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보고 듣기

<포르노 이슈>한물 간 '포르노'에, '구멍'으로 답한다?

by 숲길로 2013. 7. 10.

 

미국 성인 여성들 중 43퍼센트가 성기능장애라는 뉴스가 신문, TV 등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오프라 윈프리 쇼>의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오르가즘 주식회사(Orgasm Inc.)>라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런 수치와 데이터는 어떻게 산출된 것일까? 여성의 성욕이 과잉인지 과소인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오르가즘에 도달한 것인지 미달한 것인지 등을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이 다큐에 따르면, 여성 성욕의 정상, 비정상은 제약회사와 그로부터 연구 지원금을 받은 보건, 의료, 과학계가 정의하고 그 성공(性功, sexcess) 여부 또한 그들이 결정한다. 미국의 거대 제약회사들은 삽입성교로 오르가즘에 이르지 못하는 여성들을 여성 성기능장애(FSD: Female Sexual Dysfucntion)로 규정하고 질병으로 승인받고자 갖은 로비를 다한다. 남성에게 처방된 비아그라, 테스토스테론 호르몬 등이 FSD 치료에 효과가 있다면, 제약회사로서는 황금어장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남성에게 효과가 있는 비아그라 등이 여성에게는 설탕물보다도 효과가 없다. 그러니 여성들이여, 성적 '웰빙'을 원한다면 여성의 절반을 환자로 만들려는 제약회사에게 자기 몸을 맡길 것이 아니라 포르노를 즐기라고 말한다.

 

 

▲ 다큐멘터리 영화 <오르가즘 주식회사>의 한 장면.

 

 

포르노는 이처럼 다양한 용도로 소비되고 있다. 포르노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주장은 시대착오처럼 들린다. 여성들 또한 레즈비언 포르노뿐만 아니라 다양한 포르노 장르를 즐긴다. 부모들의 노심초사에도 불구하고 '초딩'들도 야동을 소비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1990년 중반 포르노가 잠시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곧바로 잊혀졌다. 그로부터 20년이 채 안된 지금 우리는 '암묵적인' 포르노토피아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폰 시대는 아이포르노 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속속들이 노출되어 있는 포르노적인 시대에, 포르노가 뭐 어쨌다는 것일까? 수많은 글로벌 의제들이 경쟁하는 지금, 포르노가 우리 시대를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포르노 문화가 자연현상처럼 당연시 되는 것에 학계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된 것인가? 포스트포르노 시대에 포르노가 인간의 이해에 어떤 보탬이 되는가? 여기서 말하는 포스트포르노 시대는 포르노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여성이 포르노 재현의 희생양이라는 피해자 논리가 설득력을 잃은 시대를 일컫고자 함이다. 어쨌거나 포스트포르노 시대에 포르노 이슈를 정면 돌파해보겠다는 학계의 열정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이중적인 성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사회에서 포르노의 이슈화는 지적인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 <포르노 이슈>(김석·김운하·김종갑·서윤호·이명호·이은정·장대익 지음, 몸문화연구소 엮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우선, 사람들(주로 남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직장 생활이 문제가 될 정도로) 포르노에 환장하고 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포르노 이슈>(김석·김운하·김종갑·서윤호·이명호·이은정·장대익 지음, 몸문화연구소 엮음, 그린비 펴냄)에서 김종갑은 남성들의 포르노 탐닉을 '진짜' 여성성을 밝혀내려는 강박으로 설명한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극소 카메라를 통해 여성의 질 분비물, 질내 사정까지 보여주는 포르노가 등장했다. 이것은 여성성을 쾌락을 넘어 불쾌로, 욕망을 넘어 비체화되는 지점까지 밀고 나간다. 이처럼 여성성을 끝간 데까지 몰아가려는 강박을 김종갑은 '실재를 향한 열정'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성을 알고 싶다는 욕망은 여성을 벗기고, 벗기고 질속까지 벗기는 무한퇴행의 과정을 통해 결국 여성성이 빈 구멍이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성성의 실재에 도달하려는 남성의 욕망 자체가 포르노적인 것이 된다. 그 결과 김석이 말하다시피, 포르노적인 노력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실재로부터는 멀어지게 된다. 이런 포르노적인 욕망은 "낭만적 여성상을 전복시킴으로써 동물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서로 사랑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물처럼 교미하는 탈인격적, 탈상징화된 존재"로 재현한다.

 

포르노의 탈인격, 탈맥락화가 보여주는 정치성은 성기 주변에 무겁게 부착되어 있는 낭만, 사랑, 윤리, 도덕과 같은 문화적 코드를 해체하는데 있다. 이들 포르노는 유기체적인 인간의 몸이 가진 고정된(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기능을 전부 해체해버린다. 입은 오로지 먹는 데만 사용하고, 항문은 오로지 똥 누는 데만 사용해야 하는가. 입과 항문, 손가락과 발가락의 정상적인 용도는 과연 무엇인가? 왜 이 구멍은 삽입하면 안 되는가? 이 구멍에 삽입하는 것은 왜 도착이고 저 구멍에 삽입하는 것은 왜 정상인가. 이처럼 포르노에서 인간 몸은 정상적인 용도와 비정상적인 용도, 쾌/불쾌의 경계 너머에 있다.

