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봉준호(2013)
출연 :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 에드 해리스, 존 허트, 틸다 스윈튼, 제이미 벨, 옥타비아 스펜서, 이완 브렘너, 앨리슨 필, 고아성, 루크 파스콸리노, 스티브 파크 etc.
봉준호 감독에 송강호, 틸다 스윈튼, 에드 해리스...
일단 보지 않을 수 없는 최강 진용이다.
영화는 과연 봉준호표다. 꿋꿋하게 밀고가서 기어이 끝을 보고마는 우직함이 있다.
특급 배우들의 활용도 경제적이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차례로 한사람씩 등장하는 비중있는 배역들 덕분에 캐릭터의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되고, 반전에도 힘이 실린다. 틸다 스윈튼이나 송강호와 고아성의 등장과 커밍아웃도 인상적이고, 후반부 애드 해리스의 출현은 명배우의 이름값에 걸맞은 무게감이다. 죽었다 되살아나 끝내 발목잡고 늘어지는 무표정한 거한의 존재감도 괜찮고, (이야기 전개상 충분히 예상된 것임에도) 주제의식 한결 도드라지게 하는 반전도 좋다. 어설픈 기대 남기지 않는다.
현세계를 축도縮圖한 열차칸들의 특징있는 빛깔들도 흥미롭다. 칙칙한 잿빛이나 흥건한 핏빛과 대비되는 비현실적인 원색의 학교칸이 특히 인상적인데, 대놓고 풍자하는 대목은 <괴물>의 한 장을 연상시키며 역시 그만큼의 우화적 면모를 돋보이게 한다.
피튀기는 격투장면도 상당히 많다. 더러 살짝 늘어지기거나 불필요해 보이기도 있지만, 날렵하고 현란한 헐리웃 액션으로 치닫지 않고 투박스러운 구석이 있어 오히려 맘에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무언가 미진하다. 뭐랄까... 분위기가 좀 약하다.
봉준호 감독은 친숙하고 일상적인 시공간과 존재를 낯설고 섬뜩하게 만들어 독특한 긴장을 자아내는 재능이 있다. 우리는 그 낯선 시공간(존재)을 따라 두려움과 매혹이 공존하는 그의 허구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플란더스의 개>에서 일상적 주거공간인 아파트의 소외된 사각에 드리워지는 실체없는 의심과 풍문의 그림자가, <살인의 추억>에선 산업사회의 현장 이면에 어리는 불온한 광기와 욕망, 눈부신 황금들판에 일렁이는 수상쩍은 바람이 있었다. <괴물>에선 서울 시민의 식수 공급원이자 휴식 공간인 한강이 무책임한 권력에 의해 정체불명의 괴물 서식지로 변해가는 섬뜩한 체험이 있었고, 직전작 <마더>에선 가장 가깝고 친숙한 존재인 엄마가 문득 살기 가득한 괴물로 응어리져가는 기괴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플란더스의 개>를 제외하면 괴물 삼부작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일관된 천착 아니었나 싶다.
<설국열차>엔 그런 낯설어지면서 매혹되는 과정이 없다. 그냥 주어진,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시공간 뿐. 감독의 전작들에서 풍기던 어떤 불길하고 불온한 기미같은 게 감돌지 않는다. 질주하는 기차라는 폐쇄공간의 설정 때문일까? 닫힌 공간의 농밀한 압박감은 충분히 와닿는데, 서늘한 자연 풍광과 공명하며 하늘 저 깊은 곳마저 물들이던 인간들의 은밀한 욕망, 죄의식과 공포... 툭툭 내던지는 농담과 난데없는 헛발질들에 겹치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눈물겹도록 우스꽝스러운 세상 풍경들... 머 그런 게 없거나 영 미약하다. 그런 건 한국 무대에서나 가능하더란 걸까? 혹은 감독이 너무 긴장했거나 제작 여건이 따라주지 못했던 걸까?
몇몇 장면들은 꽤 밀도있고 강렬하다. 허나 물씬한 회화적 이미지에 실려오는 박진함이나 공포감에도 불구, 왠지 낯익어 보인다. <괴물>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충격적이고 새로운 무엇이 없다. 강렬해야 할 장면들의 뒷심이 딸리거나 감염력이 모자라니, 깊이와 설득력마저 2%쯤 부족해지는 느낌.
