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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전라 충청권

운주사(......)

by 숲길로 2007. 6. 4.

 

운주사에 가기로 해 놓고 꿈을 꾸었다. 이름이 흔들렸다. 雲住라고 가물거렸는데, 그게 아니라 雲舟였다. 구름을 헤집고 떠도는 배...

대지와 바위, 산과 숲을 들어 올려 바람과 구름 속에 놓는 저 장대한 꿈은 무엇인가. 온 산천에 푸르고 붉은 재생의 열병이 창궐하는 봄, 雲舟는 질식할 듯한 안개 속으로 떠올라 흐르는가.


불교의 般若龍船이 있다. 피안을 건너가는 배. 그러나 운주의 이미지는 종교 이전의 것이다. 한 계곡, 한 하늘을 잘라 지극한 염원의 배로 띄워내는 운주의 공간은 원형적 상상력으로 떠오르는 시적인 것이다. 돌로 굳은, 臥佛로 구현된 염원. 그 돌을 일으켜 세우고 날아오르게 하는 것, 세상을 개벽하는 힘은 희망으로 굳어가는 상상력이다.

千佛千塔의 땅, 운주사는 상상력과 종교가 만나는 곳이다. 미륵은 불교에 포섭된 자이다. 종교가 그를 사로잡았다. 56억만년의 영겁은 무한 속으로 현재진행형의 역사를 펼쳐 놓는다. 그 아득한 미래로부터 현재의 삶을 이끌어내 온다. 그 삶의 역사는 퇴적이 아니라 꿈의 응고이며 끊임없는 도발이다.

탑은 불타며 솟는 나무이며, 치솟으려는 바위며 대지이다. 또한 탑은 염원이자 응답이다.  그것은 솟으려는 돌의 염원이자 이미 솟아오르고 날아올라 하늘 가장자리에 떠도는 별이다. 삶이 내려놓고 싶거나 하염없이 흘려보내고 싶은 무게가 될 때, 탑을 향한 祈願은 무겁고 지상적인 것들을 들어 올려 하늘과 바람 속에 놓아 흐르게 한다. 탑을 빚는 마지막 쪼임이 끝나는 순간, 그것은 한 송이 꽃이나 불꽃이 되어 푸른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존재의 무게는 사라진다. 삶은 꽃처럼 가볍게 피어난다. 그러므로 祈願은 起源에 닿는다. 起源은 미래로부터 현실을 빚는 꿈의 흘러나오는 그 자리이다.


운주사의 공간은 그 자체로 역동적으로 울려 퍼지며 출렁이며 솟아오르는 비상의 힘이다. 푸른 숲은 산으로 솟고 거기에 부처와 탑들이 놓인다. 솟는 산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치솟음의 탄력을 받아 더욱 날카롭고 당당히 솟는다. 거의 한 솜씨인 듯한 그것들은 신라시대의 안정감을 버리고 수직의 지극한 상승의지만을 강렬히 드러낸다. 모든 것이 길쭉하다. 가냘프지만 꼿꼿한 돌의 불꽃들. 수백 수천의 치솟음들로 웅성대던 그 날의 운주사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계곡은 구름과 바람 속을 떠도는 출렁이는 푸른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승의 극한 역동은 수직이 아니라 바로 수평이다. 극에 달한 상승의 꿈은 부동의 침묵으로 누운 와불로 맺힌다. 수평의 와불은 뭇 수직의 소란을 끌어당겨 침묵의 산정으로 응고시킨다. 아직은 때 아니니... 그래서 운주의 공간성은 침묵의 와불로 수렴한다. 망바위가 응시하는 건 바로 그것이다. 지나온 영원, 다가올 영원, 마침내 깨어질 그 시간이다.

와불은 머리를 남으로 두었다. 북쪽을 바라보고 일어서는 부처들. 별빛은 상호 가득 쏟아지고, 태양은 등 너머 후광처럼 빛날 것이다. 일어선 미륵의 어깨 위, 머리 뒤로 달과 해가 가는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