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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여행/경상권

팔공산(......)

by 숲길로 2007. 6. 4.

코스 : 갓바위 - 주능선 - 동봉 - 동화사

 

느지막한 낮시간, 오랜만에 팔공산을 오른다.

갓바위 오르는 계단길, 가파르게 쏟아지는 오후 햇살을 피해 숲길로 들었다. 지천으로 흩어진 산길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무잡이로 허위허위 걷는다. 솔바람 그늘 아래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산객들은 야위어 가는 구월 햇살을 탐하고 있다.


바위 틈새를 비집고 기어이 능선으로 길을 잡아 들어서니 장한 남북의 산무리들과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든다. 세상의 저러한 단순함이여. 하늘과 땅을 가르며 구비치는 선을 아득히 바라보며 걸음은 하염없다. 능선 돌아오르며, 바윗길 뒤로 숨으며, 푸른 선상에 머리 치켜들고 불쑥 허공도 찔러본다. 온몸은 바람에 잦아들고 구월 햇살은 푸르름의 더미 위에 어쩔 줄 몰라하며 천천히 사위어간다.

서너시간쯤 걸었을까? 동봉이 성큼 다가오고 그 너머 흉측한 건물덩어리들이 기암절벽 드리운 비로봉을 걸터앉아 목을 비틀고 있다. 김밥 몇 조각으로 요기하고 바위에 몸 누인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서늘하니 허공 중에 나 홀로인 듯 무심을 달린다. 


동봉을 오른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짓는 연봉들은 서녘으로 붉게 물든다. 땅덩이가 둥글지 않다면 가없는 끝을 바랄 수도 있을 터.

저녁 바람이 차다. 지는 해를 마저 누리려 덧옷 걸쳐 입었다.

하늘이 온갖 빛으로 물들어 온다. 익숙한 푸르름부터 형용을 넘는 미묘한 색들의 향연. 세상의 아름다움은 저렇듯 모두가 각각으로 다르다. 해 떨어지는 바로 그 자리서 어둠은 가장 진하고 두텁게 번져 나온다. 동녘 산들과 낮게 걸린 구름 몇 조각이 서로를 물들여간다. 햇살 아래 가장 다채롭던 그것들, 밤은 서쪽에서 와서 동으로 남으로, 다시 북으로 마지막에는 하늘의 가장 깊고 높은 곳으로 밀려 오른다. 어둠이 가장 먼저 덮는 것은 땅, 깊고 푸른 숲이 어둠의 빛으로, 오직 바람만 서걱대는 최초의 공간으로 되돌아가면 나는 사이사이 희게 빛나는 길을 따라 잰걸음을 친다.

어릴 적 긴 낮잠에서 깨어나 노을 가신 자리에 내리는 어스름을 보면 까닭 없는 두려움과 지긋한 슬픔이 밀려들던 기억. 하나 둘 별이 뜨면 하늘로 다시 열린 밤의 공간을 평온하게 배회하곤 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그 바닥 깊은 상실감은 무엇이었을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시간에 눈뜨는 것들, 그들의 시간은 길다. 세상이 열리고 닫히는 새벽과 저녁의 어스름. 영원의 비밀을 엿보는 문이 있다면 그 문을 여는 주문이 말해지는 것도 바로 그 때이리라.


가파르게 내린 산길이 끝나고 적막에 빠진 암자를 우로 돌아 바쁘게 걷는다. 문득, 느리게 휘젓는 듯한 거대한 날개짓 소리를 들었다고 느꼈다. 머리칼이 쭈뼛 선다고 했던가, 혼백이 일순 정수리로부터 빠져나가 허공을 한바퀴 멤돌다 귓전으로 다시 돌아오는 듯하다. 얼마를 걸었을까, 다시 하늘이 열리고 뿌려놓은 듯한 별의 더미가 사방으로 쏟아진다. 밤이 개벽하는 것이었다. 사물은 새로이 밤빛으로 살아나고 은밀하게 다가와 저마다의 꿈을 열어 보인다.


동화사 뒤쪽, 멀리 자판기가 보인다. 지키는 이도 앞에 선 이도 없이 혼자 불 밝히고 밤새우는 쇳덩어리. 절 입구 마애불 앞을 지난다. 깊은 염원에 빠진 한 아낙이 하염없이 절을 하고 있다. 어둠 속에 선 흐린 윤곽이 곱다. 늦지 않은 산사의 밤이지만 무량으로 깊어버린 어둠 속에서 흐린 촛불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내가 본 것은 어둠을 가르는 촛불이 아니라 무한히 계속될 것만 같은 그녀의 몸놀림이었다. 그녀는 빛나고 있었다. 온몸이 빛나고 있었다.


동화사 계곡 타고 내리는 길은 이제 영 옛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대불사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야만. 호젓하고 그윽하던 길은 온통 시커먼 아스팔트로 덮이고 발길 닿는 곳마다 흰 대리석과 화강암 구조물이 들어섰다. 거대한 입불상은 사람을 압도하며 가위누른다.

먼발치로 건너보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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