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 이후>(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지음, 강서진 옮김, 난장 펴냄). ⓒ난장
"미래는 없다. 우리는 현재의 무한함을 노래하고 미래라는 환영을 버린다."
<미래 이후>는 우리가 알고 믿어왔던 미래가 끝났다고 말하는 책이다. 그런데 무척 도발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사실 이런 뜻이다. 우리의 현재는 우리에게 익숙했던 과거와 결정적으로 단절되었다. 즉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달라졌고, 그래서 이제 우리가 알던 미래도 사라졌다!
여기서 잠시, 책을 구분하는 나만의 기준 하나를 밝혀두자.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 시대는 결정적으로 다른 세계다'라고 말하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시대는 근본적으로 변한 게 없다'라고 말하는 책이다. 비교적 최근의 사례를 들어 말해 본다면, 전자에 해당하는 책이 <피로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고, 후자에 해당하는 책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이다.(혹은 사람으로 바꿔 말하자면, 네그리는 전자에, 랑시에르는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의 추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자 하는 전자의 입장에서 볼 때 후자의 태도는 안일하고 맹목적이다. 반면에 몇몇 변화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똑같다고 말하는 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전자의 태도는 너무 가볍고 성급할 뿐이다. 한마디로 전자가 보기에 후자는 '꼴통'스럽고, 후자가 보기에 전자는 호들갑스럽다고 할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 두 입장은 좀처럼 접점을 갖기가 어렵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두 입장을 적당히 절충할 수가 없다. 각각의 입장 나름의 강점과 약점,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상쾌함'과 뭔지 모를 '찜찜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는 얘기다.
가령, 우리 시대(가 맞이하게 된 변화)를 냉철하게 '진단'하는 전자의 책을 읽으면 "그래 바로 이거야, 바로 이런 시대 속에 살고 있는 거로군"하며 무릎을 치다가도,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에 대한 '처방'에 이르면 이내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아니 고작 그런 대안이 전부란 말이야?")
그런가 하면 사태를 대범하게 파악하여 단호하고 명료한 처방을 내놓는 후자의 책을 읽으면 순간적으로 눈앞이 선명해지는 기분을 느끼다가도, 안개 속을 걷는 것 마냥 종잡을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면 이내 기운이 빠지는 걸 느끼게 된다("그런 고전적인 처방이 이런 복잡한 현실에 부합될 수 있겠어?") 진단과 처방, 분석과 해법 사이의 어쩔 수 없는 이 불균형. 우리 시대 책읽기의 딜레마가 거기에 걸려 있다.
<미래 이후>는 어느 모로 보나 전자에 가까운 책이다. 지난 세기의 산전수전을 몸소 겪어온 노 혁명가가 내리는 우리 시대의 진단과 분석에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물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바에야.
“나의 관점은 2세기에 걸친 진보적이고 계몽된 역사에 의해 형성됐다. 즉 미래가 근대의 약속들을 실현시켜 주리라 늘 확신해온 세대의 관점, 그런 시대의 관점이 나의 관점이다. 그런데 이는 과거와 미래에 관한 상상과 관련해 내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 나는 나의 정치적·문화적 에너지를, 나의 문화적 성장기에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문명의 질서를 복구하고 예전의 진보적 역사 리듬을 가져오는 데 모두 쏟아 부어야 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이런 태도는 내 눈을 가리고 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으며, 사회적 상상력의 저 깊숙한 구조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194쪽, 강조는 필자)
비포는 "내게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나의 관점, 그러니까 지난 2세기에 걸쳐 형성된 진보와 계몽의 관점이 현재 "사회적 상상력의 깊숙한 구조 안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비록 여전히 그런 과거의 관점에 입각해 행동하고픈 생각을 멈출 수 없지만, 나는 그게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안다. 결국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실제로 벌어졌다면, 나 자신을 만들어 낸 과거의 관점과 결정적으로 단절하지 않을 수 없고, 오직 그럴 때에만 이 달라진 현실을 헤쳐 나갈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거란 얘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의 과거(관점)와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의 무게다. 우리가 그 결연함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다면 '미래가 끝났다'는 전언의 무게도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의 '혁명은 없다'라는 말의 무게는, 바로 그 혁명이라는 단어에 걸려 있던 무게만큼, 딱 그만큼의 무게로 다가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비포에 따르면 "무엇인가가 바뀌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나는 자본주의 경제가 야기한 변화를 목격했고 이 변이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 판단했다."(243쪽) 그런데 그가 말하는 근본적인 변화는 자본주의의 형질 변화 같은 비교적 근래의 현상 뿐 아니라 1세기 이상 지속된 어떤 믿음의 종말을 가리키고 있다.
