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보자.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서 왔고, 엄마와 아빠는 그들의 엄마와 아빠로부터 왔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00년 전, 1000년 전에 살고 있었을 조상은 물론이요 이런 특질을 가진 인류 자체가 어떻게 생겨났고 어디를 거쳐 정착해 왔는지 궁금해진다. 멈추지 말고 조금 더 올라가 보자. 엄마와 아빠의 생식 행위로부터 생명이 탄생하는 메커니즘 자체가 대체 언제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역시 '나는 누구인가'와 기나긴 줄로 이어져 있는 호기심의 영역이다.
만일 당신의 자녀가 이런 엉뚱한, 그러나 온당한 질문을 던진다면 역사 교사와 과학 교사 중 누구에게 찾아가 보라고 권할 것인가? 어디로 가든, 어쩌면 반쪽짜리 대답만을 들려줄 지 모른다. 여기에 완벽하진 않아도 적절한 답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다. '빅 히스토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문화된 만큼 '고립'을 겪은 분과 학문의 벽을 넘어, 빅뱅부터 현대 사회까지 장장 137억 년의 시간을 하나의 '역사'로 설명해내려 한다.
▲ <빅 히스토리: 우주, 지구, 생명, 인간의 역사를 통합하다>(신시아 브라운 지음, 이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최근 빅 히스토리에 관한 두 권의 책이 국내에 소개됐다. 국제 빅 히스토리 협회 창립 이사로 현재 도미니칸 칼리지 교육학과에 재직 중인 신시아 브라운의 <빅 히스토리>(이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는 2009년 나온 동명의 책의 개정판이다. 며칠 간격으로 <시간의 지도>(데이비드 크리스천 지음, 이근영 옮김, 심산 펴냄)도 나왔다. 저자들은 세계 빅 히스토리 학계의 권위자로 여겨지며, 이 책 두 권은 빅 히스토리에 입문하기에 가장 적당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프레시안 books'에서는 두 권의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빅 히스토리를 다각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특집을 준비했다. 먼저 두 권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이근영 빅 히스토리 연구소장이 지난 5월 29일 종로구 견지동 '웅진카페 W'에서 진행한 강연을 정리해 싣는다. 이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빅 히스토리 강의를 하기 위해 내한한 <시간의 지도>의 저자, 데이비드 크리스천과 이근영 소장이 나눈 대화를 실어 빅 히스토리를 둘러싼 비판과 논쟁, 향후 비전의 지도를 그려본다. 마지막으로 이화여대 사학과의 조지형 교수가 크리스천의 저작의 의의와 한계를 밝힌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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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림 하나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폴 고갱(1848~1903)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 going?)>입니다.
이 그림 자체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고, 제목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 제목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오래 전부터 철학자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던져 왔으며 지금 역시 많은 이들이 던지는 질문이며, 여기 오신 여러분은 특히 더 치열하게 이 질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상한 현상은, 이 질문에 가장 제대로 답할 수 있는 과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이 질문에 오히려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분과 학문이 발달하면서 학문의 깊이는 점점 더 깊어지고 우리는 전에 몰랐던 내용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학자들이 자기 틀 속에 갇히다 보니 많은 이들이 진짜로 궁금해 하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생긴 것이죠. 현대 과학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는 답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지식을 축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몇 주 전인가, 리처드 도킨스가 옥스퍼드 대학교의 수학 교수와 대담하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이 수학 교수는 도킨스에게 '생명의 기원'이라는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현재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생명에 기원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답하던 도킨스가 갑자기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생명의 기원이 되었는지 내가 알 게 뭐냐'는 식으로 나오며 화를 내더군요. 그러면서 그건 과학자에게 할 질문이 아니며, 거기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이 하는 말의 타당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게 바로 앞서 지적한 전형적인 과학자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궁금해 하는 것은 그들이 피하려 하는 바로 그 질문이지요. 그리고 '빅 히스토리'는 이러한 분과 학문의 틀의 폐해를 극복해보려는 노력 중의 하나입니다.
분과의 문턱을 넘는 현대판 '기원 이야기'
"빅 히스토리는 우주, 지구, 생명, 인류의 역사를 통합 학문의 방법을 통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국제 빅 히스토리 협회)
국제 빅 히스토리 협회가 내린 정의입니다. 분과 학문의 틀에서 보자면 자기가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우주와 역사에 대해 특히 1950~60년대 이후 각 분과 지식은 정말로 많은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걸 하나로 묶어서 일관된 이야기로 하려는 시도는 없었던 겁니다. 위의 정의는 그런 환경을 깨보려는 시도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겠죠.
사실 빅 히스토리의 세부적 내용만 보면, 고등학교 1학년 때 다 배우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느껴지는 내용들도 10대 조카에게 물어보면 오히려 더 잘 알 수도 있어요. 그러나 왜 이걸 배워야 하는지, 각각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 어려운 주기율표를 외우라고 가르치면서 원소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안 알려주는 거죠.
다음과 같은 정의도 있습니다.
