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스터(2013)
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 호아킨 피닉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에이미 아담스, 로라 던 etc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라고 묻고 있지만 카메라 시선이 자주 향하는 곳은 대양의 부서지는 물거품이나 세상의 막막한 지평들이다.
영화 끝나고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사내의 일그러진 표정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금 손길 내미는 마스터에게 다음 생에서나 만나자고 대꾸하던 그 모습.
저미듯 밀려드는 공허... 알수없는 먹먹함이 긴 여운 남기며 가슴을 치고 간다.
굉장한 영화다, 소름 돋을만치.
어찌보면 전작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속편같기도 하다. 애증으로 얽힌 상반된 두 캐릭터의 숙명적 인연이 그려내는 미국 근현대의 한 풍경. 황폐하기 그지없는 내면을 끌어안고 고통스럽게 혼자 가려는 사내와, 짐짓 단란해 보이는 가족의 울타리 속에서 끊임없이 행복의 최면을 걸며 중산층들의 피로와 고통을 다독이는 또다른 사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여러 전작들처럼 (좀 과잉수컷인) 완강한 두 남자 이야기다.
열여섯, 어린 연인을 두고 그는 왜 달아났을까? 두려웠던 걸까, 자유롭고 싶었던 걸까?
그가 전장에서 얻은 건 착란적인 황폐와 잃어버린 사랑의 잔해같은 모래 여자. 전쟁이 끝나자 다들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무책임하게 주장하지만, 그들 대개는 돌아가지 못했거나 (그 사내처럼) 너무 늦게 돌아갔을 것이다.
사내는 성적 환상에 집착한다.
대칭그림 데칼코마니를 보고 있지만. 그가 빚어내는 관계는 늘 일그러진 비대칭이었다.
커다란 모래의 여자.. 그녀만큼이나 사내 자신 또한 공허하다.
사내는 자주 달아난다. 사진사로 근무하던 백화점에서 그러했고 농장에서도 그러했다. 유리병 휘두르며 주춤주춤 뒷걸음치거나, 캄캄한 지평을 향해 죽을힘 다해 내달린다.
마스터와 함께 다다른 사막. 사내는 마스터가 달려갔다 온 반대방향으로 질주한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그 옛날 도망쳤던 연인의 집에 나타난다. 그렇게 그는 돌아간다. 비로소, 너무 늦게.
마스터는 과거를 불러내 미래를 얘기하지만, 사내는 힘겹게 과거를 돌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늘 달아난다.
어느 날, 지평 끝까지 달려서 그는 자신의 과거와 대면한다. 너무 늦게서야...
또다른 장면. 사내는 벽과 창문 사이를 초조하게 왔다갔다하고 있다.
‘벽은 벽’일 뿐이라는 사내와, 초록색 눈을 파랗게도 검게도 볼 수 있다는 마스터의 부인.
마스터의 요법 중에서 ‘기억’이 ‘상상’으로 바뀌었을 때, 누군가는 침묵했고, 멀지않아 사내는 떠난다.
그에게 벽은 벽일 뿐이었다. 애당초 꿈 따위는 없었던 거다.
그래서 마스터가 던지는 ‘어디서.. 어디로..?’ 의 질문은 끝내 기만적이다. 사내와의 첫만남에서 스스로 토로했듯, ‘대책없이 궁금한 자’이기를 그만두었을 때 질문은 폐기되거나 은폐된다. 무언가를 찾았다는 허세로 변질된 질문과 함께, 위선적 평온으로 봉합된 그들만의 가족.
대양을 건너 돌아온 그에게 마스터 부인(그림자 마스터?)은 대체 무얼 기대했느냐고 다그친다. 홀로 떠돌며 고통받는 사내가 설 자리는 거기에 없다.
사내가 오히려 솔직하다. 마침내 대면한 진실. 기다리는 그녀도 없었고 그녀로부터 영영 달아날 수도 없었던 자신, 달아났지만 끝내 뒤늦게 되돌아와 그 자리에 선 자신을 본다.
옛 연인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후 사내는 더욱 자신의 세계 속에 갇힌다. 극장에서 그가 혼자 보고 있는 영화는 짐작컨대 <꼬마유령 캐스퍼>다. 영국에 있는 마스터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그는 유령의 대화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 그는 도망쳤다. 다시 돌아오리란 약속를 던지고서.
그 자신은 믿었을까, 그 약속을?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거기 없었다. 그 자신이 어디에도 없었듯이.
사내는 어린 그녀의 구애를 뿌리치고, 자신의 감정도 배반하며, 밤을 틈타 바다로 달아난다.
감당하기 버거웠던 스스로의 황폐와 공허를 차마 그녀앞에 드러낼 수 없었던 걸까?
이후 오랫동안 그는 돌아오지 못한 사내로 살아간다.
