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비켜 산으로 가는데 산에서 다시 국가를 만난다...?
거칠게 말해, 산은 자유의 나라고 국가는 강제의 영토다. 국가 대항 스포츠도 아닌데도 국가의 깃발을 흔들며 산 오르는 이들을 나는 경멸한다. 맹렬한 정치놀이에 썩은 마음 비운다며 조무래기들 끌고 떼지어 산 오르는 저들의 잔머리와 위선만큼 경멸한다.
몇 년 전 친구 따라 모 인터넷 등산 동호회에 잠시 가입했던 적이 있다. 함께 산행을 했는데 산꼭대기에서 정상식 한다며 애국가를 부른다! 내가 등산 동호회를 가장한 무슨 극우단체에 가입한 건가 싶어 잠시 황당....
역시 그 산악회, 그 해 송년모임 갔더니 돼지갈비집 벽에 큰 태극기 걸어놓고 국민의례를 한다. 저질 코미디도 유분수지... 몇 번 같이 산행하며 좀 편해진 동호회원들에게 대체 등산과 국가가 무신 관계인지 내 대가리로는 도무지 요해 불능이니 한 깨우침 달라고 떼를 썼지만 다들 묵묵부답...
한동안 잊었던 그 황당한 기억을 다시 만났다. 코스가 탐나 따라나선 안내산악회, 국기 걸어놓고 국민의례하며 시산제를 시작한다....!!
여친이랑 야한 영화 보러 가서 애국가 들으며 가슴에 손을 얹던 해괴한 짓거리 없어진 지도 오래다. 대자연으로서의 산 혹은 산의 영(靈)에 정성을 다해 예하고 고하는 자리에 대체 국기가 왜 있어야 하는지, 뜬금없는 애국가가 그 자리서 왜 울려 퍼져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국민 자격으로 산 오른 거도 아니고, 국민 대표로 깃발 꽂으러 나선 것도 아닌데... 요령부득 아둔한 대가리엔 또 쥐가 난다.
일상 속의 만연을 넘어, 없어야 할 곳, 극복해야 할 곳까지 범람하는 저 도저한 국가주의. 그 악취는 취미 등산이란 순수한 행위까지 치명적으로 오염시키고 있었다.
등산은 그저 등산이다. 좋아서 산 오르는 건데 국민의 자격이 무슨 필요인가? 그런 건 정치인이나 국가대표 선수에게나 맡겨 둘 일이다. 말 그대로 취미를 같이하여 모인 동호회, 그날그날의 산행 코스따라 참가하는 안내 산악회까지 국가주의에 물든 등산 문화라면 정말 앞날이 캄캄하다.
그렇잖아도 대간이니 정맥이니 인문지리적 코드들을 오남용하며 유행병처럼 번지는 경박한 산악 질주 행위가 등산을 즐겁고 아름다운 취미나 스포츠가 아닌, 효율과 성과에 집착하는 무슨 생산행위처럼 만들고, 취향의 위계화를 넘어 산과 자연까지 위계화하며 권력의 코드를 심어가는 지경 아닌가? 지질학적 개념의 한계를 보완하는 대간 정맥 개념의 긍정적, 차별적 의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등산문화를 획일화시키고 근거 희박한 지리적 신비화로 저급한 종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비린내나 풍길 따름이다.
지평을 넘어 고도까지 정복한다는 서양의 알피니즘이 제국주의 시절, 식민 지배와 영토 침탈의 한 도구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참혹한 식민 피지배 경험이 있는 우리로서는 등산문화의 국가주의 오염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마땅하거늘...
인간의 국가이지 산의 국가, 자연의 국가는 아니다. 산은 국가 이전에 자연이다. 입으로는 산 앞에서의 순수니 대자연 앞에서의 경건과 겸허니 하면서, 행동으로는 그 넘의 국가 깃발을 갖다 꽂으려 하는 자, 자연을 말할 자격도 인간의 자유를 말할 자격도 없다.
제발 부탁하느니,
국기 꽂을 데와 아닌 데를 분간 좀 하자. 전봇대마다 오줌 깔기는 뭐처럼 영역표시 좀 대강 해라. 특히 서울산엔 국기가 많더라. 어느 넘도 그 산들이 대한민국 영토 아니라고 한 적이 없는데 웬 호들갑?
암 데나 국기 걸어 국민됨의 불편함을 일깨우는 짓 좀 하지 말자. 산 좀 편하게 다니자. 수만사람이 저마다의 수만가지 이유로 산을 오른다. 국가를 품고 영토를 순례하고 싶은 자, 마음 속으로 혼자 하시기 바란다.
인간이 갖다 꽂기 전에 산은 단 한 번도 그 깃발을 부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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