이 시대 절대권력의 창세기와 묵시록까지 아우르는 탐욕스런 영화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체제(=닫힌 생태계)에서 권력과 계급은 불가피한가, 권력과 계급이 있는 사회를 문명이라 부를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이고 도발적인 질문. 여전히 답없는 고전적 질문이기도 한 그것들은 방법론적 선택지에 봉착한다. 체제의 변혁인가, 탈주인가. 대답은 명쾌하다. 봉준호 감독답다.
질문과 대답만큼 이야기 골격도 뚜렷하다. 장애물 게임처럼 곳곳에 상징적 도식들을 배치해 놓고서, 깨고 부수고 피칠갑하며 간다. 희화적 대비 두드러지는 전투와 막간풍경들을 지나...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조의 대사와 채플린풍의 함축적 이미지로 반전한다.
마지막 장면에선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가 겹쳐진다. 판타지가 태어나는 곳은 꿈과 현실의 경계다. 불가능한 현실을 넘어서는 힘으로서의 판타지. 꿈꾸는 아이, 고아성은 늘 취한 듯 몽롱하다.
어쩔수 없이 <괴물>이 되살아온다. 장르영화답지 않은 급진성, 아니 판타지스런 신랄함 두드러진다. 허나 현실에 대한 비유나 풍자가 넘 노골적이면 쾌감보다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기 십상이다. 그 오글거리는 이물감이 상승적으로 작용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면 좋을 텐데, 별로 그런 것 같지가 않다.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들만 여기저기 우글거린다.
영상미로 숙성되거나 이야기로 녹아들지 못하는 거친 주장들이 삐걱대며 부딪치는 풍경, 조금 착잡하고 맛이 덜하다.
요즘 영화는 종말론이 대세인갑다. 이례적으로 좀비물이 꽤나 흥행하더니, 이젠 대놓고 이죽댄다. 지금 우리가 종말 이후를 살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고, 이딴 세상 차라리 리셋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영화보고 나서 “봉준호 감독도 참...!” 하며 킬킬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건 과격함이 아니다. 지독한 신랄함이거나 속수무책의 환멸이다. 에둘러 그리기보담 대놓고 치고들어가는 데 능했던 감독인지라, 전작들 역시 어지간히 급진적이라 평가받곤 했다. <괴물>이 특히 그랬고, 은근하면서도 한치 빈틈없이 깊숙하게 급소를 찌르는 <마더>가 그랬다. 허나 갠적으로는, 노골적 메시지보담 긴장감 있는 이미지들이 탄탄하게 짜여진 <플란더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이 더 좋았다.
이 영화는 좀 너무 가는 게 아닐까 싶을만치 나간다. (원작 자체가 그런지 모르나) 대안 없는 궤도를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직설적으로 비유하는 ‘성스러운 엔진’,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계급사회를 축도한 열차칸과 그 단면 풍경들, 가치관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배우들의 실제 인종과 국적을 그대로 활용하는 교묘함(우직함?)까지...
이런 노골적인 메시지를 담은, 급진적이고 신랄한 사회풍자 영화의 거침없는 흥행은 솔직히 좀 의아하면서도 재미나다. 배급을 맡은 거대자본의 대대적 광고도 물론 한몫했겠지만 그 때문만은 아닐 게다. <괴물> 역시 첨예한 논란 일으키며 대박 흥행했었다.
전복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소비하며 즐기는 이들이 그토록 많은 걸까? 아님, 어떤 관점에서도 어렵거나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드는 감독의 연출 스타일 덕분일까? 바깥 없는 세상의 지옥도를 유화와 판화처럼 찍어낸 투박하고 직설적인 이 영화, 살짝 불편한 감 있지만, 갈수록 더해가는 감독의 뚝심만은 여실히 느껴진다.
틸다 스윈튼과 애드 해리스라는 괴물급 배우의 일품 연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올란도> <영 아담> <나니아 연대기> 그리고 근작 <케빈에 대하여>에 이르기까지, 냉혹하고 중성적 이미지 속에 불길 감추고 있는 듯한 틸다 스윈튼. 그의 우스꽝스럽고 야비한 캐릭터는 또 하나의 발견이었다.
후반부 반전의 축이 되는 애드 해리스, 역시 대단한 카리스마다. <팬텀>이나 <폭력의 역사>에서 느꼈던 인상을 겹쳐놓은 듯하다.