"빅 히스토리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우주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는 현대의 '기원 이야기(Origin Story)'이다." (데이비드 크리스천)
'빅 히스토리'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시간의 지도>의 저자이기도 한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정의입니다. 조금 겸손한 정의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기원 이야기'는 어느 사회, 민족에나 있거든요. 우리가 무엇을 기원 이야기라 부를 때는 그 이야기 안에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러므로 빅 히스토리는 '현대의 창조 이야기'일 뿐이지, 앞으로 더 많은 지식이 축적되면 보완되거나 다른 이야기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빅 히스토리가 다른 기원 이야기와 가장 크게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단 인터뷰 기사 참조)
"현대의 기원 이야기인 빅 히스토리는 과학적 증거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다시 말해 빅 히스토리는 137억 년의 우주 역사를 현대 과학의 학문적 성과에 근거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다른 기원 이야기는 그것이 거대한 알에서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빅 히스토리에서는 우주의 시작을 현대의 표준 우주론인 빅뱅 이론에 근거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시작, 생명의 진화, 인간의 역사 등에 대해서도 과거의 많은 기원 이야기들과 빅 히스토리 사이에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빅 히스토리, 왜 필요한가
위에서 언급한 분과 학문의 두터운 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모두 아시는 유명한 분이 하나 있어요. 마이크로소프트의 창립자, 빌 게이츠입니다. 그는 빅 히스토리 강의를 듣고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빅 히스토리를 처음 접하고, 이런 공부를 할 기회가 좀 더 일찍 있었다면 공부에 훨씬 더 흥미를 갖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빅 히스토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을 종합해 우주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누구나 빅 히스토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미국의 학생들에게 빅 히스토리를 무료로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후원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라는 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가기) 미국에서는 재작년부터 시범적인 운영에 들어갔고, 빅 히스토리를 가르치는 교사라면 누구나 교안, 동영상, 텍스트 자료 등을 무료로 다운로드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고등학생을 교육 대상으로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빌 게이츠 재단은 이 외에도, 초등학생을 위한 빅 히스토리 커리큘럼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새로운 학문을 시작하는 데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빅 히스토리가 등장한 것은 21세기 인류가 처해 있는 인구, 자원, 기후 등 끝이 보이는 문제들이 더 이상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하나의 학문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인류의 모든 지혜'를 동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특징은 '인류 공통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어느 한 기관, 국가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국가 간의 협력이 요청됩니다.
지혜를 모으기 위해 특히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 요청됩니다. 사실 지금까지 문제를 만들어 온 것은 대개 과학 하는 사람들이었는데요. (웃음) 만약 '더 이상 지구를 못 쓰게 되면 우주로 나아가자'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건 해결책이 될 수 없겠죠. 어쨌든 빅 히스토리는 양자를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빅 히스토리가 이 문제들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건 앞으로 빅 히스토리를 어떻게 연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최소한 빅 히스토리는 어떤 문제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고찰 기회와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통해 우주의 전 역사를 살핌으로써 우리가 처한 문제들을 다양한 시간의 척도 안에서 볼 수 있게 하는 거죠.
인류가 우주의 시작부터 자연과 하나라는 시각과 함께, 인류가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발전해 왔는지를 통합적인 시각에서 보게 함으로써 공통의 문제 해결 노력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고 있고, 이제 다른 사람들도 그런 문제의식을 가져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가장 오래된 과거를 볼 수 있는 인간만이 가장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역사를 길게 보면, 당면한 문제뿐 아니라 미래의 문제들도 잘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지구'에서 살지 못한다!
그렇다면 현 인류가 처한 문제가 대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봅시다. 마하트마 간디가 1929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도는 서구와 같은 방식의 산업화를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만약 3억의 인구를 가진 나라가 서구와 같은 경제적 약탈을 한다면, 그것은 메뚜기 떼처럼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인도뿐 아니라 전 세계가 (당시의) 서구와 같은 약탈을 하고 있는 거죠.
그 결과 다음의 인구 그래프 같은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인류가 농업을 시작한 만 년 전쯤, 전 세계 인구는 대략 60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세계 4대 문명이 등장한 기원전 3000년경에 5000만 명쯤으로 높아졌습니다.
▲ 기원전 1만 년부터 현재까지의 세계 인구 그래프
▲ 인구 증가가 이대로 계속된다면, 2054년에는 세계 인구가 90억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10억 인구를 돌파한 것이 1800년대입니다. 1960년에는 30억 명을 넘어섰어요. 150년 만에 세 배로 늘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1960년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1960년생이거든요. (웃음) 그래서 표를 볼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30억 명이었던 인구가, 아직 제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만큼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는데도 두 배가 넘었다는 점에서요. 인구 그래프만 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요.
다음은 피크 오일(Peak Oil) 그래프입니다. 2000년쯤에 생산량이 정점에 다다랐고, 이제 우리 앞에는 낭떠러지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그래프는 오일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에너지, 자원, 물, 농경지, 삼림, 어장-에 모조리 해당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피크 에브리씽(Peak Everything)'이라고 표현합니다.
기후 변동 문제도 있습니다. 1960~70년대를 사신 분들은 당시 일상에선 물론이고 언론이나 학계에서 '얼어 죽겠다'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1980년대를 지나자 이번엔 지구 온난화, 즉 '더워 죽겠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20년 주기로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요. 요즘 기후학자들은 "이게 뭔지 모르겠다", 즉 우리가 더워 죽을지 얼어 죽을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이를 글로벌 위어딩(Global Weirding)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그림은 '만일 인류가 지금처럼 산다면 지구가 몇 개 쯤 필요한가'를 나타냅니다. 이미 2010년 시점에 한 개 이상이 필요하지요. 현 상태로 가면 2050년에는 두 개 반이 필요하게 됩니다. '화성을 식민지화 시키자'는 이야기가 비단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게 되는 겁니다.
