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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전라 충청권

민주지산 - 능선에서 푸르게 물들다(030921)

by 숲길로 2007. 6. 4.
 

집 나서는 새벽, 북쪽 하늘 멀리 팔공산 준령이 선연하다. 모진 태풍 지나간 자리 굽어보는 서슬 푸른 날망이 어김없는 계절의 눈짓인 양 얄밉고도 반갑다. 잿빛 구름 몇 조각 높이 걸린 동녘은 시원스레 피어날 하루를 예감한다.

햇살 드는 차창을 커튼으로 가리고 짧았던 밤을 졸음으로 잇는다. 추풍령 휴게소,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눈부셔 굳은 몸이 잠시 비틀거린다. 대기는 맑고 서늘하다. 지루하다 못해 그 끝을 처참히 뭉개버린 여름이 언제였더냐 싶다. 능선산행으로는 최고의 날씨다. 황간 I/C 벗어나 상촌으로 접어드니 마침 장날이다. 간만에 누리는 햇살에 그간 찌들었을 표정과 일손이 그나마 밝아 보인다. 


오늘 산행은 각호산으로 올라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 거쳐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다. 산행 기점은 물한 계곡이다. 맑은 물이 흐르지만 곳곳에 넘어지고 떠내려 온 나무들, 기슭에는 겨우 살아남아 뿌리 드러내고 비스듬히 매달린 나무. 사람이나 저들이나 직립해서 살기 수월치 않음은 매일반이건만, 푸르러 오는 하늘빛은 무심으로 아득하다. 지금 저토록 높아지는 하늘이지만 사람의 일이란 늘 한 철 앞서 그리는 것, 문득 벽으로 와 닿을 눈발을 생각한다. 그 때쯤이면 상처들 더욱 은은하여 묵묵해질까. 그러나 여름 내내 아래위 물길에 시달렸던 골짜기는 숫제 길을 끊고 돌려놓았다. 각호골 비바람 거침없어 산 오르는 발걸음에 내어줄 힘조차 다했던 걸까, 생사의 각박함이 산중에도 깊었으니, 시절의 수상함은 죄 없는 산천도 피해가지 못했다.


골 따라 완만히 이어지던 길이 가팔라진다. 왼쪽 높이 각호산이 보인다. 그리 멀지 않다. 치오르며 몸이 풀리자 곧 각호산에서 뻗어 내린 한 지릉에 닿는다. 그러나 숲은 깊다. 봉우리는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

드디어 각호산(角號 또는 角虎山1276m). 두 봉우리가 뿔처럼 솟아 정상의 이름을 다투기에 각호(角號)인가. 바위가 삐죽하여 전망이 더 나을듯한 건너봉으로 향한다. 오른쪽으로 가파르게 기어오른다. 사방 시원하게 전망이 트인다. 하늘은 푸르고 첩첩 검푸른 산줄기가 달린다. 멀리 서쪽으로 솟은 저 원만의 능선은 이름 넉넉한 덕유 향적봉이렷다. 스키 슬로프가 선명하다. 발아래 머잖은 곳, 도마령이다. 그리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다. 좁은 바위덩이에 오래 머물기가 미안하여 총총 내려선다. 올랐던 반대쪽이다. 로프가 매여 있어 한결 수월하다. 

제자리로 왔지만 각호는 이미 먼 산 그리움으로 이끌어 오는 자리가 된다. 산길 가는 이 어서 가라며 등 떠밀 뿐이다. 민주지로 향한다. 큰 기복 없이 오르내리는 능선길이 한가롭다. 모처럼 좋은 날씨, 등산 객이 많아 때때로 정체한다. 그러나 심심치 않을 만큼 왼쪽으로 툭툭 트이는 시야에 물한계곡을 에워싸고 거침없이 뻗는 능선이 싱그럽다. 고만고만한 봉우리 오르내리기를 몇 번, 정상 가까운 곳에 무인대피소가 보이고 식사중인 사람들이 있다. 내쳐 걷는다.


