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눈은 한없이 깊어 나는 거기서 기억을 상실할 정도다.”
그 깊은 눈의 주인공은 바로 루이 아라공의 아내인(또한 작가였던) 엘자 트리올레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이 아내 엘자에 대한 사랑을 담아 쓴 시 ‘엘자의 눈’의 한 구절이다. 30년 이상 결혼생활을 이어갔던 이들은 죽어서도 함께 묻혀 있다. 아라공에게 엘자는 삶의 동반자이며 영감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는 아내를, 그리고 여자를 ‘숭배’했다. 그의 또다른 작품 ‘미래의 시’에서 이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혼을 장식하는 채색이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나고 사랑을 위해 태어나는 것이라고.”
홍상수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던 이 유명한 시구, 상당히 문제적인 이 구절은 아라공의 여성에 대한 관념을 보여준다. 그런데 아라공은 1970년에 아내가 죽자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백했다. 커밍아웃. 그는 동성애자였다. 그렇다고 그가 남긴 이 찬미의 언어들이 거짓은 아니다. 그건 별개다. 그는 엘자와의 사랑을 간직한 채 인생의 말년을 ‘드디어’ 자신의 성 정체성에 충실하게 보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프랑스공산당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아라공은 성 정체성을 숨겨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동성결혼도 찬성하는 프랑스공산당이지만 당시에는 성에 대해 다분히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성애자의 ‘역할’을 하며 살았지만 뒤늦게 정체성을 밝힌 인물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는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기도 했다. 유명인이 커밍아웃을 할 때마다 지지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개인의 성 정체성을 만인에게 밝혀야 하는 부담을 안기는 사회가 안타깝다. 이성애자라는 고백이 필요 없듯이 동성애자라는 별도의 고백도 필요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혐오의 시선이 존재하는 한 용기 있는 고백의 행렬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한편 경제학자 케인스처럼 동성애자로 살다가 이성과 결혼하는 이도 있다. 억지로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사랑의 방향이 이동했다. 한때는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 어리석게도 “어떻게 그렇게 바뀌었어요?”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대답은 그저 “어떻게는 뭘 어떻게. 그냥 그렇게 되는 거지. 당신은 당신 미래의 성 정체성을 알아요?”
편의상 ‘분류’를 하긴 하지만 성적 지향은 반드시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로 반듯하게 나뉘지 않는다. 인간의 성별이 ‘양성’으로 나뉘지 않듯이. 누구나 자신의 미래는 모른다. 그저 두려움 없이 현재의 사랑에 충실한 인간만이 해방된 자라고 생각할 뿐이다. 스스로 해방되지 못한 자는 타인을 억압한다.
현재 차별금지법과 관련하여 낙선운동을 벌이고 정당 해체까지 요구하겠다는 한국의 보수 개신교의 도를 넘는 성소수자 억압은 거의 광기의 수준이다. 사회 혼란이라는 가당찮은 이유를 들어 만만한 소수자를 억압하며 기독교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들에게 종교는 ‘억압의 도구’다. 동성애자를 성서로 ‘치료’한다는 한 목사는 “동성애자가 군대에 가면 다 자기가 좋아하는 동성들이다”라며 걱정을 한다. 우스꽝스럽다. 동성애자는 모든 동성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이성애자들은 모든 이성을 좋아하고 아무 이성에게나 성적 접촉을 시도하는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끔 동성애자를 동성 성추행범처럼 묘사할 때 한심함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기존의 질서 속에서 의심 없이 쏟아내는 편견은 아주 편한 정치적 선동이 되고 억압의 기제가 된다. 사회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이 패악을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이라영 /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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