게다가 평균이 이렇다는 얘기이고 각 나라별로 현재 삶, 소비를 계속할 경우 필요한 지구의 개수를 보면 굉장히 심한 나라들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이 문제입니다. 4.1개를 필요로 할 정도로 살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미국 외의 모든 나라에서 미국과 같은, 즉 지구가 네 개 반쯤 있어야 지탱 가능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한국은 어떤가요? 저를 비롯해 여기 계신 여러분들 모두 마치 지구가 두 개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고 합니다.
융합 과학-역사를 관통하는 틀은?
빅 히스토리가 다른 분과 학문들과 무엇이 다른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단순히 융합 과학과 세계사의 총합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문제는 이겁니다. 아까 우주와 생명을 아우르는 융합 과학인 전반부에서 인간의 역사로 넘어올 때, 그 분기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부딪칩니다. 과학은 이미 진화론이란 틀이 모든 영역을 설명하고 있는데, 인문학은 그걸로 해석되지 않는데다가 방법론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대체 빅 히스토리의 일관된 분석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137억 년의 역사를 어떻게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 하나의 논리, 한 권의 책으로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하단 인터뷰 기사 참조) 거기에 빅 히스토리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은 분석 틀을 제시합니다.
① 우주의 역사는 복잡성(Complexity) 증가의 역사다.
=기본적으로 복잡계 과학자들로부터 가져온 분석 틀입니다. 한마디로 아주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변화하는 역사로 이해하자는 겁니다. 빅뱅-별-은하-행성-생명-인간-문명 순으로 복잡성이 증가합니다.
초기 우주는 단순했으며, 지금도 우주는 단순합니다. 현재 우주 공간 1세제곱미터 안에 수소 원자가 몇 개 들어있을까요? 현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의 밀도로 계산하면, 평균 여섯 개쯤이라고 합니다. 이는 어느 정도일까요? 지구에서 인간이 만들어 온 그 어떤 진공 상태도 1세제곱미터 안에 수소 원자 6개의 밀도를 못 쫓아갑니다. 아무리 비싼 실험 도구로도 그것보다 '더 진공인' 상태를 만들지 못한다는 거죠. 우리 주변에는 굉장히 복잡한 것들만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우주가 얼마나 밀도가 낮은 상태인지, 단순한 상태인지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② 복잡성이 증가하기 위해서는 조건(Condition)이 필요하다.
=단순한 것에서 한 단계 복잡성이 큰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조건이 만들어져서 빅뱅이 일어났는가? 은하에서 행성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생명이 어떻게 진화해서 인간이 나타났는가? 그들은 어떻게 발달해 문명을 만들었는가? 라는 '조건'들에 대한 질문이, 말하자면 분과 학문인 셈입니다. 다시 말해 앞 단계에서 뒤의 단계로 넘어갈 때 나오는 '조건'을 연구하는 학문이 따로 존재해 왔다는 이야기겠죠. 가령 지구라는 행성에서 어떤 생명체가 생겨났다고 하면, 전 단계를 연구하는 것이 지구물리학, 다음 단계를 연구하는 것이 생물학입니다. 여러분이 읽은 책의 많은 내용이 바로 이 '조건들'에 대한 것인 셈이지요.
③ 조건이 맞으면 새로운 복잡성이 나타나고, 부분들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특징(Emergent Property)이 나타난다.
=가령 어떤 행성에서 어떤 조건이 맞아 생명이 나타났다고 해 봅시다. 그 생명에서는 '조건들'로만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특징이 나타납니다. 생물학 하는 사람들은 이를 '창발성'이라고 명명합니다. 이 새로운 특징(창발성) 역시 빅 히스토리의 연구 대상입니다.
④ 새로운 특징을 지닌 복잡성이 나타나는 시점을 임계점(Threshold)이라고 부를 수 있다.
=빅 히스토리에서 중요한 임계점이 일고여덟 개 있습니다. 말 그대로 A에서 B로 넘어가는 지점인데요. 하나의 분과 학문에서 다른 분과 학문으로 넘어가는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 중간은 언제나 모호합니다. 빅뱅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생명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인류의 기원이 무엇인지, 농업은 왜 시작됐는지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죠. 이 임계점을 설명하면 노벨상 받을 수 있습니다. (웃음)
앞서 말씀드린 ①~④를 종합하여, "⑤ 빅 히스토리는 우주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에 나타난 임계점들과 그 임계점에 나타난 새로운 복잡성, 그리고 그 특징들과 그 조건들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인류사는 세 덩어리?
그렇다면 빅 히스토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임계점은 무엇일까요? 그 임계점은 언제쯤 나타났다고 여겨지며, 현대 분과 학문에서 그것을 다루는 분야는 또 무엇일까요.
첫 번째 임계점은 ▲우주의 탄생(137억 년 전)입니다. 관련 학문 분야는 우주론, 천문학, 입자물리학 등입니다. 물론 이는 그 앞에 있었던 복잡성은 모른다는 것, 즉 '그 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라는 명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최초의 별과 은하(135억 년 전)의 등장입니다. 천문학자와 물리학자들이 이것을 연구하지요.
다음은 ▲원소의 탄생(135억 년 전)입니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것 빼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원소가 이 때 탄생했습니다. 원소는 별이 죽으면서 만들어진 건데요. 그래서 어느 유명한 팝송에도 나오듯, 우리는 모두 별 먼지(Star Dust)입니다. 어떤 천문학자는 '당신의 오른팔은 A라는 별에서, 왼팔은 B라는 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더라고요. 네 번째는 ▲태양계와 지구의 탄생(45억 년 전)입니다. 천문학이나 지질학의 영역이지요. 세 번째와 네 번째 임계점의 시간 간격은 135억 년 전에서 45억 년 전으로, 약 90억 년 정도를 그냥 뛰어 넘어버립니다.