산 오른 지 어느 덧 세 시간. 더 디딜 곳 없어 고개 들면 민주지산(岷周之山 1241m) 둥근 마루다. 거침없이 펼쳐져 오는 삼남의 산하, 사방 검푸르게 파도치는 산줄기들... 까닭 없이 답답하거든 푸른 날 골라 민주지산을 오를 일이다. 벅찬 산 아래 터전도 잠시, 아주 잠시만 잊어두고 첩첩 굽이굽이 내달리며 휘저어 오는 푸른 출렁임에 둥실 몸을 맡겨 볼 일이다. 비록 욕망의 폐허를 일으켜 세우는 지친 푸르름일지라도 아직은 다함없이 베풀어 올 넉넉함이니.

서쪽으로 향적봉이 줄기 뻗어 남덕유 혹은 금원 기백의 능선으로 가로눕고, 남으로는 수도산에서 단지봉 거쳐 일렁이며 치솟는 불꽃, 가야산 상왕봉이 구름에 살짝 숨었다. 저 능선을 종주하리라 맘먹은 지 벌써 수년이지만 아직 이루지 못했기에 오늘의 그림은 한층 가슴 저리다. 뿐이랴, 오늘처럼 맑은 날이 아니면 도저히 떠오르지 않을 북으로의 먼 지평, 비록 무뎌진 이빨이지만 저 잿빛 능선은 혹시 속리가 아닌가... 동으로는 삼도봉 지나 1124봉 거쳐 계곡을 요새마냥 감싸고 달리는 능선이 우람하고 그 너머 동북으로 검게 가로뻗은 줄기는 황악산인듯...    

민주지산 정상은 제법 붐빈다. 때로는 소음도 눈부시다. 투명한 대기는 난무하는 말의 갈피들을 날름날름 거두어 갈바람 반짝임으로 떨구어 놓는다. 모든 것 저리도 반짝이는... 구월!

어쩌면 산정(山頂)은 대지의 한 소박한 울림, 저 막막하게 깊고 푸른 허공을 안아내지 못한다면 그저 한 줄기 지구의 주름살일 뿐이다. 삶의 지평이 죽음의 크나큰 공허로 하여 그러하듯이, 산은 자신이 확보한 물리적 공간보다 더 큰 하늘을 담아내며 하염이 없다. 모든 비어있는 것들은 찬란하다. 오직 침묵의 무게로 드리워진 하늘. 天地는 不仁이라 했던가, 저토록 어제의 참혹함 주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으로 푸르러만 간다. 허나 해마다 오는 가을이 매양 곱기만을 바라랴. 혹독했던 여름의 끝을 저만치라도 서늘히 건너와 줌이 고마울 따름이다.

맨살에 닿는 바람이 다르다. 바람보다 먼저 식는 몸이 계절을 앞질러 간다. 가을 오는 민주지산에 서면 누구나 몸 속 한 줄기 차디찬 강을 느낀다. 마음보다 바람보다 먼저 줄기 풀며 남으로 북으로 검푸른 기슭 향해 서늘히 흐른다.


민주지에서 석기봉(1200m) 이르는 길은 가끔 행렬이 된다. 석기봉 조금 못 미친 바람 없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늘에 앉아있으니 금세 으슬으슬해진다. 배부른 몸 끌고 석기봉을 오른다. 허공을 떠받치는 저 맹렬한 치솟음. 석기봉은 민주지 능선에서 가장 날렵히 솟은 삼각의 바위봉이다. 멀리서 보면 높이 비슷한 민주지산보다 더 강렬한 인상이다.

