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퍼시픽 림(Pacific Rim 2013)
감독 : 기예르모 델 토로
출연 : 찰리 헌냄, 키쿠치 린코, 이드리스 앨바 etc
폭염 피해 산 대신 영화관으로 간다.
납량용으로 최고의 영화다. 제대로 물에 빠지고 나온 듯하다.
이야기로만 보면 딱 <트랜스포머> 수준이다. 우째저째 치받고 부수다가 용케도 지구를 구한다. 아동들 즐기기 좋은 로봇 혹은 괴수물. 그러나 영화 이미지들과 그 전개방식은 정확히 <트랜스포머>의 대칭점에 선다.
<트랜스포머>가 디지털 충격에 기반한 자유로운 속도 세계의 경이와 공포를 펼쳐보였다면, <퍼시픽 림>은 둔중하고 회화적인 이미지로 충만한 아날로그적 야성을 전시한다.
그래서일까, 정지화면으로 잡아놓고 한참 바라보고만 싶은 장면들이 있다. 왠지 낯익다. 인간 정신, 혹은 문명 세계의 깊고 어둔 심연을 드러내보였던 프란시스 고야의 검은 그림들, 특히 <거인>과 <막대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이 기시감처럼 떠오른다.
거인
막대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
아래는 영화 이미지들
크다는 것, 단적으로 크다는 게 숭고의 정의였던가?
달리 말하면 그건 타자성이다. 고스란히 개념화할 수 없는, 정신이 감당할 수 없는 초월적인 무엇, 그게 타자다.
여기 그런 것이 있다. 단적인 거대함이, 괴물이 있다. 괴물과 싸우는 괴물 이야기.
속도와 투시가 현대적 폭력의 요체라면, 저 흐리고 야성적인 거대함은 고전적 폭력의 핵심이다. 폭우 쏟아지는 바다에서 벌이는 괴물들의 육박전.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함은 아직 자연만이 주장할 수 있는 전통 영역이란 낡은 환상이 되돌아온다. 물론 그 환상은 철저히 그래픽 기술에 바탕한 것이다. 환상이 환상을 낳았지만, 환상을 깨는 것도 환상이다.
부실한 서사에 감정이입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이미지의 향연이다.
끝없이 비는 내린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저항군 대장의 단언을 예증하는 묵시의 풍경이다. 마코가 기억하는 그 날의 폐허에도 낙진처럼 눈이 내렸다. 멸망세계의 참혹을 뒤덮으면서.
그 날 이후, 인간 스스로 괴물이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과 싸운다는 설정, 더도 덜도 아닌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마코의 폭주장면도 낯익다. 허나 ‘기억의 통제’란 늘 흥미로운 소재다. 단조로운 이야기를 슬쩍 변주하며 얼마간 깊이를 주지만, 캐릭터의 입체를 살릴만큼 충분한 디테일은 아니다.
물론 영화의 서사가 꼭 탄탄한 플롯이나 삼빡한 이야기에만 의존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이미지들이 쌓이고 쌓여 서사의 폭과 깊이를 낳는다. 일종의 환각효과일 게다.
끝없이 비는 내린다.
종말을 예감하는 그 날 이후, 어둡고 칙칙한 세상.
이젠 좀 낯익고 진부해져 버린 묵시적 풍경. 영화 <미스트>와 <화성침공>을 떠올리게 하던..
<퍼시픽 림>의 두 괴물, 예거와 카이주는 기계와 유기체라는 확연히 상반된 형상을 지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한 카이주의 머리부분 형상은 에반게리온을 닮았다. 예거는 두 사람이 의식을 통합하여 조종하는 금속로봇이지만, 에반게리온은 인간몸과 동조(싱크로)하며 기계를 넘어 유기체로 진화하는 생체로봇이다. 예거가 괴물이란 건 과장이나 농담일 수 있지만 에반게리온은 진정한 괴물이다. 카이주가 에반게리온을 닮을 수 있었던 건 그래서일 것이다.
분석되고 규정된 물질성, 빛나는 금속 이미지로 충만한 로봇은 정교한 디테일이 매력이지만, 불투명한 사물의 이미지로 성큼 물러날수록 괴수 형상들은 신비감 더한다. 어둡고 낯설다. 그건 자연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판적(Panic) 공포란 게 있다. 판은 지상 최후의 자연인 숲을 지배하는 신이다. 감독의 전작 <판의 미로>는 공포와 매혹이라는, 판적 공포의 양면적 심층을 빼어난 영상미로 표현해낸 수작이다.
카이주들은 태평양 심해로부터 온다. 바다 역시 궁극적 자연, 인간이 영원히 정복할 수 없는 자연이란 의미에서 또다른 숲일 것이다.