다섯 번째 임계점은 ▲생명의 탄생과 진화(38억 년 전)라 여겨지고, 생물학의 연구 영역이지요. 그리고 여섯 번째 임계점인 ▲인간의 등장과 진화(20만년 전)에서 드디어 현생 인류가 등장합니다. 600만 년 전~20만 년 전 사이에 온갖 인류가 등장하지만, 지금과 같은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에 등장했다고 봅니다. 인류학자, 고고학자의 연구 분야입니다.
일곱 번째는 ▲농업의 등장(1만 년 전)으로 고고학, 역사학의 영역이지요. 참고로 농업 '문명'의 등장은 5000년 전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여덟 번째가 역사학, 인문학이 다루는 ▲현대 사회의 등장(200년 전)입니다. 이렇게 보면 빅 힉스토리는 역사를 골치 아파하는 사람에게 좋은 학문입니다. 빅 히스토리의 인류사에는 세 개의 임계점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웃음)
하나 덧붙이자면, 빅 히스토리에서는 ▲미래(100년 이후)에 관한 예측도 합니다. 아홉 번째 임계점 자리에 두기도 하지요. 응용과학과 인문학, 생태학, 미래학이 여기에 관여하겠죠. 재미있는 것은, 현대 과학으로는 약 30억 년 후와 같은 아주 먼 미래의 지구 운명은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다는 겁니다. 태양의 수명이 한 50억 년 가량 남았는데 죽기 전에 굉장히 커질 거예요. 그래서 지구가 태양의 외피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현 생명체는 살 수 없는 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100년 후는 아무도 정교하게 예측해 내지 못해요. 그런데 우리가 관심 갖는 미래이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래는 100년 후이지요. 다시 말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미래이기도 합니다.
137억 년을 1년이라 하면, 인류는 겨우…
빅 히스토리의 역사인 '137억 년'을 말하면 사람들은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실제로 알아들은 걸까요? 인간은 자기 주변의 물체나 시간밖에는 인지하지 못합니다. 겨우 몇 백 미터, 몇 백 년을 상상할 수 있는 정도죠. 만약 1초에 하나씩 137억을 센다고 해볼까요? 잠을 한 숨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그렇게 세면 10억을 세는 데 5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즉, 137억을 세려면 여러분은 열세 번은 환생하셔야 하는 겁니다. (웃음)
137억 년이란 거대한 세월을 좀 더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칼 세이건이 만든 것이 '우주 달력'입니다. 137억 년을 우리에게 익숙한 단위인 1년, 12개월로 나타낸 것이지요. 그림을 보시면 맨 위엣 줄이 1월부터 12월까지를 나타내고, 가운뎃줄에 12월 한 달이 날짜별로 나와 있습니다. 1억 년도 넘게 산 공룡이 1주일도 안 되어서 죽었다고 나오네요. (웃음) 그리고 맨 마지막 줄이 12월 31일 11시 59분에서 12시까지, 단 1분을 나타냅니다.
▲ 137억 년의 역사를 12개월로 표현한 '우주 달력'
첫 번째 임계점인 우주의 탄생, 빅뱅은 1월에 들어가네요. 현재 '빅뱅 표준 모델'이라 정착된 것은 급팽창 고온 빅뱅 이론입니다. 사람들은 빅뱅 하면 '폭발'을 상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급팽창'으로 폭발하고는 굉장히 다릅니다. 어떤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터져 나간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공간과 시간을 만들면서 퍼져 나간 겁니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은하와 은하 사이의 공간이 넓어지고 있다는 의미고요.
빅뱅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빅 히스토리에서 가장 주목하는 질문은 '어떻게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무엇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입니다. 천문학자들은 이 질문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빅뱅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거죠. 하지만 빅 히스토리 연구자들은 그걸 물어보면서 다양한 이론을 함께 소개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원 이야기가 그 배경을 필요로 하거든요. 빌 게이츠의 사이트에도 다양한 기원 신화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 신화와 빅뱅 이론이 어떻게 다른지, 빅뱅 이론이 믿을만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비교 가능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여섯 번째 임계점인 인간의 등장과 진화가 두 번째 줄 31일에 'Human Evolution'으로 나와 있습니다. 현 인류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설은 굉장히 많습니다만 널리 받아들여지는 학설은 아프리카 기원설입니다. 빅 히스토리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중요하게 던집니다. 두 발로 걸으면 사람일까요,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일까요? 아니면 뇌가 어떤 크기 이후로 커지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배워 온 역사에서 간과되어 온 부분을 알 수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이래, 인간은 약 20만 년을 행복하게 잘 살아 왔는데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글로 쓰인 역사'이므로 5000년 전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 그러니까 인간이 수렵과 채취로 살아 온 시절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도구'에 대해서밖에 말하지 않습니다. 구석기가 어쨌느니, 청동기가 어쨌느니 하는 이야기지요. 최근 번역되어 나온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어제까지의 세계>(강주헌 옮김, 김영사 펴냄)가 집중적으로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인간이 여태까지 저지른 일 중에 제일 바보 같은 일이 농업을 시작한 것이라고까지 얘기했었죠. 이 기간은 지금껏 역사학이 아닌 인류학, 고고학의 관심 분야였는데요. 인류 역사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부분이 어째서 역사가 아닌가, 당연히 중요하게 연구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문제의식이 있는 겁니다.