그 믿음이란 "미래주의적 상상력"의 다른 말로, 1909년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된 진보적 미래를 향한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말한다.(비포는 이 책을 '미래주의 선언' 100주년이 되는 2009년에 썼다) '성장'은 계속될 것이고, '진보'의 과정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어쨌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 이는 적어도 지난 한 세기 동안 진영과 방법론의 온갖 차이를 가로지르는 "공통의 확신"이었다.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근대 정치이론의 서로 다른 일파들이 다음과 같은 공통의 확신을 공유한다. 즉 현재는 암울하지만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확신을 말이다."(35쪽)
물론 이런 믿음에 부침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09년 개시된 그 믿음은 1968년에 절정에 이르렀고, 서서히 전복되다가 1977년에 전환점을 맞이했다.(비포는 어째서 1977년이 의미심장한 전환점이 되는지에 관해 수많은 예를 통해 상세히 설명한다. 모든 면에서 그것은 서구정신이 슬그머니 지하에서 붕괴되기 시작하는 어두운 '전조'의 시작이었다) 그런가 하면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잡지 <와이어드>로 대표되는 "사이버(디지털) 유토피아"의 짧은 융성기를 거친 후 2001년 9.11과 함께 결정적으로 저물었다.
그렇다면 이 부침의 세월 동안 세계는 어떻게 바뀌어 온 것일까? 변화된 세계에 대한 비포의 진단은 "불안정성이 사회적 관계의 일반적 형태가 된 상황"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구도("인지자본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가 '기업가'가 되는 시대이고, "접속"이 "결속"을 대체한 시대이며, 규율과 복종이 아닌 자발성과 진취성이 고취되는 시대이다. 그것은 푸코의 '삶-정치'의 세계, 들뢰즈의 '통제사회,' 네그리의 '포스트-포디즘'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진단이 "정치적인 만큼이나 임상적"(21쪽)이라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기호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사회의 심적 에너지를 동원해 경쟁과 인지적 생산성에 대한 충동으로 향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임금 노동자의 "몸"을 손질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정동과 정신능력을 동원하는" 체제인 바, 그에 따르면 "1990년대의 신경제는 뉴런을 동원하고 창조성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프로작 경제였다."(61쪽) 프로작(Prozac)은 미국 제약회사가 개발해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이용되고 있는 항우울제의 이름이다.
사실 사회체에 대한 이와 같은 "임상적 진단"의 경향은 언제부턴가 지배적인 유행이 된 것처럼 보인다.(이른바 '면역학적' 패러다임의 끝을 설파한 <피로사회>에 이어 최근엔 조금 더 '소프트'해진 독일식 진단서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로도스 펴냄)도 배달된 바 있다) 당연히 병든 사회체에 대한 주된 진단명은 "우울증"이다. 비포에 따르면 우울증은 우리의 신경체계에 과도한 압력이 가해졌을 때 나타나는 이차적 현상이다. 즉 우울증의 앞자리에는 신경에너지의 지속적인 동원, "행동하고 경쟁하려는" 과잉된 시도가 자리한다.
그러니까 우울증이란 행동하고 경쟁하려는 시도에서 좌절한 주체가 "자신의 리비도 에너지를 사회적 무대에서 스스로 회수해"(102) 온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유기체의 신경체계에 투입되는 과도한 자극과 집중적인 동원, 그리고 그에 따른 우울증적 퇴행 현상이 야기한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소통과 연대의 기본 조건이라 할 자연스런 "공감능력"과 "감수성"의 쇠퇴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유기체는 온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자극들에 계속 노출되어 왔다. 의식 있는 유기체에 가해지는 신경자극의 가속화와 강화는 우리가 감수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지적 막을 얇아지게 만든 것 같다.”(110쪽)
그런데 이것은 다만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의 산물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미래의 종말을 1세기에 걸친 과정으로 파악하는 비포의 진단은 보다 근본적이다. 그가 레닌의 주지주의와 개인적 우울증 사이의 관련성(65쪽)을 언급할 때, 그 비판의 화살은 지난 세기 전체를 지배해 온 근대의 정치적 형상, 곧 "투사 모델" 혹은 "활동가 모델"을 향한다. 사실 이 문제는 비포가 <미래 이후>에서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인 '대항 세계화 운동의 한계'에 걸려있다.
"도대체 왜 2003년 2월 15일에 시작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시위인 반전 지구행동은 바그다드 폭격을 막지 못했을까?"(19쪽)
그 해답은 근대적 정치 주체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는 행동주의 모델 자체의 한계에 있다. 비포는 행동주의가 자본의 무한하고 침략적인 힘에 대한 주체의 나르시시즘적인 반응이며, 활동가로 하여금 결국 좌절감, 우울함, 모욕감을 느끼게 할 따름인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거리에 이런저런 것에 반대해 항의를 벌이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월요일 아침이면 바로 이 사람들이 사무실, 공장, 학교, 실험실 등에 앉아 기업의 규칙에 따"(189쪽)르는 상황, 유례없는 힘과 파급력을 가진 운동이 대중의 일상생활을 전혀 바꾸지 못하는 이런 상황 너머를 상상하려면, 말 그대로 '미래 이후'의 정치학, 과거의 주체 형태 '이후의' 정치학이 모색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포는 "보드리야르 다시 읽기"를 통해 주체성을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한다. 시뮬라크라의 확산과 그 뒤를 이은 "소진"을 예견하는 보드리야르의 파국적 전망은 비포에게서 "20세기의 혁명이론들에 생명을 불어넣은 활기찬 주체화의 전도, 우울과 소진에 근거한 내파적 전복 이론의 개시"(212쪽)로서 다시 읽힌다. 행동주의자의 관점에서 다만 무능력으로 여겨질 뿐인 소진은 '무위'의 문명을 향한 느린 운동의 시작으로서 재규정된다.