조금 아쉬운 건 송강호와 고아성. 비중 만만치 않으나 별 새로움이 없다. (좀 상투적인) 관점의 균형자 역할이자 후반부의 결정적 캐릭터인데, 바깥세계에 대한 열망의 동기 표현이 좀 허술해 보인다. 어쩌면 그건 반전을 위한 불가피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부피를 엷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물론 비중있는 배역들은 많고 한국어 대사가 별로 없는 탓도 있을 것이다.
영화 초반, 훌쩍 자란 ‘빌리 엘리엇’ 비슷한 녀석 보이길래 엔딩 크레딧 확인하니 역시나다.
또 한터프 하는 흑인 여배우, 꽤 낯익다 싶었는데 <헬프> 주연이었다.
ps:
이런 촌평이 보인다. ‘<플란더스의 개>를 보러갔다가 <브라질>을 보고 왔다... 맘에 든다.’
동감이다. <괴물> 볼 때도 느꼈지만, 봉준호 감독이 갈수록 테리 길리엄 감독을 닮아가는 듯, 거침없는 장르 뒤섞기에 장기를 발휘한다. 장르영화 탈을 쓰고 곧잘 판타지를 만든다. 그래서 <괴물>이후 그의 영화에서 개연성 시비는 무의미해 보인다. 다만, 어떤 과잉이 좀 거슬리거나 불편할 뿐.
나름 재밌게 보았던 장선우 감독의 괴작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비교하며 불평하는 주장도 띈다. 일리는 있다. <성냥팔이..>만큼은 아니지만 <설국열차> 역시 매니아적인 판타지 코드가 강하다. 그런데 <성냥팔이..>는 흥행참패했고 <설국열차>는 흥행폭주 중이다. 왜 그럴까?
또 하나,
<설국열차> 원작은 프랑스 만화다. 소영웅의 고뇌에 빠진 무슨 ~맨맨들로 가득한 미국 만화와 아주 다르다. 저런 전복적이고 파국적인 결말 역시, 기독교적 구원망상에 시달리는 미국식이 아니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영화 결말의 인상과 겹치는 어떤 프랑스 소설이 생각난다. 좀 묵었지만, 미셀 우엘벡의 <소립자>. 소설에서 구제불능 현생인류는 스스로 도태되고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기로 결정한다.
이 영화 또한, 발칙하기 그지없는 상상력으로 도발적인 결론으로 치닫는 점이 단연 백미다.
장면들.
그래픽으로 처리되었을 기차. 비용과 시간 문제였겠지만 좀 약하다.
사실, 질주하는 기차 자체가 종말 이후에 살아남은 괴물이다. 죽음의 세계를 달리는 기차의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좀 더 두텁고 묵직한 질감으로 잘 표현되었으면 싶었다. 그랬으면 봉준호 감독 특유의 분위기가 한결 살아나지 않았을까.
눈덮인 세계의 황량하고 기이한 이미지도 좀 더 풍부하게 그려졌더라면 좋았겠다. 궁극의 자연세계가 풍기는 섬뜩하고 비현실적 분위기와 폐쇄된 인간세계의 대비를 표현하는 데 좀 더 시간과 공을 들였더라면 싶은...
한국영화들이 헐리웃과 비교해 부당하게 지적받는 그래픽기술 탓이 아니라, 기차 내부로 무대를 한정해버린 시나리오 때문에 서사 구도에 자연풍광을 활용할 여지가 거의 없어져버려 아쉽다는 것.
커브에서 서로 마주보며 총격하던 대목은 기발하고 멋지다.
증오는 사랑보다 질기다. 어느 한쪽 죽어야 끝날듯, 한없이 길게 이어지던 총격전.
풍부한 디테일과 깊이있는 질감으로 묘사된 빈민칸 풍경.
허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갱스 오브 뉴욕>등 다른 영화에서 본 듯한 느낌이라 썩 참신하지만은 않았다.
복면의 도끼군단 도열한 열차칸 장면도 어디선가 본 듯하다.
수족관과 함께 눈 시원하던 장면.
가장 인상적인 학교칸 장면. 원색의 강렬함이 전후의 짙은 잿빛이나 핏빛과 비현실적으로 대비된다.