길지 않은 로프로 오르는 길은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왼쪽으로 바위 타고 오른다. 좁은 정상에 잠시 비켜선다. 문득 눈길 뺏는 독특한 모습, 마이산이다. 말이 아닌 토끼 귀마냥 암수 다정 쫑긋하고 귀엽다. 시야 좋은 날이면 마이산은 어디서나 곧잘 눈에 띈다. 오늘의 마이는 여태 본 중 가장 앙증맞다.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로 내려서니 봉우리 남쪽은 양지바른 널찍한 공터다. 삼삼오오 식사를 한다. 붐비지만 않았어도 비슬산 대견사지를 연상시키는 전망 좋고 볕 고운 거기서 느긋이 먼산바라기도 할 수 있었으련만... 석기봉 오르기 전부터 궁금했던 마애삼두불과 약수터가 그 부근이란 걸 나중에 알고 몹시 애석했다. 민주지 능선은 고대 신라와 백제의 각축지였다. 근거 없는 추측이나, 그 마애부처는 끊임없는 피의 각축이 끝나고 평화가 오기를 간절히 염원하던 어떤 손길에 의해 빚어지지 않았을까?

삼도봉 가는 길에 작은 정자도 있다. 삼도봉 방면과 물한리 내려가는 은주암골 갈림길쯤이다. 석기봉에서 삼도봉까지는 봄이면 진달래가 장관이라 한다. 그래서인가, 걷기 좋은 길이 제법 넓게 나 있고 가족 산행객도 꽤 보인다.  


경상 충청 전라를 하나로 불러 모아 솟은 삼도봉(三道峰 1177m). 우람한 삼도 화합비는 빛깔 덜 바래 생경한 느낌 가시지 않지만, 나눔 아닌 모음을 밝히는 뜻만은 높고 굳다. 삼남을 아우르며 잇는 줄기에 몸 심고 소슬 바람에 머리 씻는다. 한 세상 건너가는 벼랑에 선 양 지평이란 지평은 온통 막막하니 검푸른 산줄기로 일어서지만, 한 시절 빛나던 청록, 우리네 깜냥으로는 써도 써도 다 못할 탕진이 눈앞에 있느니... 그 푸르름 무량으로 퍼올려 오늘, 물기 걷고 구름 밀어내는 청정 하늘로 걸어놓는다. 사를 듯한 화염조차 한나절 없었던 계절이 단숨에 건너간다. 건너간 자리 텅 비어 산의 적막은 높고 깊다.

멀리 가파른 석기봉보다 삼도봉이 좋다.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을 받아주는 곡진함이 모여 산이 된다. 모든 간절한 부름에 묵묵 답하며 거기로 솟아있다. 산의 대답은 또한 크나큰 부름이다. 차마 사라져버린 남덕유 너머 먼 지리까지 드리워질 산빛의 울림을 그리게 하며, 구비 구비 자꾸 불러 모아 여기로 세운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지만 미련 남아 삼도봉 비킨 한적한 바위에 다시 머문다. 발아래 산줄기들은 틈틈 잘리는 허리를 먼 눈빛으로 녹음 이으며 건너가지만, 위로 가없는 계절의 하늘빛은 어쩔 수 없는지 한철 매달았던 필생의 사업도 서서히 막 내린다. 누릇해져 오는 산빛이 바람 맞으며 묵묵 허공을 건넌다. 북으로 눈 돌리면 하늘 닿아 아슬한 기슭 넘어가는 피안의 속리(俗離). 세상의 모든 가장자리가 저리 아득하고 깊기만 하다면 차마 고개 돌리지 못하는 사람살이의 폐허에도 꽃은 피리라.

삼마골 고개 내려서며 돌아보는 하늘, 오후 햇살에 빛나는 억새 무리로 바람이 든다. 서걱이며 네게로 기울어져 계절은 자꾸 깊어진다. 가는 길 또한 기울어져 해는 키 낮추고 둥근 지구의 기슭을 돌아간다.


저무는 시간 아래 새들이 난다. 어둠 밀려들기 직전 더욱 투명해져오는 허공의 까만 점을 잇는 선들의 율동이 된다. 산 오르는 일도 그와 같아서 - 저기 보아라, 울긋불긋 점점의 율동으로 무슨 헛것을 길어 나르는 자맥질인 양, 푸르름 다하는 거기 칼금으로 비워낸 텅 빈 하늘을 오른다.

절정을 내려서는 구월, 내림의 절정을 탐하여 우리는 산을 오른다. 빛과 바람과 물이 스며들어 또 한철의 사람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