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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비극으로, 희극으로

by 숲길로 2013. 5. 19.

영국 작가 제이지(J.G.) 발라드의 소설 <코카인의 밤>에는 흥미로운 이론이 등장한다. 공동체의 개인주의와 권태를 깨고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해 행동할 수 있게 하려면 범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치와 종교가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들었다면, 정치와 종교가 죽은 시대에는 범죄만이 이런 일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범죄’는 단순히 형법의 측면이 아니다. 그것은 소설에서 ‘경계를 뛰어넘고, 사회적 터부를 무너뜨리는 일’로, ‘자극’(stimulation)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현대의 대중은 아이와 같아서 지속적인 자극을 필요로 하고, 이 자극이 이들의 일상을 견디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범죄적 자극으로 인한 공동체의 활력은 끊임없이 새롭고 더 큰 자극을 요청한다는 데 있다. 소설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이러한 미래는 우리 앞에 와 있다고 말한다.

 

시간마다 바뀌는 포털의 검색어, 자고 일어나면 터져 있는 사건들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인들에게 발라드의 소설은 이미 현실이다. 연예인의 열애설이 등장하고, 청와대 대변인의 성희롱 사건이 터질 때마다 포털과 트위터, 페이스북은 요동치고, 사람들의 심장은 두근거리며 말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미 ‘떠 있는’ 범죄와 자극을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범죄와 자극을 요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 없이 우리는 일상의 권태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범죄와 자극이 소비되는 시대에는 역사, 정치, 이념도 하나의 자극으로 소비되는 길을 밟는다. “우리 팀은 개성을 중요시하지 ‘민주화’하지 않는다”고 말한 인기 아이돌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때 ‘민주화’를 위해 구만리 같은 청춘을 버리고 제 몸에 불을 붙였던 20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민주화’라는 개념을 억압의 별명으로 쓰며 재미있게 가지고 노는 20대가 있다. 한국의 역사가 필수과목에서 사라질 때, <무한도전>은 재빨리 한국사 ‘특강’을 마련하여 먹고사느라 바쁜 아이돌들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만든다.

 

모든 거대한 것들이 ‘검색어’와 ‘아이템’이 된 시대에 유희는 소비를 넘어 공격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의 종말>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투쟁할 폭군이 사라진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바로 그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항해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똑같은 일이 지금 여기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오늘 33주년을 맞은 ‘5·18 광주민중항쟁’이 ‘북한 게릴라들의 소행’(<티브이 조선>)이고, ‘빨갱이 광주시민의 폭동’(‘일베’)이며, ‘임을 위한 행진곡은 빨갱이들이 부르는 반역의 노래’(지만원)라는 등의 또다른 ‘항쟁’이 솟아나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를 비롯해 좌파·여성·동성애자·유색인·장애인 등에 대한 온갖 종류의 혐오 역시 점점 극에 다다르는 중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자유’와 ‘애국’의 투사라고 부른다. 국가가 국사를 제거했듯이, 민주화가 또다른 ‘민주화’에 의해서, 자유와 애국이 또다른 ‘자유와 애국’에 의해서 거세되는 형국이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문제는 이 놀라운 ‘희극’을 우리가 벗어날 능력이 있는가이다. 역사와 정치와 이념이 이미 소비와 공격의 대상이 되어버렸을 때, 1980년대식 열사의 ‘진정성’(고통)이나 우리 시대의 소프트한 ‘힐링 정치’(쾌락)는 이 뒤틀린 사도마조히즘적 경향을 뒤바꾸기엔 벅차 보인다. 과연 우리는 시민군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사진에 대고 조롱하는 ‘일베충’들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신 버전 ‘역사의 종말’은 질문한다. 답을 찾아야 할 때다.

 

                  - 문강형준 / 문화평론가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