 

인간의 몸이 인격의 차원이 아니라 동물적인 유기체가 되는 순간, 포르노는 진화심리학적인 설명과 맞닿게 된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존재이유를 생식과 번식이라는 가장 단순한 설명에서 찾는다. 바로 그 단순함이 설득력을 갖는다. 인간의 성행위에다 쾌락, 사랑, 연애 감정, 이야기, 배려 등으로 사탕발림을 하지만, 그런 것들은 번식 과정에서 진화된 부차적인 효과일 따름이다. 이 모든 것들은 자기 DNA를 남기려는 유전자의 목적에 봉사한다.

 

그렇다면 포르노가 자기 DNA를 남기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포르노 자체가 생식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번식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포르노 중독자들에게는 현실의 섹스를 견딜 수 없어하는 전도된 현상이 일어난다. 그들에게는 포르노의 가상현실이 더욱 현실적이고 행복감을 주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유전자가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논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주장해왔다. 인간은 생물학적 보상 시스템(Biological Incentive System: BIS)에 충실하여 유전적으로 결코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다는 설명이 그렇다. 인간이 유전자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것으로 설명해왔지만, 진화심리학은 결국 자기 이론의 한계를 문화적인 밈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문화적인 것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의견과는 달리 장대익은 리처드 도킨스의 밈 개념을 가져와서 문화적인 밈도 진과 마찬가지로 충실하게 생식, 복제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밈의 하나로서 포르노 밈이 만약에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포르노 밈 또한 진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이다. 포르노 밈은 자기복제를 위해 인간 숙주를 이용한다. 포르노 밈은 인간숙주가 포르노에 중독되어 파괴되든 망가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포르노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 밈이 인간을 착취하게 된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인간은 없어져도 포르노 밈은 살아남아서 번창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수렵시대 이후로 그다지 진화하지 못한 인간의 뇌는 아직까지도 2차원과 3차원을 종종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포르노를 '보는 것이 곧 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인간의 뇌는 자기 방에 붙여놓은 핀업 걸과 섹스'하고 싶다'가 아니라 섹스한다고 느낀다. 그런 현상을 진화심리학은 거울뉴런으로 설명한다. 거울뉴런은 다른 행위자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그 행위를 직접 할 때와 똑같은 효과를 내는 신경세포이다. 다시 말해 거울뉴런계는 타인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고, 타인의 행동에 대한 공감과 모방을 가능하게 해준다.

 

문제는 거울뉴런의 공감과 모방능력이 장대익이 말하는 것처럼 언제나 '도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물어보자. 공감과 모방의 능력으로 인해 확산된 포르노를 통해 인간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그 많은 밈 중에서 하필 포르노 밈을 진화시켰는가? 제 무덤을 스스로 파면서까지 포르노 밈을 진화시킬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진화심리학은 인간이 수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 밈이 혜택을 누린다고 말한다. 믿거나 말거나.

 

페미니즘적인 관점은 포르노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페미니즘은 포르노에 대한 남성들의 열광을 거세공포로 설명한다. 거세공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그렇지 않다. 페미니즘은 포르노 현상을 아버지의 거세가 아니라 '남근적 어머니의 거세'에서 찾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포르노에 열광하는 것은 여성을 대상화하고 정복하는데서 오는 사냥꾼으로서 쾌감과 권력과 지배욕 때문이라는 설명에서부터 한 걸음 나아가, 세상의 기원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남자아이의 공포와 불안이라는 인간(남자)의 조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거대한 남근적 어머니의 생사여탈의 위협 앞에서 떨고 있는 초라한 꼬마 아이. 포르노에서 남성적인 폭력성은 아버지의 법 이전에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남근적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로 인해 남자아이는 자신이 남자로서 정체성을 갖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공포에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한다. 포로노적인 욕망은 그런 불안과 두려움의 뒤집힌 형태이다. 언제나 과도하게 발기된 자신 물건을 '봄'으로써 거세 불안을 떨치고, 남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남성들을 그토록 포르노에 열광하도록 만드는 심리기제인 셈이다. 그런데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아이라면? 여성이 포르노를 즐기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성애 삽입 포르노에 바탕을 둔 설명은 여성의 욕망을 여전히 구멍으로 남겨두고 있다.

 

이 책 <포르노 이슈>는 우리 사회에서의 포르노 문제를 이슈화하고 돌파하기보다는 진화심리학, 라캉 정신분석학,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 페미니즘의 언어로 재번역하고 있다. 1996년에 출판되었던 <섹스 포르노 에로티즘: 쾌락의 악몽을 넘어서>(김수기 지음, 현실문화연구 펴냄)의 논의보다 더 나아간 것이 무엇인가? 포르노를 이슈화하겠다는 서문의 선언과는 달리 이슈는 사라지고 선언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수준은 훨씬 넘어 있다고 이 책은 자부하고 있지만, 그런 자부심에 걸맞은 내용이 채워진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왜 포르노가 화두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남성적 섹슈얼리티 여성적 섹슈얼리티에 어떤 이해를 가져다주는가, 포르노 보기 자체가 곧 포르노 '충동'인가? 등과 같은 무수한 질문에 <포르노 이슈>는 구멍으로 대답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시 묻고 싶어진다. 그래서 포르노가 어쨌다는 거야?

 

 

                         - 임옥희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공동대표 ⓒ프레시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