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절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허나 저 말을 뒤집으면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오는가’로 읽힌다. 성큼 와있을 봄빛 궁금키도 하거니와 대구와 함께 코로나 메카로 떠오른 청도 분위기도 엿볼겸 장연리 잠시 다녀온다. 가창 지나 팔조령 가는 길은 놀라우리만치 한산하다. 졸지에 공공의 적 1호가 되어버린 신천지교인 31번 확진자의 동선으로 알려진 탓일까, 대구 청도 두 코로나시티 잇는 도로이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걸까.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외식이나 콧바람 나들이 차량 붐비는 길이 이렇게 적막해질 수도 있구나, 싶다.
유등 연지蓮池 지나 대남병원쪽 읍내 방향과 운문향 갈림길에서 신호 기다린다. 읍내쪽 차선엔 차가 하나도 없다. 역시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다. 곰티 지나 매전 접어드니 한해 농사 밑거름 준비해논 모습 더러 보인다. 그러나 나댕기는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이웃이 무섭고 얼굴 맞대고 노닥거리기는 더욱 겁나는 세상, 필시 촌로들 마실 걸음도 뚝 끊겨버린 게다.
면소재지 이르니 난데없는 방역차량이 좌우로 약제 뿜으며 다가온다. 헐~ 건물 내부나 주변도 아닌 도로 운행하며 저렇게 뿌려대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저들도 걍 무서운 거다, 무서우니 뭐라도 하는 척하고 싶은 거라 여기니, 부질없는 저 풍경조차 짠해진다.
장연리엔 홍매 만발하고 백매 봉오리 맺었다. 산수유도 피었다. 삐딱하게 웃자란 가지들 잘라버려 아직 볼품없으나, 시선 아랑곳없이 샛노랑꽃 만발하여 스스로 곱다. 오는 봄 미열에 취한듯 지그시 달뜬 모습이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자주 들락거려 안면튼 길냥이들 밥 두어 주걱 퍼담아놓고, 돌아나온다.
오는 길, 차량 메시지로 각지의 코로나 소식 지나간다. 개중 하나에 시선 꽂힌다.
‘정읍시는 확진자가 없습니다.’
허~ 지들이 잘해서 없을까, 운이 좋은 거지. 대구나 청도가 별나게 잘못한 게 있어 당했나, 신천지는 또 어떻고, 드럽게 운없었을 뿐이지. 대책이래봤자 거기서 거기, 대체 누가 이런 일 생길 줄 미리 알았겠는가? 다 우연일 뿐.
한편으로는, 보수의 성지 대구 청도, 더하여 이름 묘한 이단(?) 기독교 종파 신천지에서 코로나가 폭발했다는 사실, 우연치고는 절묘하게 공교롭다. 필연적인, 인과적으로 명백한 사실엔 사람들은 놀라거나 감동먹지 않는다. 당연한 거니까,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필연보다 더한 우연, 그 절묘한 우연이 역사의 물길을 비튼다. 아마 누구도 상상못할 방식 혹은 방향으로. 이른바 ‘역사의 간계’ 아닌가? 모든 일은 지나봐야 알고 역사는 언제나 소급 구성된다. 허나 당장 무참히 박살난 일상, 화풀이할 데 없으니 돌이킬 수 없는 곳 돌아보며 너도나도 훈수에 패악질이다. 진작 ~~했어야 했다는 따위의 무책임한 주장들과 심지어 음모론까지(코로나로 대박치고 있을 거대 제약산업에 대한 음모론은 정작 별 인기가 없다. 국내정치에만 매몰된 빈약한 새가슴 상상력들이라니). 하나같이 그저 공포에 짓눌린 비명이나 신음, 또 그걸 숙주삼은 정치적 아우성일 뿐이다.
문명이라고 하는, 지극히 인간 중심의 지구 생태계를 구축하고 발전시켜온 댓가 중 인류멸종까지 가능케 할 대표적 위험으로 거론되는 게 바이러스 감염병이다. 그래서 생태적 관점으로 현사태를 바라보는 이들은 거시적 안목에서 숲의 파괴, 사육이라는 밀접 접촉 육식문화, 그리고 몸의 면역체계 강화보다 병소의 직접 정복과 강경진압 방식으로 진화해온 의학과 의료체계 - 거대 제약산업군의 이해와 밀접관련한 - 등을 비판하기도 한다.
문명의 징후를 읽어내는 데 탁월한 학자 토플러도 미래의 근간학문으로 생태학을 지목한 바 있다. 인류 진화의 관점에서 생태학은 진로 바꿀 수 없는 문명과 과학이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생존전략인 동시에, 관성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더욱 신경증적으로 어긋나게 하는 선택지일 것이다. 기술문명에 포섭된 생태학은 고향으로의 회귀(애당초 불가능한!)가 아니라 기술문명의 균열적 진화의 한 축이 될 것이고, 불가능을 꿈꾸는 과학의 또다른 신화적 서사가 되는 동시에 과학의 시야 지평 너머 어른거리는 물신의 토양으로 비옥해져갈 것이다.
과학의 불가능한 욕망 너머에서 당대 최고의 물신으로 등극한 코로나 바이러스. 그 자매는 공포 바이러스다. 그것은 코로나에 앞서 숙주를 감염시킨다. 공포에 감염된 자는 공포를 일용하고 소비한다. 공포의 보수, 댓가없는 향유는 없다. 평화롭던 일상을 파괴한 공포는 단조로운 일상 찢는 짜릿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공포와 루머의 좀비들, 불가항력 앞에서 그 힘의 중심을 향해 투신하는 자발성의 제스처마저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근래 아주 잠깐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란 그림이 회자된 적 있다. 발터 벤야민의 언급을 비틀어보자면, 저것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날개짓하는, 다시 쓰는 미래를 향한 응시에 사로잡힌 역사의 천사다(미래는 언제나 이미 쓰여 있기에 언제나 다시 쓰이는 무엇이다). 어쩌면 그것은 생태주의자의 표현대로 열린 판도라의 상자, 지금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코로나를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응시가 글로벌 네트워크종으로 성큼 진화한 영장류 인류종을 문명의 사막으로 다시 내팽개치는 파국의 장면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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