입니다. 빗방울의 파문을 사로잡습니다.
수련은 화염 없는 불꽃입니다. 땅으로 태어나 허공 중에 피는 꽃은 끊임없이 휘발하는 시간의 바닥을 들여다보지만 수련에겐 그런 현기증이 없습니다. 수직의 맹렬함을 물속에 감추고 물 위에 누워 하늘을 응시하는 낮고 낮은 절정, 몸을 잊어버린 눈입니다. 평소에는 잠든 눈이지만 오늘은 뜬 눈입니다. 수련이 앉은 자리는 저마다 물의 중심이며 그 꽃잎이 밤낮을 생애 삼아 열고 닫는 것은 흔적만 환한 저 텅 빈 것들, 꽃 가운데 고이는 하루의 빛입니다.
몹시도 좋았다던 산행 끝낸 이들의 표정이 밝습니다. 오는 길에 들른 곰소항도 물 차오르고 덩달아 환해집니다. 비록 제대로 산행은 못했지만 맨 몸으로 잠시 다녀온 관음봉 오름길의 조망과 내소사 수련의 기억만으로도 넉넉했습니다. 소주 몇 잔 마셨습니다. 술빛이 물들면 염염(艶艶) 당신은 그리도 곱고 두근대는 나는 또 길을 잃습니다.
곰소만
봉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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