폭발성의 휘발물질 시너를 혼합하여 기막힌 독주를 만드는 사내, 그의 직업이 뱃사람이며 사진/영상을 다루는 자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항상 떠나지만 되돌아와야 하는 자인 동시에 역사의 단면을 기록하는 자. 시간여행자이자 그 기록자인 감독 자신처럼.
마스터는 사내를 머물 곳 없는 바다사람이라 부른다. 마스터의 그림자같은 부인은 말한다. 사진 따위는 필요없다고, 이건 유행 같은 게 아니라 오래 해야 하는 일이라고.
사내에게 마스터는 다음 생生에선 그들이 철천지원수가 되어 있을 거라 말한다. 또 마스터를 두지 않고 살 수 있는 자가 있으면 좀 알려달라고.
세속적 명성을 얻어갈수록 초심을 잃어가는 마스터 자신의 은밀한 공허감을 드러내며, 정작 마스터가 필요한 건 바로 나라고 토로하는 대목만 같다.
떠나려는 사내를 바라보며 마스터는 노래를 부른다. 무정한 연인을 두고 혼자 떠나야 하는 심정을 담은 노래다. 자주 혹은 종종 마스터 자신의 깊은 무의식과 분노와 약점을 대신 표출해주었고 전생前生을 함께했던 그이기에, 어쩌면 그 노래는 마스터뿐 아니라 사내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노래하는 마스터를 바라보며 사내는 눈물을 흘린다. 그건 자신에 대한 회한일까, 마스터에 대한 연민일까?
영화 포스터가 퍽이나 시사적이다. 좌우대칭으로 놓인 마스터 내외의 얼굴 위에 있는 단 하나의 얼굴.
과연 누가 마스터일까? 마스터의 영혼의 분신, 혹은 마스터가 믿고 의지하는 곳은 또 어디일까?
이 영화의 강한 몰입력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도 크게 힘입고 있다.
이 남자, 호아킨 피닉스.
<글래디에이터>에서 아비를 죽이고 왕위를 가로채는 패악무도한 아들 역으로 첨 얼굴을 본 듯한데,
<허공에의 질주>나 <아이다호>에서 풋풋하면서도 애틋한 청춘미를 보여주었던 요절한 꽃미남 리버 피닉스의 동생이라는 점도 관심을 끈다.
살아 연기를 계속했다면 디카프리오 이상의 위상을 차지했을 형의 몫까지 다하려는 걸까?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글래디에이터> 이후 그를 다시 발견한 건 <투 러버스>인데, 기네스 펠트로와 호흡 맞추며 쉽지않은 배역을 기막히게 소화하며 놀라운 흡인력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서는 표정연기가 좀 과장되었다 여길 수도 있겠지만, 빈번한 클로즈업이 그리 불편하다 느끼지 못한 건 강렬하기 그지없는 그의 연기 덕분일 것이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마스터’의 양가적 의미는 도드라진다. 상처입은 영혼을 치유하고 다독이는 멘토인 동시에 그의 운명을 지배하는 자. 달리 말해, 유한한 삶의 시간을 낭비없이 이끌어줄 아버지이자 불복할 수 없는 큰 타자. 혹은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설파하는 한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대속해줄 그 누구.
그런 마스터는, 아니 그런 마스터란 존재의 허실은, 어쩌면 감독의 초기작 <리노의 도박사>에서부터 줄곧 관심있게 다루어져온 주제인지 모르겠다. 좀 뒤틀리긴 했지만 <매그놀리아>에서 톰 크루즈의 캐릭터가 있었고,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폴 다노(섬뜩하도록 대단한 연기.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찾아보았을 정도)가 연기한 목사가 있었다.
놀랍다. 좀비영화에서나 볼 법한 멍한 군상들의 표정들이라니!
영화 한편 보고나면 그의 전작품을 찾아보고 싶은 감독이 있다. 가령 홍상수, 김기덕, 왕가위, 테렌스 맬릭.. 등. 폴 토마스 앤더슨도 그랬다. <매그놀리아>를 본 이후 그의 다른 작품들을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는 참 미국적인 감독이다, 싶다. 세상 한 대목을 어떻게든 장악하려는 남자들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리노의 도박사>엔 완전한 아버지의 꿈과 일류 도박사의 야망이 있고, <부기 나이트>엔 한 걸출한 포르노 배우를 중심으로 그 산업을 떠받치고 움직이는 다종다기한 욕망들이 보인다. <매그놀리아>에선 허망하고 부조리한 가족이란 이름의 상처와 꿈이 그려졌고, <데어 윌비 블러드>에선 지금의 미국을 가능케 한 부와 종교의 뿌리라고 할 집요하고 기이한 욕망이 눈부시도록 탁월하게 그려진다. 나름 독특한 사랑 이야기, <펀치드렁크 러브>만 살짝 예외일 게다.