<괴물>에서도 이런 우화같은 삽입구가 있었지 않았나 싶은데, 폭력장면의 단조로움 덜어주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뜬금없어 보이면서도 전후 맥락에 절묘하게 비틀려 닿는 이런 판타지풍 대목의 창조가 봉준호 감독의 특기 중 하나인 듯.
인물들
사실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좀 단조로운 편이다. 배역들이 저마다 역할에는 충실하지만, 서로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이나 유대를 통해 화학적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대목은 거의 없다(다국적 배우들이라는 제약 때문은 아니라 본다). 길리엄이나 윌포드가 주변 인물들과 형성하는 관계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결정적인 관점 차이가 잠복한 커티스와 남궁 민수, 그리고 메이슨 총리 등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축은 미미하거나 큰 의미를 띠지 못한다. 상당한 출연시간에도 불구, 캐릭터가 치밀하고 탄탄하게 쌓여가지 못하고 그냥 소모되는 듯. 커티스나 남궁 민수, 메이슨 총리 모두 그렇다. 송강호나 틸다 스윈튼 등의 빼어난 연기력을 감안하면 많이 아쉽다. 상대적으로 출연 비중 적은 윌포드의 존재감만 강렬하다.
고아성의 입지나 위상도 흥미롭다. 의도덕인 기시감 유발 전략인지 모르나, 그는 전작 <괴물>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고래 뱃속의 성자를 연상시키는 요나란 이름조차도. 허나 <괴물>에 비해 결정적인 대목이 없다. 끝장면 빼면.
전체적으로, 각각의 개성에도 불구하고 퍽 도식적으로 표현된 캐릭터들이란 느낌. 쉽사리 몰입하거나 감정이입할만한 인물이 없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최고권력 탈취를 통해 평등세상을 꿈꾸는 혁명가
길리엄(존 허트).
커티스의 대부같은 현자. 하층민의 처지개선은 원하지만 체제전복은 원하지 않는다.
계급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이 저러할 듯.
남궁 민수(송강호).
체제 자체를 벗어나고픈 아나키스트? 어쩌면 가장 급진적인 인물.
커티스는 그를 통해 체제 내부만이 아닌 '바깥'을 고민하게 되지만, 그 영화적 표현은 꽤 허술하다.
둘 사이의 갈등이 좀 더 구체적이고 심도있게 표현되었더라면.
그나마 대배우 송강호라서 엉성한 역할에 비해 한결 캐릭터가 살았다.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
체제의 영원성을 신봉하는 노회한 기회주의자.
틸다 스윈튼의 빼어난 연기에도 불구, 캐릭터가 기대보단 밋밋.
커티스와 대칭으로 맞서 총격전 벌이는 괴력의 금발 사내.
죽었다 살아나는 불사의 능력을 과시하는데 <매트릭스>의 스미스를 연상시킨다.
역할도 비슷하다. 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완고한 버팀목이자 익명의 수호자인 불멸의 대중.
말하자면 너와 나같은 '누구나' 전사다. 그 '누구나'는 어디든 있다.
계란배달부나 교사 역시 총을 들고 체제를 수호한다.
커티스가 아닌 남궁민수에 의해 저 사내가 비로소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체제에 맞서는 자가 아니라 벗어나려는 자에 의해 결국 무력화되는 어떤 힘.
윌포드(에드 해리스).
체제를 운영하는 신적 존재, 열차로 상징되는 섭리(?)의 구현자.
최고권력자임에도, 대안없는 세계의 운명을 걸머졌으므로 그가 사는 곳은 천국이 아니다.
일터에서 먹고 자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자다. 오늘날 거대자본들의 성실한 CEO처럼.
요나(고아성)
괴물에게 잡아먹혔던 그가 돌아왔다.
기차에서 태어난 그는 바깥세계 멸망의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원죄없는 아이.
어디로 갈 수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 겹쳐놓는 질문이 있다.
그들은 과연 진정 다시 태어난 아이들인가? 또다른 인류종이 될 수 있는가?
소설 <소립자>의 냉소적인 문제의식을 다시 가져온다면, 저들 또한 멸망인류의 유전자와 피를 이은 자식들 아닌가?
진화없는 리셋팅이, 수없이 되풀이되는 게임오버 중 하나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바깥으로 나간 게 아니라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왔을 따름 아닌가?
그러나 희망은 바로 거기서 시작하는 듯하다.
낡은 질문은 이제 그만, 눈덮인 신세계를 향해 행동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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