어쨌든 농업은 '우주 달력'으로 치면 지금으로부터 20초 전에 시작됐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빅 히스토리에서는 인간의 역사를 세 덩어리로만 보기 때문에, 농업 문명에 대한 질문도 단순합니다. "왜 농업을 시작했는가"입니다.
농업 사회가 나타나자마자 불평등이 나타났고, 도시가 생겨납니다. 여러 부작용이 있었고, 농사짓는 민족 바로 옆에 살면서도 오랫동안 농업을 채택하지 않은 사회도 있었습니다. 또 농업의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최초의 농업이 시작된 터키 같은 곳에 가면, 지금도 한두 시간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것만으로 한 가족이 1주일 이상 먹고 산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요. 만일 수렵·채취 사회가 그렇게 풍요로웠다면 왜 그런 생활을 포기하고 한두 가지 곡물에 의존하는 농업을 시작했으며, 그것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것(1492년)이 12월 31일 59분 59초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덟 번째 임계점인 '현대 사회의 등장'은 1초 안에 일어난 일이 됩니다. 여기서 용어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빅 히스토리에서는 '근대'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수렵 시대-농경 시대-현대, 딱 세 개밖에 없으니까요.
현대에 대한 질문 역시 굉장히 단순합니다. 농업 문명이 계속되면서 인구가 꾸준히 늘었고 1800년대 이전에도 10억 명 정도에 이르긴 했는데,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과 같은 급격한 인구 증가는 일어나지 않았죠. 그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통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됩니다. 전형적인 멜서스 식 문제의식이지요.
또 하나 중요하게 묻는 질문이 이겁니다. '산업혁명은 왜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일어났는가?' 이 질문에는 나름의 타당성이 있습니다. 1800년대, 아니 185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이 전 세계 생산량의 5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건륭제에게 교역을 의뢰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그가 '우리가 갖지 못한 걸 가지고 와 봐라'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있지요. 중국은 어느 나라하고도 교역할 필요가 없는 나라였고, 기술적으로도 서양에 비해 훨씬 앞서 있었지요. 그런데 왜 이곳이 아니라 서양에서, 그것도 산업혁명 당시 신대륙을 제외하고는 가장 후진적인 나라나 다름없었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까요? 이 역시 현대를 규정함에 있어 중요한 질문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인간은 아무리 길게 보아도 '우주 달력'으로 보면 겨우 2시간을 살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그 90퍼센트 이상은 우리가 무시해 왔던 농업 문명 이전의 인간이 차지하고 있고요. 빅 히스토리의 '시간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앞의 조건이 없었으면 뒤의 일들이 없었다는 겁니다. 뒤의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의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고 그에 따라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태양의 옆 동네, 얼마나 먼가
시간에 이어, 이제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위 그림은 지구에서 시작해 태양계, 태양계와 태양계 근처의 별들, 우리 은하, 우리 은하가 속한 그룹, 그것이 속해 있는 슈퍼클러스터, 로컬 슈퍼클러스터, 가시 우주까지, 점점 더 큰 세계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보이는 빨간 점은 시작점인 지구가 아니라, 바로 앞에 있던 그림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 그림에서 빨간 점들은 태양계 전체를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어마어마하지요.
우리 은하에 있는 천억 개의 별 중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 그러니까 '옆집 별'인 센타우르스자리의 알파별까지 자동차로 가면 어느 정도 걸릴까요? 5000만 년입니다. 달에 가는 로켓으로 가면 90만 년, 보이저 호로 가면 8만 년쯤 걸린다고 합니다. 현대 기술로는 옆 동네도 못 간다는 뜻이지요. 게다가 앞 그림의 가시 우주는 겨우 '구(球)'의 뚜껑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 은하에는 태양 같은 별이 한 1000억 개쯤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시 우주에는 우리 은하 같은 것이 1000억 개쯤 있다고 하고요. 그러면 태양 같은 것의 숫자는 1000억 곱하기 1000억 개쯤 되겠지요. 어떤 인구학자들에 따르면 이 지구상에서 산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사람들의 총수는 약 800억 명쯤이라고 합니다. 그 800억 명에게 별 하나씩을 줘도, 우리 은하의 별을 전부 점령하지 못하는 거죠.
거대한 역사가 가르쳐 주는 것은…
스티븐 호킹은 "인간은 약 1000억 개의 은하 중 하나인, 평범한 크기의 은하의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는 평범한 별 주위를 돌고 있는 평범한 크기의 행성 위에 존재하는 화학적 거품 덩어리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도 인간이 아무리 머리가 좋아봐야 겨우 이 행성에 맞게 진화한 생물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빅 히스토리를 공부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게 빅 히스토리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이라 할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뇌는 우리가 아는 한 우주에서 가장 질서 있고, 복잡한 물체다." 그의 말도 맞습니다. 우주가 진화하며 만든 것 중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이거든요. 정 반대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거지요. 아이러닉하지만 137억 년의 시간, 1000억 개의 별과 1000억 개의 은하라는 어마어마함에서 오는 위축과 함께, 그 거대한 우주와 장대한 시간이 지금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겁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에릭 셰숑(Eric Chaisson) 같은 천문학자는 (호킹이 말하는) 평범성의 원리에 반해 복잡성의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거대한 물체인 우리 은하는 에너지가 거의 흐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고, 지구에서 식물로, 동물로, 인간으로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사회가 복잡계에 정점에 서 있지요. 즉,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현대 인간은 60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위 그래프) 아래에서부터 가장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올라갑니다. 이 축은 복잡성 증가의 축이자 시간의 축이기도 하지요. 좀 더 복잡한 것이 에너지를 많이 쓰고 그 숫자도 적습니다. 덜 복잡한 것이 에너지도 적게 들고 오래 살고, 숫자도 많아요. 물론 인간 역시 숫자가 많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까 말했듯이 별은 1000억 개씩 있으니까요.