결국 비포가 제안하는 방식은 예의 저 "급진적 수동성"의 모델, 신자유주의적 게임의 장에 대한 비참여의 전략이다. "경제의 현장으로부터 대거 물러나기, 떨어져 나오기, 탈주하기, 정치판의 쇼에 참여하지 않기를 호소하는 것."(228쪽) 그는 "우리가 소진으로부터 시작할 때에만, 물러나기의 창조적 측면을 강조할 때에만" 죽음, 살해, 자살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자율, 새로운 사회적 창의성, 새로운 삶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말한다. 비포에 따르면, 이는 "정치적 과제이지만, 무엇보다도 문화적 과제이자 정신치료학적 과제이기도 하다."(232쪽)
그렇다면 '비관론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는 비포가 제안하는 이 전략은 새로운 것인가? 기존하는 세계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행동, 이 "바틀비(Bartleby)"적 거절 모델의 가치(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테이블을 치우는 첫 번째 계기")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모종의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나만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사실 이 피로감은 현실과의 괴리(시스템에 참여하지 않음이 곧 생존의 문제로 직결되어 사실상 자살적 주변부로 전락하는 상황)에서만 기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의 가시화된 형태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난감함이 거기에 더해진다.
일본에서는 최근 "사토리 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고 하는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불황기에 태어난 10대~20대 청년들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한다. 명품을 사지 않고 명문대에 진학할 생각도 없으며, 심지어 여권도 안 만드는 세대. 마치 "득도"라도 한 것처럼 살아가는 이런 젊은이들을 마침내 자본주의적 꿈과 목표를 스스로 거절하는 "바틀비적 주체"의 등장으로 간주하기엔 어쩐지 찜찜해지는 게 사실이다. 아마도 그건 드라마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을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을 비웃는 터미네이터"로 간주하는 것(황진미, ☞바로가기)만큼이나 용감한, 개념적 전도를 요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비포의 이런 '처방'은 희망의 다른 이름일 뿐, 정작 귀 기울여야 할 것은 그의 '진단'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행복한 결말"이 없는 미래 이후를 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근대성의 미래 다음에 올 텅 빈 공간에 대한 무지의 상황" 자체를 미래 이후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르고, 사회적 자율에 관한 오늘날의 문제에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척하지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방황을 보여주는 지도를 스케치하는 것, 그리고 빠져나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20쪽)
그런데 '진보'라는 미래의 환영이 끝장났음을 설파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끊임없이 떠올렸던 건 지난 세기 중반에 똑같은 문제를 다르게 사고했던 한 사람, 벤야민이었다.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길 펴냄)에서 미래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들, 다가올 세기의 진보를 말하는 같은 편(사민주의자들)을 향해 "미래를 등지고서 과거를 향하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그 과거란 대체 어떤 과거인가? 그건 바로 "이전에 때려 눕혀진 자들의 전통"이다. "비상사태"를 상례로 살았던 사람들, 이제는 전리품의 '유산'이 되어버린 그 과거를 "구제"해 내는 것이 그가 부여한 과제다. 복수하는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해방된 자손의 이상에서가 아니라 억압받은 선조의 이미지에서 그 자양을 취한다"(344쪽)고 그는 단언했다. 그것은 "뒤에 태어날 형제들과의 연대가 아니라 죽은 형제들과의 연대를 표현"해주는 말인 까닭이다.
혁명적으로 사유하는 자에게 역사적 순간의 독특한 혁명적 기회는 정치적 상황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기회는 "그때까지 닫혀 있던 과거의 어떤 특정한 방을 열고 들어갈 힘을 통해서도 못지않게 확인된다."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기" 때문에, 미래 속의 매 초는 바로 그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 된다고 그는 적었다.
당신이 알던 '미래는 없다'고 말하는 비포의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벤야민이 말했던 저 "작은 문"이 소리 내어 닫히는 장면을 자꾸만 떠올려야 했다. 희미한 메시아적 힘으로 우리를 과거와 이어주고 있는 저 작은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채로, 우리는 과연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죽은 형제들을 저 문 밖에 남겨둔 채로 태어날 형제들과 연대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애'와 '자기애'를 갖고서 '무언가가 되어 갈 수' 있을까?
마지막 구절은 내 말이 아니라 이제 당신이 알던 '혁명은 없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책에서 빌려온 말이다. 비포의 <미래 이후>의 일본어 번역자이기도 한 히로세 준이 쓴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김경원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라는 '이상한' 책이 그것인데,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바로 이게 사토리 세대를 낳은 사회의식의 세련된 판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될 테니 이쯤에서 멈추기로 하자.
- 김수환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프레시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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