다소 독특한 직업이나 정신세계를 가진 남성 주인공들의 집요한 욕망을 통해 미국 근현대사의 풍경을 신랄하고 예리하게 그려낸다는 점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떠올리게 하고, 담백하고 정확한 묘사에 뒷받침된 탄탄한 구성과 강렬한 장악력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스콜세지 감독은 장르와 스타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종종 날카로움 무뎌지고 허세스러워지거나, 스필버그 감독처럼 ‘미국적 가치’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보는 이를 불편하고 오그라들게 한다.
메스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구사하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누구보다 이지적이고 신랄하다. 하지만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서로 대비되는 성격들의 박진하고 치밀한 묘사로 한 시대의 정신을 도드라지게 부각한다면, 큐브릭 감독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부조리하거나 기이한 시추에이션을 냉혹하도록 건조하게 묘사한다. 인물은 자주 상황 속에 삼켜진다.
큐브릭 감독 영화를 보고나면 어떤 메마른 서늘함이 느껴지며 차분해지는 반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영화는 강한 몰입에서 비로소 풀려나며 돋아나는 소름과 함께 하염없는 공허가 엄습한다.
헐리웃 유명 배우들이 믿는다는 사이언톨로지교의 창시자가 마스터의 모델이라지만 영화감상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보다는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음악과 신들린 듯한 연기들이 더없이 좋던 이 영화,
올해 본 중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함께 경지에 이른 대가의 솜씨에 흠뻑 취했던 최고의 영화다.
아래는 인상적인 몇 장면들..
전쟁이 끝나도 사내는 돌아갈 곳이 없다. 아니, 돌아갈 수 없다.
마스터는 배 위에서 태어났다. 바다는 자궁이었다.
육지의 탐욕과 질시와 두려움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 곳은 또한 뿌리내릴수 없는 물이었다.
마스터의 아내, 가차없는 단호함과 용기로 마스터를 지켜내고, 그의 무의식까지 돌보거나 억압한다.
다재다능한 마스터, 춤추고 노래하신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란 배우 아니었다면 과연 누가 이 역할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이 장면 이후 사내의 성적 환상이 겹쳐진다. 어쩌면 그건 마스터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음주장면과 별도로, 사내가 마스터의 영혼의 버디란 걸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유치장 장면.
차분하게 지켜보는 마스터와 난동하는 사내... 일그러진 거울같은 장면이다.
저 사내, 어쩌면 마스터의 억제된 분노와 폭력성을 대신 표출해주는 내면의 지배자일까?
영화엔 이 장면 외에도 그런 암시가 담긴 대목이 몇 더 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또 누구인가?
그녀가 지배하려는 혹은 빚어내고 싶은 마스터는 또 어떤 마스터일까?
초록과 파랑 그리고 검정, 세가지 색 눈빛을 가진 그녀는 자기암시의 대가다.
사내에 의지하는 마스터를 보며, 그녀는 사내를 질투하기도 했을 것이다.
에이미 아담스란 이 배우 역시 대단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아쉽게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찾아보니 최근작 <맨 오브 스틸>의 로이스 레인 기자였다. 내가 까막눈인 거도 맞지만, 배우가 배우일수밖에 없는 점도 분명하다. 배역에 따라 이토록 인상이 달라지다니...
사내는 옛 연인의 이름만 들으면 쉽게 폭발한다. 마스터는 그를 코즈요법의 성공적 사례로 만들고 싶어하나 여의치 않다.
그는 겉보기만큼 멍청하거나 단순하지도 않고, 그들 관계 또한 그리 일방적이거나 명료하지 않다.
가족... 마스터는 가졌으나 그는 가지지 못한 것.
마스터가 그에게 들이민 벽보다 더 완강한 세상의 벽이 바로 저 엷은 베일이었을지도..
마스터와의 밀월같은 한 때.
그는 마스터가 맘놓고 허세부려도 좋은 사람이었고, 그 허세를 짐짓 세속적으로 가장 잘 표현해 주기도 했다.
그는 역사의 체감자이자 기록자였다. 마스터 자신의 역사와 세상의 역사.
마스터는 그것을 알았을까?
오토바이를 질주하는 마스터.
훈련을 빙자하여 치기어린 욕망을 잠시 해방하며 일탈하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마스터는 (고삐 매인 소처럼) 정확히 목표지점까지만 갔다 돌아왔지만, 사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평끝까지 달려가 버렸다.
마스터는 실망했을까? 혹시 그 자신의 무의식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지평을 넘어간 사내가 다다른 곳은 자신의 과거였다. 너무 늦게서야 다다른 그 곳...
두번째 책을 내면서 마스터는 초심을 버렸다. 더 넓은 세계를 위해서(?).
도와달란 마스터의 부름에 응해 다시 만난 두 사람.
최초의 그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가버린 마스터, 비로소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지만 사내는 마스터를 떠난다.
아마도...
마스터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보아서일까? 마스터가 사내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듯이.
갈라서는 분신, 마스터의 저서 제목이 '쪼개진 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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