빅 히스토리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처럼 상반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호킹처럼 인간을 "화학적 거품 덩어리"라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우주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긴 시간동안 우주가 해 온 일은, 우리처럼 복잡한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 아니었느냐는 관점이지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이 이렇게 만들어져 있으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건 인간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에 뭐가 맞는지 스스로 증명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대체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우주가 온갖 노력을 다 해서 만든 존재가 맞는지요. 그 방법은 지금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른들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이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에 말이죠. 그게 제가 빅 히스토리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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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히스토리에 대해 가장 궁금한 것 중 하나는, 그렇게 커다란 세계를 하나의 학문으로 취급하는 데 반발이나 논쟁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분과 학문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자연은 결코 그런 분류를 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대상을 연구해서는 결코 전체를 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시간의 지도> 저자-역자 관계이기도 한 크리스천과 이근영이 지난 18일 만나 '남은 질문거리'들을 얘기했다. <편집자>
이근영 : "빅 히스토리는 인간이 작위적으로 나누어놓은 학문 분야들을 다시 통합해 우주의 전체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평생을 바쳐도 어느 한 학문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어려운 상황을 생각해 보면 대단히 어려운, 심하게 표현하자면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 아닐까요?
크리스천 : 제가 처음 빅 히스토리를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비판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 많은 학문 분야들을 다 연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현대 과학의 각 분야들은 대단히 전문화되어있기 때문에 하나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만약 빅 히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면, 빅 히스토리는 지적하신 것처럼 실현 불가능한 이상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많은 전문가들이 충분한 지식을 만들어냈고, 이제는 그것들을 통합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서 빅 히스토리를 시작했습니다. 마치 통상적인 의미의 역사학자들이 기록된 문서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를 재구성하듯이, 현재 인류가 이루어놓은 과학적 증거들을 통해서 인간의 역사를 포함한 우주 전체의 역사를 재구성해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우주에는 '우리 은하'만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DNA의 구조와 기능도 밝혀지지 않았고, 지구의 나이에 대해서조차도 일치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양한 학문의 발전에 기대어 우주 전체의 역사에 대한 과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불행한 일은, 개별 학문들이 그것들을 밝혀낼 수 있었던 전문화라는 과정이 역설적으로 그런 '거대 담론'을 사교 모임에서나 논의될 수 있는 비전문가들의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이근영 : '거대 담론'에 대한 거부는 그것이 흔히 비전문적이기라는 것 이외에도, 거대 담론들이 어떤 법칙성이나 방향성을 주장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크리스천 : 흥미롭게도 과학자들은 거대 담론에 낯설지 않습니다. 예컨대 우주론자들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몇 가지 개념들을 통해 우주의 시작에서 시작해 우주의 종말까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이라는 이론을 통해 생명의 진화뿐만 아니라 기원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구 물리학에서는 판구조론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인문학자들인데요. 거대 담론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의 목소리는 언제나 인문학자들로부터 나오지요.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회적 다윈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들이 역사에서 만들어낸 비극을 생각해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지적하신 것처럼 거대 담론을 역사에 적용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지요. 그런 점에서 거대 담론에 대한 가장 큰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역사학자들입니다.
이근영 :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 히스토리라는 거대 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크리스천 : 왜냐하면 그런 거대 담론 속에서만 인류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주 속에서 인간의 위치 찾기가 가능해진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답을 찾고 싶은 질문은 그것이고, 현대 과학은 물론이고 역사학과 인문학도 처음에는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런 학문들이 분과 학문으로 나뉘어 답을 찾는 과정에서 처음 시작했던 문제를 잊은 것이지요.
그렇게 현대의 분과 학문들이 거대 담론을 회피하고 있는 사이에, 종교나 음모론과 같은 다양한 거대 담론들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또 그런 것에서 답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뒤르켐이 말한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우주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지요. 빅 히스토리는 우주 속에서 길 찾기입니다. 제 책의 제목을 <시간의 지도>라고 부른 이유도 우주의 거대한 시간과 공간의 척도 안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지도를 제공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들에 답을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거나 답을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학문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거대 담론이 방법론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어떤 문제를 갖고 있다고 해도, 저는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근영 : 저도 고등학생과 대학생 그리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빅 히스토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빅 히스토리라는 거대 담론이 필요한 이유를, 현재 인류가 처한 문제를 근본부터 살펴보고 그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하곤 하는데요.