이 영화 서사의 치명적 약점은 카이주의 실체를 너무 쉽게 설정해버린 점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일종의 에일리언이다. 야수적 신성이 느껴지는 카이주(괴수怪獸의 일본말)란 멋진 작명에도 불구, 상투적인 그 정체는 왠지 미흡해 보인다.
<에반게리온>은 그 점에서 훨씬 영리한 서사전략을 구사한다. ‘그 날’ 이후 지구를 궤멸시키려는 듯 간헐적으로 엄습하는 사도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하다. 선악도 넘어선 존재다.
저 괴수의 뿔 여럿 달린 머리는 에반게리온을 닮았다.
로봇과 한몸이 되어 초인적 힘을 가진 또다른 유기체로 진화하려는 욕망.
낯설지 않은 SF적 상상이지만 일본 애니매이션에서 특히 빈번하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는 통제불능한 힘의 폭주란 개념도 우리에겐 낯설지만 그들에겐 익숙해 보인다.
힘을 숭배하는 무사도의 전통 탓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가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건 고전적 둔중함으로 밀고가는 아날로그적 비주얼 덕분이다. 속도를 버리고 크기와 무게에 의지하는 수많은 전투장면들, 그것은 근래 너무 익숙해져버린 정교하고 날카로운 디지털세계와는 확연히 다르다. 거의 다크 판타지(dark fantasy)나 묵시의 풍경화에 다다른 그림들이다.
디지털이 성취한 광속의 세계에서 몸은 거의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탈육체는 진화의 한 보편적 방식이었다. 지금 그 몸이 되돌아온다. <에반게리온>의 사도처럼 매번 다시금 엄습하는 카이주에 맞서 펼쳐지는 괴물들의 전투는 누아르영화에서나 흔히 보았던 수중 육박전이다. 만연한 가상현실의 시대에 저 기이하고도 구태의연한 기시감이라니... 어쩔 수 없이 이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만의 고유한 세계다.
대장은 코피를 흘린다. 상투적인 상처의 은유다. 그러나 상처는 몸을 더 부각한다. 제임스 발라드의 소설이자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크래쉬>에선, 몸은 부서지면서 존재를 극대화한다.
이미지, 그건 어쩌면 과잉실재의 통로이자 궁극 지평.
그런데 저 몸의 회귀는 믿을만한가? 그것은 과연 실제인가?
영화 초반부, 거대로봇(짚시 데인저)의 팔이 떨어져나가는 장면에서 많은 관객은 고통으로 공감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데 괴물 로봇의 고통(?)에 인간이 공감한다?
애당초 설정이 그렇다. 의식을 통합한 두 인간이 기계와도 하나가 된다. 그래야 로봇을 조종한다. 지금으로선 전혀 새롭지도 않은 설정이다. 우린 이미 그렇게 멀리 와 있다. 자동차와 교합하고 기계몸으로 들어가려는 고전 SF의 몸짓은 변태의 망상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건 몸의 예감이었다. 죽음도 불사하는 자기증식 욕망의 메아리였다.
비록 고통이 몸을 더욱 드러내고 부각하지만, 기계로 고통하는 저 몸은 그래서 결국 과잉실재다. 사라진 실재가 돌아온 게 아니라 실재에 대한 향수인 것이다. 돌아온 건 몸이 아니라 몸의 환각이다.
생생하게 작렬하는 저 몸들은 실재인가? 그렇다면 얼마만큼?
모든 게 데이터로 환원가능해지는 시대, 실재의 기준은 양인가, 질인가?
델 토로 감독의 단골 배우 론 펄먼.
그가 없었다면 많이 허전했을 것이다. 맨얼굴로 등장한 모습이 이 영화를 디지털한 분위기에서 더욱 멀어보이게 한다.
<매트릭스>나 <트랜스포머>가 속도에 의존하여 ‘일상을 낯설게 하기’ 전략을 구사하며, 큐브의 디지털 세계 속으로 투신했다면, <퍼시픽 림>은 괴물로봇으로 표현되는 거대하고 낯선 사물성을 재구축하며 사라져가는 몸을 다시 불러오는 전략을 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확증되는 건, 사라진 몸.
앞서 얘기한 ‘타자’는 결국 이미지로만 거대해져버린 몸을 가리키는 막막한 제스처가 된다. 텅빈 숭고를 사칭하는 실재없는 세계의 공허.
낯선듯 낯익고 반가운, 느리고 무건 몸들을 한없이 풍성하고 아름답게 펼쳐 놓는 이 영화, 참 영리하기 그지없다.
델 토로 감독에게 경의를...
후렴:
종말의 암운 짙게 드리워진 하늘 아래, 더없이 무거운 것들이 한없이 어둡고 낯선 것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다. 고야의 그림에서처럼 그들의 싸움은 끝이 없을 것만 같다. 비록 그것이 실제의 몸 아닌 환각이라 한들 어쩌겠는가?
사라짐이 아쉽고 애틋한 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향수nostalgia 상품은 시대 막론하고 팔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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