크리스천 :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빅 히스토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서로 다른 민족이나 국민이나 성이 아니라 하나의 종입니다. 그 종이 생물권과 맺는 관계가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류가 현재 처해 있는 인구나 기후, 에너지 등의 문제는 인간이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종이며 이 종의 미래는 그것이 생물권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어떤 접근법보다 빅 히스토리적 관점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저는 2013년에 출판된 'State of the World' 보고서에 빅 히스토리가 사람들의 태도와 가치관을 바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주제의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Crafting a New Narrative to Support Substantiality", Is Substantiality Still Possible?, State of the World, 2013, The Worldwatch Institute)
이근영 : 앞서 잠시 언급하신 것처럼 빅 히스토리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의 목소리는 과학자들보다는 역사학자를 비롯한 인문학자들로부터 나옵니다. 자연의 역사는 몇 가지 패러다임 혹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역사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크리스천 : 역사학의 오래된 문제입니다. 지금 사회적 다위니즘을 주장하거나 인간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식의 조악한 결정론적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는 없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의 역사에도 생물의 역사에 존재하는 자연선택과 같은 수준의 개방적이지만 방향성이 있는 패러다임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지도>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집단 학습(collective learning)'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집단 학습을 통해서 동물과 구분되었고, 그것이 환경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었고, 그에 따라 물질적 축적이 가능해졌고, 도시와 국가, 문자, 불평등, 혁신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서로 다른 세계 권역들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데요. 서로 전혀 접촉이 없었던 아프로-유라시아 대륙과 미주 대륙에서 시간을 달리하면서 비슷한 문명들이 나타나서 발전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호주도 만약 구대륙 문명과의 접촉이 없이 만 년 정도의 시간이 더 흘렀다면 비슷한 문명을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근영 : 역사학에서 집단학습이라는 개념이 생물학에서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이 갖는 수준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집단학습과는 다른 패러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로버트 라이트의 <넌제로(NonZero)>(임지원 옮김, 말글빛냄 펴냄)나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Why the West Rules – for Now)>(최파일 옮김, 글항아리 펴냄) 같은 책들도 역사학의 패러다임을 찾으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크리스천 : 저도 그 두 책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주장들이지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집단 학습이 역사학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뇌과학과 정보 이론 등 공부할 주제들이 아직 많이 있습니다.
이근영 : 자연스럽게 빅 히스토리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크리스천 : 제가 국제 빅 히스토리 학회의 회장을 맡고는 있습니다만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대단히 많은 미지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빅 히스토리에 접근했다면 앞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분야에 강조점을 둔 빅 히스토리를 만들어낼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에릭 셰숑 같은 천문학자가 '우주 진화(cosmic evolution)'이라는 주제로 빅 히스토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물학이나 인류학 혹은 지구 물리학적 관점에서의 빅 히스토리도 등장할 것입니다.
또 독립적인 학문으로서 빅 히스토리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질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집단 학습을 포함해 엔트로피, 복잡계 등이 빅 히스토리의 방법론으로 활발하게 연구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근영 : 저도 선생님의 책을 번역하고 빅 히스토리를 강의하면서 그런 방법론적인 노력이 좀 더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빅 히스토리의 문제라기보다는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 그렇습니다. 빅 히스토리는 전 세계적으로 이제 막 시작된 학문으로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근영 : 빅 히스토리 자체에 대한 질문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이미 빌 게이츠가 빅 히스토리를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빅 히스토리의 내용보다 빌 게이츠에 대한 관심이 앞설까봐 걱정은 됩니다만 이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빌 게이츠와는 어떤 인연이신지요?
크리스천 : 사실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저만 빌 게이츠를 알고 그는 저를 모르는 관계였습니다. 제가 빌 게이츠로부터 전화를 받은 날을 지금도 기억하는데요. 사실 학교에 복잡한 일이 있어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전화를 받았습니다. 빌 게이츠 사무실이라는 전화였지요. 저는 누군가 장난을 한다고 생각해서 무뚝뚝하게 응대했습니다. '제가 당신이 찾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지요?' 아마 그런 정도였을 겁니다. 어쨌든 통화가 됐고, 빌 게이츠는 제가 미국의 한 교육회사와 만든 빅 히스토리 강의를 들었다며 그것을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지요. 제가 늘 원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 사이트입니다. 현재는 학교용 프로그램으로 교사들에게만 열려 있지만, 10월쯤에는 개인들도 혼자서 빅 히스토리를 배울 수 있는 별도의 프로그램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될 것입니다.
이근영 : 기대가 됩니다. <시간의 지도>를 읽게 될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크리스천 : <시간의 지도>가 출판된 후에 빅 히스토리는 상당히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지도'에 제시된 우주 역사의 '지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빅 히스토리는 몇 십 년이나 몇 백 년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137억 년의 역사를 다루는 내용이니까요. 한국의 독자들이 '시간의 지도'를 통해 빅 히스토리가 제시하는 '지도'를 이해하고 그 지도를 통해 우주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진행·정리=이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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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 열린 아름다운 지도 속을 거닐자
<시간의 지도>는 어떤 책인가? - 조지형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시간의 지도>(데이비드 크리스천 지음, 이근영 옮김, 심산 펴냄). ⓒ심산
한적한 오후, 간간히 날빛 비치는 울창한 숲속을 거닐 때면, 숲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내뿜고 들이마시는 청량한 공기는 가슴과 머리를 휘돌아 숲으로 되돌아가고 또다시 내게 돌아온다. 그러면, 나와 숲은 하나가 된다. 보들레르는 '교감(交感)'이라는 시에서,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있는 기둥들은/ 때때로 어렴풋한 애기들을 들려주고/인간이 상징의 숲 속을 통해 그곳을 지나가면/ 그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라고 썼다. (<악의 꽃>(김인환 옮김, 큰글 펴냄)) 숲과 인간이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향기와 빛깔과 소리"로 서로 화답하며, 우리는 자연과 하나가 된다.
<시간의 지도>를 읽고 있노라면, 보들레르가 이야기했던 교감이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도 불현듯 일어난다. 근대의 분과 학문적 지식체계와 전문화된 교육 속에서 상실한 우주와의 교감. 과학적이지는 않았지만, 오래전 초롱불빛 아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 속에서 나의 위치를 찾고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재발견했던 그 우주와의 교감.
역사를 인간의 역사 안으로 비좁게 몰아넣은 후, 우리는 꽤 오랫동안 우주와의 교감을 상실했다. <시간의 지도>는 너무나도 당연한 현실의 실제를 가르쳐준다. 문자를 가진 인류뿐 아니라 문자가 없던 현생인류에게도, 동물과 식물 그리고 자연에게도, 그리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빛을 발하지 못하는 무수한 성운과 우주 먼지에게도 역사가 있다는 엄연한 현실과 사실을 가르쳐 준다.
어느 일간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土'는 인문계 학생들에게 '흙 토'자로 읽히지만 이공계 학생들에게는 '+'와 '-'로 읽힌다. 이건 단순히 보는 관점의 문제만은 아니라, 상충하는 다른 세계관의 갈등 문제다. 이런 독법은 서로 공유되거나 의사소통되지 않는다. 영국의 과학자 찰스 퍼시 스노우는 <두 문화>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의사소통 단절이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스노우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의사소통 단절의 근원은 전문화된 지식과 교육이다. 인문계 학생들은 태어나면서 인문계 학생이었던 것이 아니다. '인문계 학생'으로 길들여지고 교육되고 양육된다. 이공계 학생도 마찬가지다. 융합과 통섭의 깃발을 내걸고 융합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안주하고 이익이 산출되는 영역을 신격화한다. '인문학의 위기'론과 '이공계 기피 현상'론은 분과 학문적인 '두 문화'의 신을 섬기는 사제(司祭)들이다. 이 사제들은 모든 원인을 자기 분야에 대한 국가의 배타적인 재정 지원 부족이라고 주문을 건다.
<시간의 지도>는 이런 분과 학문주의의 물신화를 거부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학문의 위기고, 이공계 기피 현상은 곧 학문의 기피 현상이기 때문이다. 통섭을 외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분야에 안주하고 있는 무책임한 학자들에게 <시간의 지도>는 경고의 신호를 보낸다.
융합과 통섭의 첫걸음은 전문화된 언어의 민주화다. 인문계 학생과 이공계 학생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고 서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언어들을 만드는 일이 <시간의 지도>에서 벌어진다. 전문 언어를 최대한 적게 사용하고 개념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천문, 화학, 생물, 지질, 인류학 등의 여러 분야가 망라되지만, 전문 언어의 민주화가 전개된다.
<시간의 지도>는 현재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융합형 과학' 교과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난해한 과학 이론과 수식이 여전히 난무하고 선다형 문제에서 정답을 구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의 '융합형 과학'은 그야말로 책 제목만 융합일 뿐이다. 교육 현장에서 거의 대부분 과학 교사들조차 혀를 내두른다. 융합을 내걸었지만, 팀티칭의 교사들은 자기 분야만 가르친다. 배우는 학생들이 알아서 '융합'하라는 식의 군사문화적 교과서는 융합의 가치마저 상실시킨다. 이런 융합은 안하느니만 못하다. 이건 융합도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의 지도>에서는 우주의 시작인 빅뱅에서 미래에 이르는, 말하자면 137억년이 넘는 시간을 '복잡성의 증가'라는 관점에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모든 전문 언어가 정제되고 순화된다. 바로 이 스토리텔링을 통해, <시간의 지도>는 암기하는 책이 아니라 이해하고 사색하는 책으로 변화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숲을 외면한 채 나무를 보려고 노력하는 독자들이 분명 있을 터이지만, 이 책의 제목이 '시간의 지도'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키가 훤칠하거나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나무 한그루 한그루에 홀려 길을 잃어버린 독자들은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혜택이 '지도'를 발견하는 데 있다는 점을 상기하라. 그 지도는 다름 아닌 이 책의 스토리텔링이다. 그래서 숲 속의 나무 몇 그루는 지나치고 그냥 잊어버려도 좋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숲을 보고, 숲속을 거닐며 숲과 이야기를 나누는 스토리텔링의 교감을 찾아야 한다.
물론 <시간의 지도>는 8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고, 내용도 중고등학교 수준 이상의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 사실, 이 책은 대학교의 교양과목 교재 수준보다도 조금 높다. 미국이나 호주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더욱 어려운 수준으로 느껴지는 것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인문과 자연과학의 포괄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편협한 교육 체계가 저지른 만행 때문이다. 지구온난화에 골몰하고 가까운 장래의 달과 화성 여행이 회자되는 오늘날에도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가로지르는 학문의 보편적 교양을 교육시키지 않는 정부의 무책임, 인문학의 위기론과 이공계 기피 현상론을 재생산하는 학자와 관료들의 이기주의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의 지도>를 읽기 위해서는 처음에 약간, 아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오래된, 좀 오래된, 사실은 137억년에 비교하면 정말 최근의,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970년대의 도표와 데이터들. 때로 어떤 과학이론은 조금 오래된 것일 수도 있다. 그걸 발견하곤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 책은 그래서 가치가 더 있다. <시간의 지도>는 오늘날의 과학적 발견에 따른 지식이란 암기해야 할 억압적 지식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것은 반론으로 극복할 수 있는 주장(claim)으로, 듣고 이해하며 감동받아야 할 이야기(story)로 전달된다. <시간의 지도>에서 보여주는 시간은 과거로 닫힌 창이 아니라 미래로 열려진 창이기 때문이다.
- 이근영 빅 히스토리 연구소 소장, 안은별 기자(=정리) ⓒ프레시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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